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도 없어라, 발레 장비병

발라레 인생(42) 104번째 브런치 by Sujiney

by Sujiney

2043년 9월 27일. 발레 학원의 햇살 가득한 창 밖에 에펠탑이 보인다. 파리의 발레 친구들은 도도한 듯 하지만 알고 보면 따듯하다. 나의 레페토 레오타드를 보고 카를라와 샤를르가 "잘 어울린다"며 윙크를 해준다. 22년 전, 발레 광복을 맞으며 구매한 레오타드. 아끼느라 조물조물 손빨래해왔지만, 시간은 힘이 세다. 레이스 부분은 느슨해지고 원단의 텐션도 떨어졌다. 아무렴 어때. 쭉 애지중지할 보물이다. 레페토는 프랑스의 브랜드이니, 파리 발레학원에 입기에도 제격 아닌가. 오늘의 내 은발이 순백이 될 때까지 아껴 입을 테다.

2044년 4월 29일. 일본 교토 발레학원의 엄격하면서도 열정적인 분위기는 역시, 좋다. 우물쭈물 처음 이곳의 문을 열고 들어왔던 2023년 4월이 떠올라 픽 웃음이 난다. 그땐 "클래스에 민폐가 되면 안 돼"라는 굳은 각오로 레벨을 낮춰 기초반을 듣고, 블랙 캐미솔 레오타드에 베이지 스커트를 매치했더랬지. "튀고 싶지 않고, 주목받고 싶지 않아요"라고 온몸으로 외치는 착장이다. 지금은 다르다. 아리스짱과 교코짱이 붙여준 내 별명은 '델라로 인간.' 델라로는 패션의 중심지,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탄생한 레오타드 브랜드다. 델라로만의 화려한 시그니처 패턴 레이스와 컬러 매치를 이젠 일본에서도 즐겨 입는다. 그만큼 일본취미발레 커뮤니티에 녹아들었다는 의미다.

2046년 11월 22일. 미국 뉴욕의 유명한 댄스 스튜디오엔 쥐스따꼬르 스완 레오타드를... 흠흠, 일단 여기까지만.
맞다. 뻥이다. 그런데, 거짓말은 아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 일어나게 할 일들을 상상해 적어봤다. 내가 현실로 만들어갈 행복한 꿈의 조각들인 셈.


지난해 10월 프랑스 파리 출장 중 만난, 꼬마숙녀 발레리나 조각상. 근미래, 클래스 끝나면 이 카페에서 커피 마셔야지♡ By



미래를 예측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해도,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 한, 확실한 두 가지.

1. 발레를 계속 배운다.
2. 예쁜 발레복을 입는다.

1과 2의 인과관계 및 선후관계는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고 싶다. 성인이 되어 취미로 발레를 배운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신의 부족함과 마주하는 일이다. 그렇다고 다섯 살 때부터 했다고 쉬웠을 리는 만무하다. 발레라는 얄밉고도 잔인한 아름다움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고난을 선사하니까. 그 가시밭길을 걸어가려면 제각각 나름의 몸과 맘을 보호할 장비가 필요하다. 이렇게 합리화하는 나의 발레 장비병.




고백하건대, 내 레오타드는 30벌에 육박한다. 더 많을 수도 있다는 건 비밀. 앞서 언급한 델라로부터 쥐스따꼬르(aka 저스트어콥스)와 레페토는 물론, 메이드 인 코리아 브랜드 바이플리에(byplie)와 발레계 커스텀의 개미지옥 유미코까지-. 발레 옷장만 봐선 파리 오페라 발레단의 수석무용수보다 더 화려하지 않을까.

이렇게 말하는 나도, 한때는 예쁜 레오타드를 사는 걸 죄악시했다. 지금 발레 선생님들과 발(레)메(이트)들은 믿지 않겠지만, 진짜다. 발레 흉내만 냈던 첫 학원에선, 그 학원에서만 옷을 살 수 있었는데, 흰색 면 스판 레오타드가 권장됐고, 검은색 및 레이스는 금단의 열매였다. "멋 부리는 발레는 절대 안 된다"는 원칙 때문이었는데, 그래서인지 배웠던 가장 어려운 테크닉이, 기초 중의 기초인 부레부레와 시손느였다. "다른 학원에 가면 몸이 다 틀어진다"거나 "영상을 찾아보면 이상한 습관이 든다"는 말도 굳게 믿었다. 지금은 알지만 그때는 몰랐다. 사기 수준 가스라이팅이었다는 걸.

