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네 번째 페이지, 그는 또 날 설레게 했다.
그 주말, 그는 정말 우리 집에 왔다.
정장 차림에 과일바구니와 소고기,
꽃다발까지 들고.
어쩐지 그 모습이 낯설고 또 설레었다.
정장을 입은 그는 처음이었고,
그날따라 유난히 반듯하고 멋져 보였다.
“아버님, 어머님.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OOO 씨의 남자친구 OOO입니다.”
그의 또렷한 인사에 엄마가 먼저 나섰다.
“어서 와요. 오는 길 힘들진 않았어요?”
나는 그 순간, 아빠의 반응이 가장 궁금했다.
혹시라도 마음에 들지 않아 불쾌한
기색을 보이시면 어쩌나,
아니면 아무 말 없이 그냥 식사만 하실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그래, 어서 와요. 차는 많이 안 막혔나 모르겠네.”
의외였다.
아빠는 오빠를 보자마자 마음에 드신 듯한 눈치였다.
나는 마음 한구석이 놓이면서도, 뭐랄까… 멍해졌다.
그렇게 저녁 식사 자리가 시작되었고,
분위기는 생각보다 훨씬 따뜻했다.
그 모든 게 감사하고, 조금은 낯설었다.
식사를 마치고 과일을 나눠 먹던 중,
그가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어머님, 아버님. 지난 일로 심려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많이 놀라셨죠?”
아빠는 조용히 과일을 입에 넣으며 말씀하셨다.
“많이 놀라긴 했지.
그래서 더더욱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 보고 싶었어.”
그리고 이어진 그의 말.
“제가 끝까지 책임지겠습니다. 그리고…
OO 씨를 데리고 여수로 가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그 순간, 나는 멍해졌다.
여수로? 함께 살고 싶다고…?
나는 그의 말이 현실로 다가오지 않아
순간 멈춰버렸다.
나에게 미리 한 마디라도 해줬다면 덜 놀랐을 텐데.
하지만 동시에,
그 용기와 진심이 고맙고 또 고마웠다.
아빠는 조용히 그를 바라보시다,
단호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자네랑 OO, 이제 적은 나이가 아니니 신중해야 해.
그 말은… 같이 살고 싶다는 뜻인가?”
그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아버님 말씀대로,
OO 씨와 함께 살고 싶습니다.”
엄마는 걱정이 앞섰는지 조심스레 물으셨다.
“우리야 두 사람이 좋다면 말릴 이유는 없지만…
자네 부모님께도 허락을 받아야 하지 않겠어?”
맞는 말이었다.
나는 아직 그의 부모님께 인사를 드린 적이 없었다.
“그래서 먼저 OO 씨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허락해 주신다면,
다음 주에 OO 씨와 함께 저희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가고 싶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시더니,
곧 웃으시며 허락해 주셨다. 나는 믿기지 않았다.
그렇게 쉽게, 그렇게 따뜻하게 허락을 해주시다니.
그가 돌아간 후, 나는 조심스레 부모님께 물었다.
“어땠어?”
아빠는 담담히 말했다.
“착해 보이고, 책임감 있어 보여.
무엇보다 네 생각을 많이 하는 게 느껴졌어.”
엄마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이셨다.
“그 사람, 네 손 놓지 않을 것 같더라.”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왈칵 눈물이 날 뻔했다.
사실 예전엔 그러지 못했다.
전남편을 처음 인사시켰을 땐 부모님이
반대를 하셨었고, 그럼에도 결혼을 강행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번엔 달랐다.
진심으로 나를 아끼고,
나를 위해 움직여주는 사람이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도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줄 줄 몰랐다.
그날 이후, 나도 모르게 마음이 풀렸다.
이 사람이라면 다시 믿어봐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