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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소로 May 18. 2024

로스앤젤레스 공사장에서
일탈한 북극곰을 닮은 건축하기

일번. 지금 할 수 있는 건축을 하자. 이번. 어색함은 피하는게 아니라 익숙해짐으로써 극복하는 것. 


4세대를 위한 소규모 주택을 지으면서 느끼는 것들이다. 아직 돈벌이할 직업을 구하지 못한 나는 해비타트 LA의 사회적 주택건설사업에 공사팀의 일원으로 봉사 중이다. 그러니까 '나 건축합니다,' 하고 말할 수 있는 마지노선에 간당간당하게 걸쳤다고, 혹은 좀더 냉정하자면 건축은 무슨 건축이냐고 해야할 처지에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런저런 건축 이론가들과 쟁쟁한 건축가의 작품을 들어가면서 공사도 건축이라고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웬지 도망처럼 느껴지기만 한다. 건축을 하기로 한 이상 도망칠 수는 없다. 언젠가는 도망도 치겠지만 아직은 아니다. 


더군다나 그놈에 건축을 한답시고 회사를 그만두면서 목표했던 것 중, 나라는 성벽에서 허물어진 곳곳을 확인하려는 목표도 있었다. ...? 아니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해보자. 안온하게 지내느라 무뎌진 칼날을 확인하려는 목표도 있었다. ..? 아니 이건 뭐 비유가 없으면 말을 못하는 사람인건가. 직접적으로 말해보자는 것은 비유를 빼고, 수사적 표현을 빼고, 단정적으로 직설적으로 말해보자는 의미였다. 한번 더 시도해본다. 내가 얼마나 후진놈이 됐는지 냉정하게 확인해보려는 목표도 있었다. .? 조금은 나아진듯 하다. 여전히 찜찜함이 남았지만 이만하기로 한다.  


문장 고쳐쓰기는 포기해도 건축 하기로 한 마음을 벌써 포기할 수는 없다. 이러다가 저러다가 더러들은 포기하게 마련이고 나 역시 몇년 되지 않아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포기하는게 죄악은 아니지 않나. 포기는 때로 굉장한 용기를 요구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아직은 포기할 시점이 아니라는게 나의 진단이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건축의 기역자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아직 아무것도 안했다는 말이다. 어디 사자가 골골 잠들어있다면 사자의 코털이라도 한번 건드려보던가, 하다못해 사자의 숨결이라도 느껴보던가 한 뒤에 포기를 해도 해야한다. (건축 = 사자)


더군다나 나는 이제 막 주택 공사판에 뛰어들었다. 이제 겨우 한달 반인가. '건축을 한다'고 얼마간 반감이 차오르는 말들을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건축의 축에 끼지도 못하는 일이겠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이 공사판의 나사조으는 일이 곧 건축이다. 그러니까 개인적으로 왜곡해 말하자면, 해비타트 LA의 다세대 주택 공사장이 나에게는 건축의 시작점인 셈이다. 개인적으로 말하는걸 왜곡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느 누구의 관점이 개인적이지 않을 수 있는가. 모든 관점은 궁극적으로는 개인적이지 않은가. 보편적 논리를 말한다 해도 그 논리를 받아들이는 자의 수용이 있고난 뒤에야 그럴 수 있다는 점에서 역시 개인적 보편 논리가 아닐가. 


심지어 수학도 마찬가지다. 수학 역시 수학을 아는 사람에게나 보편논리지 수학적 감이 둔한 이들에게 깊은 수학적 진리의 세계는 진정한 의미에서 보편적일 수는 없다. 그들에게 수학이란 보편성을 느낄 수 없는 보편논리다. (한살 두살 - 열살 스무살 - 먹다보니 이렇게 소피스트 비슷하게 변해가는 나를 발견하게된다. 나도 소싯적엔 영원히 소크라테스처럼 살아갈 줄 알았건만..!) 그러니까 온종일 한자리에 누워있는 LA 다운타운 한복판의 노숙자에게, 상대성 이론에 따라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이란 개나줘도 무방한 다른세계 이야기다. 이 구도에서 나를 노숙자에게 투영하고, 상대성 이론을 고매한 건축으로 치환해도 이야기가 썩 잘 드러맞는다. 글을 이렇게 헐겁게 써내려가도 되나 하는 죄책감이 들지만 그래도 일단 걸음을 계속 떼어보기로 한다. 


