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를 유지하는 3가지 방식 - 블러드, 호르몬 그리고 애씀
아무래도 안되겠어.
친구로 지내자
예비 시댁이라 생각하고 집안의 김장과 제사까지 조율하던 우리의 관계는 내가 생각지도 못한 전개로 끝을 맞이했다. 내가 소중하지만 더 이상 이성으로서 성욕이 들지 않아 사랑의 감정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거부터 자신은 연인에게서 성욕이 0으로 수렴하는 순간이 오고 그게 다른 이성에 대한 충동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게 본인이 관계를 끝내야 할 때라는 신호라는 것. 그 어떤 노력을 해봤지만 어차피 안될 것을 알기에 나에게 그냥 이별을 고한다고.
나의 연애 역사를 들춰보면 오히려 반대의 상황이 더 많았던지라 당황스럽기그지 없었다. 침대에서는 누구나 칭찬 인플레이션이 있기 마련이겠지만, 육체적 교감을 즐기기에 신체적으로 최적화되어 있고, 또 관계에 여러 모션에 적극인 사람인데, 나한테 성욕이 1년도 안되서 식었다고? 자존심이 팍 상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나의 선천적 타고남+후천적 노력이면 권태기 쯤은 충분히 극복될 거라는 호기로움도 있었다.
나는 오히려 그를 불쌍한 영혼으로 여기며 구원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머리부터 발끝 그리고 속살까지 몇백만원을 몇주안에 카드를 긁기 시작했다. 이것이 이별 방어를 위한 30대 여자의 처절한 몸무림이다. 잘 입지도 않은 짧은 치마를 꺼내입고, 무려 유행하는 로제 머리를 시도하며, 거울 앞에서 사춘기 소녀처럼 이리저리 신경쓰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부터 그도 거울 앞에서 사춘기 소년같이 외모에 신경 쓴다고 잔소리를 했었는데, 그건 이미 다른 사람을 향한 마음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너에게~ 사뿐사뿐~ 걸어가~ 어느 토요일 밤 멋진 데이트를 즐기고 온 날이었다. 지인의 생일 파티에서 잔뜩 커플행세를 하며 우리의 관계를 공고히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예쁜 하얀 집을 지나갈 때 "나중에 우리 이런 집 짓고 살자"라는 그가 건넨 한마디 말에 나는 마침내 우리의 권태기가 끝났노라니 안도했다. 그리고 그날 밤 집에 돌아와 우리가 늘 그러하듯 함께 밥을 알뜰하게 차려 먹었다. 한편 평소답지 않게 너는 갑자기 편지를 썼다며 보여주기 위해 모니터를 함께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밤 12시 깨톡 소리와 여자 이름과 함께 뜬 메시지 내용.
네에ㅎ
평소에 다른 여자에게 오만할 정도로 철벽이었던 자세를 취했기에 여자 문제에 대해 걱정을 해본적이 없었었다. 적어도 내 앞에서의 태도로는 말이다.
나: 누구야?
X: 인턴. 몇번 말했잖아. 원오원하면서 상담을 많이해서.
나: 그런데 이 주말 밤 12시에 왜 연락이야? 그리고 너네 슬랙 쓰는데 왜 카톡해?
여자의 촉은 무섭게 반응했다. "넵" "네" "알겠습니다" 이런 많은 표현을 두고 "네" + "에" + "ㅎ" 어딘가 귀엽고 애교스럽고 친밀한 이 반응은 무엇이란 말인가? 너의 프로필 사진에 여자친구인 내가 걸려있음에도 불구하고, 토요일 밤 12시에 회사 직속 부하 직원과 이토록 친밀할 수 있는 관계란 무엇이란 말인가?
X: ...
나: 나는 솔직함보다 지키려는 마음이 더 중요해. 내가 모르게 지나가줬으면 좋겠어.
X: 솔직히 흔들렸어. 선을 넘은 건 아니야.
나: 그런 거라면 내가 모르게 해달라고 했잖아.
잠시 빡침의 삑처리
하필 비슷한 사람도 아니고 나랑 정반대의 사람에게? 마치 연상녀에 질려버려 어린 여자를 찾는 사람처럼? 결국 회사에서 너가 고용까지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그리고 나한테 쌩초보 쥬니어 vs 3년차 채용 관련해서 인사 전략에 대해 상담하던 그 인턴? 누군가를 고용하고 책임지기 시작하는게 힘들어서 나에게 상담까지 하더니, 결국 그렇게 애틋하고 특별한 마음이 있던거라고?
그로 인한 웃픈 몸부림은 나중에 스탠드업 코미디로 풀어보고자 한다. 오늘 여기는 네이트판이 아니라, 진지한 글이 올라오는 브런치니까 조금 진지하게 고찰해봤다. 도파민은 여기까지 끌어올리고 이제 닉값을 살려 살짝 철학하는 강아지 모먼트로 돌아가보고자 한다.
1. [가족] 관계는 피로 맺어진 끈이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그 고리는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유지된다. 태어난 순간부터 주어진 조건이기 때문이다.
2. [연인] 관계는 강렬한 호르몬의 장난이다. 그 불꽃은 뜨겁고 찬란해서 하늘의 별이라도 따줄 것 같이 불가능한 일도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그 호르몬도 언젠가는 사그라들기 마련이다.
