한국에서 귀한 손님이 다녀갔다. 5년만의 재회, 5년만의 재대로된 휴가였다. 늘 있던 로스앤젤레스에 있었음에도 쓸거리가 한보따리 생겼다. 글감들을 쭉 늘어놓고 나니 오히려 무엇부터 먼저 써야할지 알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막상 글을 쓰려고 해봐도 뭔가에 가로막힌듯 전개가 쉽지 않아 멈추게 된다. 아무래도 나에게 글쓰기란, 즐거움보다 뭔지모를 쓰라림에 뿌리내린 행위인지도 모르겠다. 혹은 대단히 의미있는것 보다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뿌리내린 행위인지도 모르겠다.
의미로 꽉 찬 즐거웠던 기억 그리고 친구에 대한 고마움보다는, 이제 저녁이 선선하다는, 별 의미없는 얘기를 해보기로 한다. 벌써 2주쯤 전이었던가, 햇볕 작렬하는 대낮의 공기 속에 가을 냄새가 스며 있었다. 나의 친구는 대낮에 이곳에 도착해 '여기 날씨 실화냐'는 카카오톡 메시지로 여정을 시작했다. 나는 아침에 체육관에 갔다가, 늘 잠시 앉아 조용히 시간을 보내곤 하던 대성당을 향하는 길이었다. 반가운 메시지에 싼 국수 한그릇 먹듯 후루룩 앉았다가 후루룩 일어나는 수 밖에 없었다.
친구를 만난 곳은 거대한, 브루탈리스트 양식의 호텔 로비였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나사 우주선 개발공간의 배경으로 쓰인 호텔이었다. 불과 몇년 전 대학원 시절 교수와 언쟁에 지쳐 도망쳐간 곳이기도 했다. 건축 스튜디오를 제끼고 신기하게 생긴 건물 속을 두리번 두리번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던 때가 있었다.
나의 친구는 라스베가스에서 멋진 드라마를 쓰고 왔지만, 나로서는 드라마를 벗겨내고 왔다고 하는게 맞겠다. 친구는 아마도 오랜시간 꿈꿔왔을 주짓수 세계대회 포디움에 오르는 목표를 실현했다. 열심히 회사도 다니랴, 매일 도장에서 고통과 맞서랴, 아마도 정신없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나는 어떤가. 이 호텔에 들어서기까지 나의 여정은, 곧 드라마 따위는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는 과정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아마도 이정도 문장을 통해서 독자들께 전달되기는 힘든 이야기라는걸 인정해야만 하겠다.
비유를 쓸 수 밖에는 없다. 나의 친구가 이야기했듯, 비유란 결함많은 방식이라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다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영화 인터스텔라의 시나리오를 걸친 공간으로부터, 시나리오를 벗어던진 호텔 로비의 공간으로의 이행. 그게 나에게 있어서 이번 휴가의 의미다. --- 이렇게 뚝딱거리는 글을 쓰는 것도 참 오랜만이다. 이 얘기 저 얘기, 친구의 드라마틱한 도장깨기 나의 드라마 깨기, 이랫다 저랫다, 하는 글이라니 참 드라마틱하지 못한 글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아니 그러나, 아니 그래도, 아니 어떤 접속사가 적당할지 가늠되지 않는 문장을 쓸 차례다. 호텔 12층이 나에게는 나름의 포디움이었다는 것. 친구놈의 국제 경기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나 역시 아주 긴 경기를 뛰었다. 나의 상대선수는 딱 한놈이었다. 드라마. 결국 이 글이 끝날때까지도 내 상대가 어째서 드라마였는지, 드라마라는게 도대체 정체가 뭔지, 드라마와 경기를 한다면 도대체 어떤 경기를 한건지 제대로 설명할 길은 없을 것이다. 오늘의 나는 나에게 의미있는 말을 할 뿐이다. 친구놈이 상대를 초크로 (아마도 조르기 비슷한 기술?) 이겼듯이, 나역시 드라마를 초크로 이겼다.
라마 자식에게 초크를 건다는건 도대체 무슨 말인가? 그에게 조를 목이라도 있다는건가? 드라마는 인간처럼 혹은 라마처럼 폐호흡을 하는 동물의 일종이기라도 한가? 이 세가지 질문중, 아니 이 글에서 던지고 있는 그 어떤 질문에도 나는 답을 할 수 없다. 다만 한가지는 말할 수 있다. 드라마는 기린처럼 긴 목을 가졌다는 것.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늘 초크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 다만 그 우아한 목선에 반해 초크의 초 자도 떠오를 마음이 쉬이 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초크로 무너지더라도 드라마는 드라마처럼 금새 다시 일어나리라는 것.
호텔 야경을 바라보며 들었던 친구의 두려움 중 하나가 그런 것이었다. 이제는 주변에서 자신을 타겟으로 삼아 우후죽순 도전해 오리라는 것. 인터네셔널 포디움 별것 아니네, 라던가. 인터네셔널 포디움과 스파링이라도 한판 해봤다, 라던가. 그 뒤에 숨기고 있는게 야망이든 선망이든 어느쪽이건 부담인건 마찬가지일 것이다. 친구가 한국으로 떠나고난 뒤 집을 향해 밟던 페달의 가벼움, 그렇게 가볍게 에어컨 공기처럼 쏟아져 들어오던 뭔지 모를 감정같은 것, 낮이 짧아져 이미 펼쳐지던 석양 같던 그것, 벌써 기운을 차린 또 다른 드라마의 붉은 얼굴 같은 것.
아마도 그게 이렇게 붕뜬 문장들을 늘어놓을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드라마. 그런것은 없다. 드라마는 없다고 다시 셀 수 없을 만큼 중얼거린 뒤에는 또 어떤 드라마가 하늘을 물들일 것인가. 그렇게 물든 하늘을 바라볼 포디움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 여기서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생각은 접어두자. 그리고 홍삼을 먹자. 친구가 가져다준 홍삼. 그 홍삼을 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