내가 쓰던 글인데 내가 갑자기 어색함을 느끼는 이런 순간들은 비일비재하다. 살다보면 어색한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어색하면 대체로 일단 피하고 보게 마련이다. 그러나 주택 공사판에 스스로를 우겨넣으면서 배우는 것은 그 반대다. 그렇게 우겨넣어지는 나는 마치 공용 세탁기의 동전 투입구에 넣는 코인같다. 빨래를 돌리기 위해서 코인 여섯개를 넣는순간 코인은 나를 떠나버리지만, 일단 들어간 코인은 그냥 사라지는게 아니라 내 옷가지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공사장에 들어가기 전의 나와 들어간 뒤의 나는 마치 코인을 넣기 전과 후의 세탁기만큼 다른 모습이다. 


지금 나에게 건축은 온몸의 근육을 관통하는 얼얼함으로 설명될 수밖에 없는 육감적 무언가이다. 책 속에 문장으로 인쇄된 건축도 아니고,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구현하는 선과 색의 조합으로서의 건축도 아니다. 톱으로 자르고, 전동 스크루 드라이버로 조으고, 망치로 때려넣는, 사다리 위에서 아슬아슬 균형잡고, 서까래 위에 앉아 쏘아바르는 방화용 실리콘의 방아쇠다. 그런 건축은 내 손가락 마디마디를 타고들어와 팔뚝과 어깨에 진입하고 어깨와 등으로 전이돼 목덜미까지 움켜잡는 덩치큰 북극곰같은 존재다. 그 덩치를 이고지다보면 엉덩이와 허벅지가 우리하게 저려오는건 말할 필요도 없다.  


물론 건축을 하는 누구에게나 건축이 북극곰일리 없다. 건축은 지금 이곳의 나에게만 북극곰이다. 그렇다고 영화 레버넌트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등짝을 갈기갈기 찢어발겨놓는 그런 불곰까지는 아니라는 점에서 안도할만한 구석이 남았다고 할까. 그러나 조심하지 않으면 북극곰이 불곰의 뺨을 후려갈기는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일 것이다. 나에게 건축을 한다는 말은 곧 으리으리한 북극곰을 매일처럼 마주하는 일이다. 북극곰은 내 절친이 아니라서 어색하기 그지없다. 우리는 종부터 다르고, 그렇다고 그자가 내 반려견이나 반려묘도 아니고, 반려곰은 더더욱 아니니까. 


'그러나,' 어색함은 피함으로써 해결되는게 아니다. 그게 여기 공사판에서 두번째로 느낀점이다. - 교훈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내가 나에 한해서 느낄뿐 타인에게 어떤 도움이 될만한 내용인지는 알수가 없기 때문이다. 여튼 북극곰과 얼굴을 맞대는 어색함을 해결하기 위한 길은 딱 하나다. 자꾸 반복해서 얼굴을 맞대는 것. 그렇게 보면 역설적이다. 어색함이 어색함을 반복함으로써만 익숙함으로 바뀔 수 있다는게 말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면, 그 반대도 어느 정도 성립한다는걸 깨닫게 된다. 익숙한 것도 자꾸만 반복하다보면 오히려 어색한 면이 북쑥 고개를 들곤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뭘 자꾸만 깨닫기는 싫지만 몸이나 마음이 저릿저릿한 시절에는 뭘 자꾸만 깨닫게 되는걸 피할 수 없다. 


이럴 줄 알았지만 

 - 이라고 쓰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럴 줄 알았지만 이라는 말은 이제 필요가 없어졌다. 항상 두가지에 대해 쓰려다가 결국은 한가지만 쓰기에도 모자랐던 경험에 비추어, 이번에도 두번째 느낀점은 말도 못꺼내보고 글을 끝내야할 모양이라서 '이럴 줄 알았지만'이라고 메모해둔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보기좋게 내 예상이 빗나갔다. 건축을 말도 안되게 북극곰에 비유하다보니, 그러다 보니 어색함에 대한 논의까지 이 글 속에서 다루게 되고 말았다. 역시 비유가 문제다. 비유없이 직접적으로 쓰자고 그렇게 다짐했건만. 빙하를 잃은 북극곰의 복수인가. 이 글의 논점은 어디까지 일탈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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