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페이지, 나의 무게는 몇일까?
장녀의 무게는 제법 무거웠다.
가끔은 내가 감당하기 벅찰 만큼, 너무 무거웠다.
특히 우리 집 형편이 넉넉하지 못했기에
그 무게는 더 깊이 어깨를 짓눌렀다.
내가 사회생활을 막 시작했을 무렵,
원하든 원치 않든 엄마와 함께 ‘가장’이 되어야 했다.
어린 마음에 너무 버겁고, 솔직히 말하면… 싫었다.
월급날 점심시간이면 어김없이 걸려오는 엄마의 전화.
“딸, 이번 달엔 엄마 얼마 줄 거야?”
그건 용돈을 묻는 게 아니었다.
예를 들어 200만 원을 받으면
나는 50만 원 정도만 남기고
150만 원을 엄마에게 보내야 했다.
그 50만 원 안에서
핸드폰 요금, 교통비, 점심값 등을 다 해결해야 했다.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엄마도 그 말을 꺼내기가 얼마나 어려웠을까.
그래서 더 악착같이 일했다.
하지만… 허무했다.
아무리 일해도 돈은 모이지 않고
분명 친구들보다 더 많이 벌고 있는데
늘 허덕였다.
친구들 만나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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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는, 내가 기억하는 한
‘쉴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변함없이 일하고 있다.
아빠의 비위를 맞추고, 눈치를 보며
살림도 하고, 일도 하고…
그렇게 살아오셨다.
아마, 나에게 관심을 줄 틈이 없었겠지.
신경 써주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니라
그럴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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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초등학교 5학년이던 해,
처음 생리를 했다.
뭐가 뭔지 몰랐지만
학교에서 성교육을 들은 덕분에
‘피가 나는 건 생리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화장실에 있던 생리대를 꺼내 써보고,
엄마에게 무덤덤하게 말했다.
“엄마, 나 생리하나 봐.
피가 나서 화장실에 있던 생리대 했어.”
엄마는 날 한번 쳐다보지도 않고
“어, 그래?” 한마디만 남기고는
그대로 넘겼다.
놀랐다. 그리고 서운했다.
어린 마음엔 분명 놀라웠던 일이었고,
엄마가 생리대 쓰는 법이라도 알려주며
“괜찮아, 많이 놀랐지?” 따뜻하게 말해줄 줄 알았다.
근데 엄마는… 무심했다.
그날 이후 나는 혼자라는 느낌에
묘한 슬픔이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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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억은, 나에게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다.
‘나중에 내가 엄마가 된다면,
아이에게 이렇게는 하지 말아야지.’
지금의 나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그때의 엄마와는 다른 방향의 엄마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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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엄마는 내게 자주 말한다.
“그땐 미안했어. 딸아…”
지금은 내 걱정을 지나치게 하고,
내 딸에게는 넘칠 만큼 사랑을 쏟는다.
그게 내리사랑일까.
그런 엄마를 보면 안쓰럽고,
또 한편으로는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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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엄마도, 아빠도 나이가 들었다.
예전처럼 엄마를 때리는 일은 없다.
하지만 여전히 둘은 눈치를 본다.
그리고 여전히… 싸운다.
지긋지긋하다.
37년을 함께 살아왔는데
이제는 좀 평화로워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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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렸을 때
엄마가 싸움 끝에 집을 나가면,
아빠는 나를 다그쳤다.
“어디 숨겼어? 당장 데려와!”
욕을 하고, 물건을 부수고…
그 분노는 늘, 나를 향했다.
내가 엄마를 숨긴 게 아닌데
왜 나는 언제나 그 대상이 되어야 했을까.
무서웠고, 지긋지긋했고… 억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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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과연, 언제쯤 이 감정과 책임에서
진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