3. [친구] 관계는 피도, 호르몬도 작용하지 않는다. 오직 ‘애씀’으로만 유지되는 관계다. 애씀으로 노력하지 않는다면 서서히 사라질 수밖에 없다. 아무 생물학적 버프를 안받는 관계가 바로 친구 관계다.
Special Thanks:
친구 관계는 블러드, 호르몬도 아닌 '애씀'으로만 이뤄진다는 이 통찰은 만담꾼 '름름'에게서 받았다.
호르몬의 작용이 사라진 오래된 연인도 종국에는 ‘애씀’으로 관계를 이어가야 한다. 하지만 모든 연인이 그런 선택을 하지는 않는다. 불꽃이 꺼진 자리에 남는 것은 두 사람의 선택이다. 그 순간을 지나고도 함께할 것인가, 아니면 자연스레 돌아설 것인가. 호르몬이 꺼진 그 사이를 애씀으로 채우다가 결국 피로 이어지는 관계를 채우는게 바로 가족이 아닌가 싶었다. 혹은 지금보면 호르몬이 훅 들어왔을 때 땡겨버리는 것도 가족의 확도를 높이는 일일테다;; 정우성은 여러모로 우리에게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보여주고 있다.
거의 바람을 피운 전남자친구를 두고 "무슨 동물의 왕국이냐. 인간이 어떻게 그러냐"고 주변인들이 나보다도 그를 더 찰지게 욕해준다. 하지만 인간은 정서적 유대라는 '인지층'을 만들어냈지만, 결국 DNA에 새겨진 '자연층'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가 쌓아올린 모든 관계의 성은 결국 생물학적 본능이라는 파도 앞에서 무너지고 만다. 가족이라는 피의 끈이 다른 모든 관계를 압도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호르몬 앞에서 굴복하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기도 하다.
“호르몬이 타오르는 그 유한한 시간 동안 노력하고, 그 작용이 끝난 뒤 돌아서는 것이 과연 잘못된 일인가?” 그 한정된 시간 속에서 모든 열정을 다했고, 이제는 각자의 방향을 향해 가는 것이다. 정우성에게 돌을 던지지만, 적지 않은 남성들이 여건이 되면 또 이루고 싶은 판타지이기도 하지 않은가? 나는 그렇게 "권태롭다"고 떠나간 그 친구의 멘탈 모델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타오르던 시간이 끝났음을 선언했고, 그 선택이 그가 가장 진실할 수 있었던 방식이었다. 물론 그렇게 마음이 식어가는 줄도 모른채로, [애씀의 친구] 구간과 [피의 가족] 구간으로 넘어가는 줄로만 믿고 있다가, 교통사고 당하듯 이별을 당하는 건 인간사에 피할 수 없는 비극인가 보다.
35세에 맞은 이별. 지난 1년 결혼할 줄 알았던 사람과 2번의 이별을 맞이한 나의 상실감의 크기는 단순 이별의 크기보다 크다. 사실 내 마음 보다 자궁이 아파하고 있는지 모른다. 서른다섯, 내 자궁은 시계처럼 똑딱거리며 시간의 흐름을 재촉했다. 그래서 나는 '피'가 아닌 '애씀'으로 이어진 가족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혈육으로 이어진 뱃속에서 자라날 아이 대신, 이미 이 세상에 와있지만 가족을 기다리는 아이들을 위한 보육원을 만든다면 그것 또한 가족 아니지 않은가? 어쩌면 그것이 나의 새로운 운명일지도 모른다. 친구가 보낸 캘린더 초대에는 10년 후 우리의 약속이 적혀있다. '보육원 프로젝트 킥오프'.
Special Thanks:
나에게 가족의 소중함과 새로운 가족의 형태로서 보육원이라는 비전을 제시해준 죠니에게 고마워.
결국 나와 권태로워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고 싶다는 X와는 친구로 남기로 했다. 우리는 그동안 맞춰온 꿈과 비전에 대해서 만큼은 여전히 IT 업계에서 동료의 관계로 남기로 했다. 이것도 호르몬이 끝난 우리는 다른 종류의 애씀의 단계로 넘어간 셈이다. 가족을 전제로 하지 않은 애씀의 관계.
홀로 남겨져 불안해 하는 나에게 너는 항상 인생은 어차피 혼자라고 말해왔다. 하지만 나는 너에게 세상과 연결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말라고 항상 말했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너를 위해 애쓰고 있다. 내가 너에게 느끼는 배신감, 상실감, 좌절감을 무릅쓰고 지금 너에게 친구로 남기 위해서 애쓰고 있듯이 말이다.
지난 연애에서 '귀여움'에 대한 감정을 고찰하면서 사랑스럽고 귀여운 글만 올리고자 철학하는 강아지, 줄여서 '철강'으로 필명을 개명했는데, 몇 개월만에 나는 다시 이 우주에 다시 홀로남은 불완전한 원소가 되었다.
https://brunch.co.kr/@sujin-keen/69
결국 이 브런치가 꾸준히 연재되기 위해서 나는 꾸준한 이별이 필요한가 보다 하핫. 하지만 이번 이별은 그래도 조금은 더 세상을 귀엽게 바라보게 된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