팰리세이드에서 바라보는 안개낀 바다풍경을 다시 보려면 몇년을 기다려야 할까. 불길이 아직 잡힐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 조차 사치스레 느껴질 정도다. 여러개의 산불 지역과는 거리가 있는데도 회사는 조건부 재택근무에 들어갔다. 그만큼 LA 전역에 불길이 휩쓸고간 잿가루가 한가득이다. 어제는 그래도 잿빛 공기가 좀 가신듯해 스튜디오로 출근했더니 건물 앞 거리에서 빗자루질을 하는 동료가 보였다. 고작 하루이틀이었건만 까맣고 고운 잿가루가 비질 한번에 자욱하게 날렸다.
아직 불길은 진행중이지만 이미 더 탈것도 없이 재만남은 지역에서는 복구작업을 위한 답사 및 조사가 시작됐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일지는 몰라도 우리 스튜디오 역시 복구사업에 참여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무너진 도시의 일부를 다시 디자인하는 일이다. 그런 저런 소식들을 듣고 집에 돌아와 휴대폰을 들여다 보는데 2021년의 서울 공사장 사진이 아이폰 Memories로 떳다. 북촌의 종로 소방서 임시본부를 짓는 철골 프레임을 담은 사진들이었다.
건물이 실제로 어떻게 지어지는지, 구조물이 어떻게 연결되고 쌓아올려지는지가 궁금했다. 그래서 공사현장만 보이면 멈춰서서 구조물을 바라보면서 시간을 보냈었다. 일하던걸 다 내려놓고 다시 학생으로 돌아가 건축을 막 공부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멀리보고 시간을 들일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건축을 하고싶다, 디자인을 하고싶다, 하는 식의 막연하고도 막연한만큼 또 지나치게 진지한 열정으로 가득찬 시기였다. 세상의 일부를 내가 지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당장 공사 현장에 직접 들어가서 원없이 시간을 들여 관찰할 수 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몇년이 지나고 나는 원하던 목표를 이뤘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시 내 예상과는 전혀다른 방식으로 이뤄졌다. 마냥 이뤄졌다고 단정할 수만은 없는 방식으로, 마냥 이뤄졌다는 성취에 기뻐할 수만은 없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공사 현장에서는 8개월을 일했으니 그야말로 원없이 시간을 보냈고, 보고싶은 거의 모든 것들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임시 종로 소방서 청사와는 달리 목조 구조의 8세대 주택이었다. 그것도 어느 유명한 힙합 가수들의 불우한 출신지로 잘 알려진 콤튼 바로 윗동네의 현장이었다.
현실은 생각과는 전혀 다른 옷을 입고 등장한다. 마치 엄청나게 아방가르드한 패션 디자이너의 4차원 패션쇼를 보는것같은 느낌이다. 건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여느 집이나, 학교나, 미술관을 짓게 되리라, 짓게 되기를 바라왔다. 그러나 그 막연한 집이나, 학교나, 미술관은 이제 불길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재만 남은 집과 학교와 미술관의 옷을 입고 등장했다. 반겨야 할 일들이지만, 반길 수 없는 일들이다.
이제 막 일을 시작한 신출내기지만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성의껏 해보기로 한다. 작년 12월 31일, 팰리세이드 언덕에서 바라보던 그 풍경을 되찾는데 보탬이 될 수 있다면, 그저 나무들이 자라기를 손놓고 기다리는 것보다 좀더 의미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