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렴 그렇지. 너무 무탈하다 싶었다. 예상치 못한 때 운명이란 녀석이 뒤통수를 쳐주는 게 내 인생이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가 ‘노르웨이의 숲’에서 썼듯, 사람이란 가장 행복한 순간에도 이 행복이 달아날까 불안해서, 결국은 불행한 존재이거늘.
행복까지는 언감생심, 하루하루 무탈함에 감사했건만, 역시나 뒤통수를 맞았다. 코로나19 확진.
대한민국 인구 셋 중 하나가 양성 판정을 받는다고 해도 나는 괜찮겠지라며 내심 우쭐했던 자신이 부끄럽다.
허기 달래러 들어간 식당에서 깜놀@_@ 맥주는 웰컴, 바이러스는 노노! by SJ
무섭지 않았다는 건 아니다. 대범함의 철갑을 두른 듯 보이지만 사실 내가 세상 허당 쫄보인 사실은 절친들은 이미 다 안다. 친한 선배가 코로나19로 유명을 달리하는 불행을 겪은 뒤에는 - 혼자 살아보겠다며– 3차 백신까지 맞았다. 온갖 유난을 떨며 KF99 마스크를 끼고 발레 클래스를 들었고, 버스 탑승 중엔 웬만해선 손잡이도 - 혹여 균이 묻어 있을까 봐 – 될 수 있는 한 잡지 않았다. 발레 2번 포지션으로 무게 중심을 바꿔가며 버텼다.
업의 특성상 확진자와 밀접 접촉도 수 차례, but 모두 한 줄, 음성으로 끝났던 터. 엔데믹이 가까워졌다는 얘기에 프랑스행 비행기표까지 검색하던 차였다.
지루하실 즈음 봄사진 투척. 동네 뒷산이올시다. by SJ
기대하고 기대하던 ‘백조의 호수’ 오데뜨 솔로를 배우기로 한 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모두의 안전을 위해 PCR 검사를 받으러 간 병원에서도 나는 “여기에 와서 더 걸리게 생겼네”라고 온갖 거만을 떨고 있었다. 1시간 가까이 기다린 후 검사를 받을 때도 의사 선생님에게 “고생 많으시네요”라며 짐짓 품위 있는 모습을 시전.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나에게 꿀밤이라도 한 대 때려주고 싶다.
이어졌던, 청천벽력 같은 선고.
“양성입니다!”
OMG.
2020년 코로나19가 전 세계의 뺨을 때렸을 때, 구글에서 핫했던 아래 사진. “2020년의 가장 좋지 않은(negative) 단어는 양성(positive)이다.” 이런 류의 말장난을 미친 듯 좋아해서 저장해 뒀건만. 남 얘기 아닌 내 얘기가 될 줄이야. 그것도 엔데믹을 거론하는 이 시점에ㅠ
어쩌랴. 엎질러진 물.
판정 후, 진단서를 받고 처방 약을 받는 과정 등, 갑자기 사람들이 나를 170.7cm 크기의 코로나 세균으로 대하는 데 – 뭐 과히 틀린 말은 아니다 – 뭔가 좀 많이 억울하면서도, 이상도 하지. 올 게 왔구나 라는 마음에 왠지 차분해졌다.
격리 사나흘째까진 목에서 시작해 전신 근육이 콕콕 쑤셨다. 더운데 추웠다. 잠이 쏟아지는 데 금방 깼다. 토막 잠. 잠마다 꿈의 형질과 밀도, 장르가 달랐다. 예전 학원 관련 악몽도 몇 번(그랑플리에를 했다가, ‘일반인 주제에 무슨 그랑 플리에!’라고 혼나는ㅠ). 하지만 모든 꿈이 호러물은 아니었으니.
좋은 꿈 둘.
1. 그랑주떼 클리어 후, 본진 발레조아 김현우 원장님의 “옳지!”를 들었다.
2. 요즘 가장 큰 고민 중 하나인 축 다리를 제대로 세운 후, 호아나 선생님께서 “굿!”이라고 해주셨다.
But 모두, 꿈.
일장춘몽.
아직 이 꿈s의 장르=판타지.
