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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진 Jan 04. 2023

"대학 진학 첫 세대" 아이들

노동자인 부모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아이들

어렸을 때 한 가지 바람이 있었다 - 우리 아빠가 다른 아빠들처럼 그럴싸한 양복을 입고 출근했으면 좋겠다. 나는 매사 의욕이 넘치고 착실히 열심히 공부 하던 학생이었다. 그리고 노력한 만큼 성적도 좋은 편이었고 학창 시절 내내 반장, 부반장을 줄곧 해왔다. 열심히 노력해서 하나씩 하나씩 원하는 것을 이루어 나가며 성취감을 아는 이상적인 학창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아무리 내가 노력 해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건 나의 부모님이 봉제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라는 나의 배경이었다.


나는 일단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나의 환경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믿었고, 원했던 대로 괜찮은 대학에 합격해서 서울로 독립을 하게 되었다. 좋은 대학에만 가면 많은 것이 해결될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너무나 생소한 순간들이 많았다. 이제는 그런 걸 “네트워킹” 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당시는 처음 보는 사람으로 가득 찬 장소에서 사람을 사귀고 인맥을 만들고 넓혀 나가는 그 모든 과정이 너무나 낯설었다. 한 번 만나서 1~2시간 술을 마시고 나면 절친이 되어 버리는 친구들이 있었다. 지방의 평범한 동네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내가 보고 익힌 인간관계와 대학에서 관찰한 인간관계는 너무 달랐다. 그 차이가 대학 캠퍼스에서 나를 외롭게 만들었고 마치 있으면 안 되는 장소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계속 받았다.


시간이 꽤 지난 뒤에 내가 느낀 그 차이는 나의 배경 (계급)에서 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노동자인 부모님을 보고 자란 나에게 비즈니스 관계, 정치적인 관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계산적인 관계는 우리 부모님에게 없었던 것 같다. 나는 그저 진심을 다 주는 그들의 끈적끈적한 관계만 보고 자랐다. 서울 중산층 출신 아이들이 보여주는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매운 친한 척"하는 관계성은 내가 경험해 보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20살의 나는 아직 이런 감정을 글로 옮겨 적을 만큼 정확히 인지하지 못했다. 그저 외롭게 고립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런 나의 마음을 그 누구에게도 쉽게 나누지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괴로웠던 건 끊임없이 대학 동기들의 배경과 나를 비교한다는 사실이었다. 부모님의 직업, 부모님의 학력.. 나는 어느새 대학 캠퍼스에서 나의 과거나 배경은 최대한 가리고 살고 있었다. 내가 조금만 더 조건이 좋았더라면 이라는 생각을 마음속으로는 하면서 말이다. 


사춘기쯤부터 오랜 시간 내 마음을 짓누르는 못난 생각이었다. 부모님의 헌신으로 이만큼 공부하고 잘 자란 걸 뻔히 알면서 마음 한쪽으로는 그것을 부끄러워한다는 사실. 결혼하고 뉴욕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고 아이를 낳고 살면서도 마음 구석에 숨겨놓고 꺼내 보지 않았던 해결하지 못한 나의 이야기였다.





그러던 어느 날 직장동료 E가 새로운 봉사활동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뉴욕 시립대학교 (CUNY: City University of New York)의 "First-generation college student (대학 진학 첫 세대)"의 멘토가 되어 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First-generation college student?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말 그대로 직계 가족 (부모, 형제) 중에서 처음으로 대학에 진학한 학생들을 가르치는 명칭이다. 그리고 이는 나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30살이 넘어서야 이 개념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이름을 붙여주고 개념을 만드는 일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느꼈다. 명명하는 행위 하나만으로 숨기기만 했던 나의 정체성 중 한 부분이 다시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었다.


뉴욕의 CUNY 뿐만 아니라 미국의 많은 대학에서는 first-generation 학생을 오래전부터 지원하고 있었다. 대학 졸업장이 있는 부모를 둔 중산층 가정 출신의 학생들은 대학에 입학하기 전부터 부모를 통해 대학 생활에 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대학을 통해 누릴 수 있는 문화적 혜택과 기회를 들어왔기 때문에 준비가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미국이라고 다르지 않다. 여름 방학 인턴 자리를 얻기 위해 부모님을 통한 네트워킹은 미국 중산층 가정에서 아주 흔한 일이기도 하다. 이와 비교하면 first-generation 학생들의 출발 지점은 너무나 다르다. 리소스의 접근성이 상대적으로 너무 좋지 않다는 것을 사회가 인지하고 이 학생들을 위한 멘토링 프로그램을 비롯해서 더 많은 오리엔테이션을 제공한다. 나의 동료 E도 역시 first-generation 대학생이었고 그녀는 자기가 멘토를 통해서 받았던 정서적 지지와 실질적 도움을 다시 돌려주고 싶어 했다. 실제로 이 멘토링 서비스의 멘티였던 학생들이 졸업 후 멘토로 돌아오는 비율은 굉장히 높다고 했다.