용기를 내어 그 학원을 나오기까지 곡절은 많았다.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되는 에피소드는 차고 넘치지만, 오히려 잘 됐다. 신세계가 있었다. 내가 있던 곳이 온 우주인 줄 알았건만, 작디작은 갈라파고스였던 것. 전 지구의 취미 발레인들이, 진정한 의미의 발레를 제대로 배우고 있었다. 아시아부터 아프리카까지 동일한 바워크와 센터워크 구성 원칙은 예전에도 썼지만 발레만의 링구아 프랑카다.

무심히 펼친 잡지 뉴요커에서 마주친 발레 사진♡ by Sujiney


예전엔 서울의 그 학원을 떠나면 발레를 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 한국을 떠나 사는 건 생각도 못했다. 바보였다. 발레 광복 후, 나는 프랑스 파리와 미국 워싱턴 DC, 일본 도쿄와 교토에서 발레 클래스를 들었다. 플리에로 시작해 그랑주떼로 끝나는 것은 만국 공통. 과거의 나에게 정신 차리라고 말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그래도 이젠 발레 학원만 있다면 어디든 즐거운 마음으로 가서 충실하게 일하거나 즐긴다. 이게 바로 발레 해방, 발레 독립 만세다.

그래도 과거의 악몽에 얽매여 있기엔 새로 만난 세계의 현재가 눈이 부시다. 발레 광복을 맞이하며 옛 레오타드들은 기념으로 소량만 남기고 다 처분했다. 취미발레인들의 중고 판매 사이트에 무료 나눔 글을 올려도 원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종량제 봉투에 넣어 일반쓰레기로 버렸다. 발레 시즌1도 함께, 굿바이.


올해 3월, 교토. 교토 차코트에서 구매한 '발레어 사전'. 10년 안에 교토 프로젝트 실현하자♡ by Sujiney


발레의 신세계는 곧 발레 장비의 신세계를 의미했다. 취미발레인이 모인 커뮤니티, 일명 '레사(레오타드를 입는 사람들)'엔 다양한 이유로 레오타드 및 각종 발레 장비를 중고 거래하는 사람들이 넘쳤다. 할렐루야. 나는 이곳에서 유미코를, 델라로를, 쥐스따를 영접했다. 믿을 수 있는 바운더리가 지켜지는 커뮤니티인 터라, 질도 가격도 믿을 수 있었다. 거의 중독 수준으로 사들였던 시기를 지나, 이젠 내 취향과 체형에 맞는 브랜드와 모델, 색상 등에 정착했다. 팔 건 팔고, 이젠 구매욕도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2024년 새로 마련할 꿈의 집엔 발레 방도 따로 설계 예정이다.

중고로 구매한다고 해도, 사실 위의 브랜드 레오타드들은 결코 저렴하지 않다. 삼성전자 일반주를 때론 2023년 9월 1일 기준 대개 2~3주, 때론 4~5주를 거뜬히 살 수 있는 가격도 있다. 애지중지 손빨래는 건 당연지사. 나도 몰랐다. 문명의 이기, 세탁기와 건조기를 멀리하고 매일 밤 손빨래를 하리라고는. 행여 델라로의 메쉬 레이스 올이 나갈까, 유미코 화이트 트림에 물이 들진 않을까, 말디레의 세상 약한 레이스에 구멍이 나진 않을까 조심조심 조물조물.