ㅠㅠ
슨생님 뵙고 싶어요 엉엉ㅠ 하늘로 솟은 저 어깨를 어찌할까요ㅠ
근데, 이런 꿈도.
격리 닷새째. 간밤 꿈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나와 신세타령을 했다. 나는 꿈속에서도 이게 웬 특종 횡재냐~ 며 바보같이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사람이 괴롭다는 얘기를 들으며 즐거울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음이, 새삼스럽다.
그러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격리도 끝.
그사이 발레를 놓지는 못했다. 서대문구 대표 발치광이 중 하나인 나. 매일 루틴을 정해 1시간 30분씩 홈 발레. 발레조아 클래스를 (김현우 원장님의 허락과, 발레메이트들의 너그러운 양해로) 찍어둔 영상을 틀어놓고 바워크. 아무리 발치광이라지만 좁아터진 독거 생활에 발레 바(barre)는 언감생심. 개수대를 잡았다. 바트망을 차다가 쓰레기통까지 찰 뻔, 여러 번.
이상하지. 처음엔 혼자 하는 발레가 세상 어색하다가, 점차 나르시시즘이 찾아왔다.
오, 오늘은 왠지 축 다리가 잘 세워지는데? 오늘 4번 그랑 플리에 중심 잘 잡은 거 같은데? 오늘의 쁘띠 바뜨망 속도와 정확도 꽤 나쁘지 않은 거 같은데?
전부,
나만의 환상이었다.
홈발레도 장비빨이지요. 실력이 없지 장비가 없남! by SJ
격리 말기, 몇 차례의 자가 키트 검사에서 앗싸 음성이 나왔지만, 격리 해제 뒤 내과에 가서 정식 PCR 검사를 했다. 이토록 반가운 한 줄. 바로 호아나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작품반 클래스를 들으러 갔다.
혹시나 했으나 역시나.
축 다리 밸런스부터 4번 그랑 플리에, 쁘띠 바뜨망까지, 잘 된다는 건 나만의 착각이었으니. 코로나 후유증일 수도 있겠지만, 숨이 더 가빴고, 근육이 빠져나간 자리가 안 봐도 느껴졌다. 100분 가까이 클래스를 한 뒤, 거울을 보니 마스크 위 내 얼굴이 완전 흙빛.
역시, 발레는 나처럼 여전히 갈 길이 먼 발치광이에겐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지금도 엉덩이와 허벅지, 발등과 발목에 등, 어깨, 팔, 뭐 거의 전신이 쑤신다.
뜬금포지만...넘 좋아하는 책 커버. 그랑주떼도 가능하겠지!
클래스를 굶으면 바로 태가 난다. 조지 발란신이 남겼다고 회자되는 말이라고 (발란신의 전기에서) 읽은 적이 있지만, 클래스를 하루 쉬면 내가 알고, 이틀 쉬면 선생님이 아시고 사흘 쉬면 관객이 안다고 하지 않나.
전신 거울과 바(barre), 댄스 플로어, 그리고 무엇보다 선생님의 지도가 없이 혼자 하는 발레는 착각만을 키워줬을 뿐.
맘과 달리, 몸은 정직하다.
발레 클래스를 못 들은 지 나흘째 오른 체중계. 왠지 식욕도 없어 체중이 1kg 빠졌지만 지방이 아닌 근 손실이었다. 그간 나를 단련시켜주셨던 발레조아 김현우 원장님과 오연주 선생님, 장호정 선생님, 호아나발레 박현경 선생님, 비너스발레 엄규성 원장님, BB발레 강다영 선생님의 노고가 새삼스럽다.
90~100분 수업 내내
"힘들어요? 정상입니다!"
"팔꿈치도 턴아웃!"
"어깨 내리시고!"
"무릎을 먼저 들어야죠!"
"시선 잊지 마세요!"
"등, 등, 등을 잡으세요!"
"스트레치는 맥시멈으로!"
등등을
끝없이 말씀해주시고,
이 시국에 마스크도 답답하실 텐데 핸즈온까지.
선생님들, 진심 존경합니다.
침울해한다고 해서 집 나간 내전근이 컴백홈하는 것도 아니다. 부상으로 1년 쉬고 겨우 복귀한 강수진도 못 되고. 징징거림은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