나는 이 특정 그룹 학생들이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커뮤니티와 대학의 공식적인 서포트 이야기를 들으면서 머릿속에서 띵한 소리가 날 정도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남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생기는 분노와 고민을 개인의 문제 혹은 본 부모의 무능력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신과 같은 상황에 처한 친구들과 연대를 이루고 더 큰 사회적 시스템 안에서 자신들의 문제를 설명하고 이해하려 했다. 그리고 출발선이 아예 달랐던 자신들에게 더 많은 서포트가 필요하다고 하나의 목소리 만들어 사회에 요구했다.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외로웠던 대학 시절의 내가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내가 이 그룹에 관심을 보이자 E는 우리 오피스에 first-generation college student 출신의 인턴과 직원들의 소모임이 있다고 알려줬다. 아직 대학에 재학 중인 인턴부터 시니어 레벨에 있는 매니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동료가 있었고, 내가 사는 곳이 뉴욕임을 증명하듯이 대부분 이민자 가정에서 자란 친구들이었다. 아이티, 인도, 자메이카, 벨라루스.. 그 들의 부모는 다양한 곳에서 뉴욕으로 이민을 와서 이 아이들을 키워냈다. 그들의 모임은 그야말로 축하, 성취감, 자랑스러움을 가득 차 있었다. 특히, 아직 대학에 재학 중인 인턴 아이들은 본인 스스로를 product of my parents’ labor라고 표현했고 자신의 환경이 자기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얼마큼 크게 영향을 키 쳤으며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을 결정할 때도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에게 부모님의 노동은 고생스러웠지만 그 어디에 내어놓아도 당당하고 떳떳한 자랑이었다. 그리고 인턴 친구들은 말했다. 이런 모임이 없었더라면, 자기도 이렇게 생각하지 못했을 거라고.


나는 너무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난 왜 우리 부모님의 고생스럽지만, 떳떳했던 노동을 부끄러워했던 것인가. 모임 후, 동료 E가 나에게 말했다. “수진, 너 정말 멋있고 잘하고 있어. 아는 사람 한 명도 없는 이 터프한 뉴욕에 와서도 이만큼 다 이루었잖아. 너의 부모님을 만나보지 못했지만, 너만큼 멋있는 분들일 거 생각해. 우린 항상 이렇게 하나씩 우리가 이루어왔잖아. 아무것도 없이 시작했던 우리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이 모임의 친구들은 내가 오랜 시간 숨기고 있었던 내 마음을 즐거움과 웃음으로 위로해 줬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니 노동자인 부모님을 부끄러워했던 나의 마음을 온전히 내 개인의 잘못 혹은 개인의 어리석음 때문이라고 결론 내고 싶지 않았다. 물론 나의 어리석음은 인정하고 반성한다. 하지만 노동자인 부모님을 부끄러워하는 아이들이 나 하나가 아니라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면, 이건 개인의 어리석음을 넘어서는 문제이다. 한 사회가 노동자를 어떻게 인식하고 대접하는지를 살펴봐야 하고 출발선이 다른 아이들과 청소년들에게 성공하고 싶으면 네가 알아서 죽도록 노력라고 말하는 사회는 과연 옳은 사회인가를 질문해야 한다. 이런 사회에서 우린 어떻게 내 환경과 부모의 노동을 자랑스러워 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뉴욕의 이 작은 모임에서 만난 이민자 가정 출신의 친구들을 통해 개인적인 위로를 받았고, 사회적인 해결 방안의 시작도 보았다. 이 친구들도 나와 똑같이 불평등에 대한 분노가 있었고 자신의 배경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었다. 하지만 그 문제를 자기 개인의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신과 같은 상황에 처한 친구들과 연대를 이루고 더 큰 사회적 시스템 안에서 자신들의 문제를 설명하고 이해하려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개인의 불리했던 배경을 부끄러움으로 받아들이지 않게 그것을 딛고 만들어낸 성취를 더 자랑스러운 결과물로 축하해주는 사회적인 지지와 문화였다. 나도 이 만남을 통해 나의 어리석은 마음으로부터 한 뼘 빠져나올 수 있었다. 평생을 노동했던 부모님들의 삶은 떳떳하고 존중받아야 한다. 비로소 온전히 조금 더 나 자신으로 당당하게 살 수 있게 되었다. 뉴욕이 나에게 준 큰 선물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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