뭘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물으신다면, 이유는 여러 가지. 일단 예쁘다. 그런데, 예쁜 게 전부는 아니다. 모든 것엔 존재의 이유가 있고, 레오타드에도 그러하다. 레오타드의 기본 원칙 중 하나는 몸선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파리오페라발레단 도로테 질베르의 이 사진 보고 샀음을 고백한다, 쥐스따 스완. 출처 Dorothee Gilbert Instagram


프로 무용수들의 경우엔 안무가와 클래스 선생님, 그리고 파드되 등의 파트너에게 몸선을 보여주고 합을 맞추는 것이 중요할 터. 일반 성인 취미발레의 경우에도 몸선은 중요하다. 내가 가장 듣고 싶은 말은 발레 선생님들의 "그렇죠!" "굿!"인데, 아무래도 레오타드를 제대로 입고하면 선생님들의 코멘트와 핸즈온(이라고 부르는 직접 교정해 주시는 티칭)을 받기 쉽다. 물론, 선생님들은 머리 뒤에도 눈이 있다. 아무리 몸을 티셔츠와 헐렁한 바지로 칭칭 감고 있어도, 선생님 눈엔 다 보인다. 바뜨망을 찰 때 무릎이 굽어 있는지, 그랑플리에를 내려갈 때 골반 정렬이 제대로 맞는지 등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미솔 레오타드를 입고 있으면 선생님의 눈이 조금이라도 덜 피로하지 않을까. 날씬해서, 몸매에 자신이 있어서 레오타드를 입는 게 아니다. 레오타드를 갖춰 입는 것은 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극강의 정직함이자, 발레를 대하는 태도와도 연관되어 있다. (자꾸만 장비병 변명처럼 들리는 건 기분 탓이다!)

이렇게 쓰는 나도, 사실 로망 중 하나는 지금 입는 쥐스따와 델라로 등등을 거의 해질 때까지, 호호백발 할머니가 되어서도 입는 거다. 물론 그때도 레오타드는 사겠지만. 프로 무용수들이 가끔 올리는 사진을 보면, 하도 많이 입어서 구멍이 뽕뽕 뚫린 워머와 타이즈가 등장하곤 한다. 완전 멋지다.


요런 사진. 완전 로망♡ 사진 저작권 Harvey Edwards



아직은 그래도, 새것 같은 레오타드만 입기에도 시간이 모자란다. 가끔은 생각한다. 레오타드처럼 살 수만 있으면, 발레 테크닉도 사서 내게 장착시키고 싶다고. 솔직히 발레 학원 거울 속 나를 보면 현타의 연속이다. 옷만 프로이고 동작 수행은 그렇지 못하니까. 레오타드에게 미안할 정도. 내가 아니라 국립발레단이나 유니버설발레단 무용수에게 갔어야 하는데, 네가 괜히 고생이다, 싶다.

그러면서 일순 침울해진다. 동작이 안 되는데 옷만 화려하면 뭐 하나. 그런 생각을 읽으신 본진 선생님은 등을 두드려 주시면서 말씀하셨다. "후줄근한 옷을 입고 버벅대는 것보단, 예쁘게 입고 버벅대는 게 낫지. 계속하다 보면 잘 될 거야!"

그래. 지금 예쁜 옷에 구멍이 뽕뽕 뚫리고 올이 나갈 정도로 꾸준히 즐겁게 건강히 계속해나가자. 취미발레인들, 적어도 나는, 점프는커녕 플리에조차 내 맘에 들게 완벽하게 할 수 없다. 그나마 발레 클래스에서 내 맘에 들게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한 가지는, 착장.

발레에 통달한다거나, 발레를 정복한다는 식의 망상은 하지 않는다. 과거를 후회하는 것도, 이젠 그만. 나의 과거는 내가 제어할 수 없지만 나의 미래는 내가 조율해갈 수 있다. 즐거운 데 예쁜 옷까지 입다니 일석이조. 더 이상은 살 게 없을 정도로 많이 사기도 했고.

앗 잠시만. 유미코 신상 컬러 메쉬 출시 알람이 떴다. 안 볼 순 없지. 보기만 하고 사지는 않을 거다. 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않을 거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단 장바구니에 담아만 놓을까...혹시 아나. 이 레오타드를 입으면 점프가 더 가볍게 뛰어질지. 옷이 날개라고 했다.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다.

세상은 넓고 예쁜 레오타드는 많다. "내일 뭐 먹지?"처럼 중차대한 질문은 "내일 레오타드 뭐 입지?"

2046년에도 파리와 교토를 누빌 취발러인 나 자신, 그리고 이 글을 읽어주시는 당신도, 힘내자.

By Sujin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