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추석 연휴. 가족보다 더 많이 자주 본 이들이 있으니, 친애하는 '발메'님들이다. 발레 메이트(ballet+classmate), 즉 함께 발레 클래스를 듣는 동료다. 혹자는 콩글리시라 빨간펜을 들겠지만, 뭐 어때. '발메'라는 말은 우리 사이에선 아름다운 표준어다.
명절은 '이산 발메 상봉'의 시간이기도 하다. 사는 게 바빠서, 동선이 달라져서 등 여러 이유로 못 만났던 발메들과도 우연히 만날 수 있다. 어찌 아니 기쁘리오.
추석 연휴, 많은 학원들이 당연히 방학을 하지만, 발(레미)치광이가 클래스를 거를 순 없는 노릇. 취미발레인, 일명 '취발러'들은 그래서 연휴 전부터 바쁘다. 문 여는 학원들을 수소문하고 각자의 명절 스케줄에 맞추어 '원정 발레 시간표'를 짜기 때문. 그러다 보니 일명 '발세권', 즉 발레학원들이 많은 발레 역세권 몇몇 학원들에 자연스레 모이고, 마주치게 된다.
그래서, 만났다. 본진의 DN님 CW님 DW님 등 발메님들은 물론, 그간 못 만났던 이산 발메들도. 학원 스케줄과 업무 일정이 맞지 않아 아쉽게 못 뵈었던 HJ님, 1년 가까이 일요일마다 만났던 '순서 요정' JW님 등. 원정학원에서 우연히 만나니 어찌나 더 반갑던지. 발레의 기본 스텝 '파 드 부레'의 'ㅍ'도 몰랐던 시절의 나를 기억하고, 서로의 성장을 응원해 주는 소중한 친구들이다. 다들 가족과의 시간을 쪼개어 어떻게든 1일 1발레를 하겠다고 찾아와 서로를 발견한 우리들만의 끈끈한 정이 있다. 가족들은 이럴 거다. 대체 그 발레란 게 뭐길래.
발레가 뭐긴. 하다 보면 힘들어 죽겠는데, 하고 나면 살 것 같은 것. 열심히 한다고 바로 잘하게 되지도 않지만 계속 도전해보고 싶은 것. 얄밉지만 아름다운 존재. 그게 취미발레다.
발레를 하고 읽고 쓴, 보람찬 연휴. By Sujiney
연휴 사흘차인 오늘도 클래스 두 개를 들었다고 자랑하고 싶어 근질근질하지만, 이 글을 쓰는 지금도 3연강하며 땀을 흘리는 발메님들이 있다는 게 팩트. 뛰는 취발러 위에 나는 취발러 있다.
그나저나, 연휴 발레 스케줄링에서 최대 고민은 추석 당일이었다. 당일까지 문 열어 달라고 하는 건 선생님 인권 침해다. 그런데 찾아보니 오 마이 갓, 당일에도 하는 학원이 있긴 있다! 문의해 보니 이미 마감. 무서운 취발러들이여-.
머리를 짜냈다. 대관밖엔 답이 없다. 해보자! 마침 동네 가까운 곳에 대관 가능 홀이 있었다. 여기마저 오전부터 이른 오후까진 이미 마감. 저녁 2시간을 대관했다. 나홀로 발레, 호기롭게 도전해보는 거야.
똑똑, 실례합니다~ By Sujiney
홀은 의외로 출근하며 매일 지나다니던 길, 유명한 카페 인근에 있었다. 삼삼오오 오손도손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는 이들의 시선을 받으며 홀로 어색하게 두리번거리다 홀 입구를 발견하고 입장, 불을 켰다. 본진 선생님의 목소리가 담긴 영상(우리 학원은 감사하게도 복습을 위한 영상 촬영이 가능하다)을 틀어놓고 바(barre) 워크부터 시작했다.
그런데...허전하다.
선생님의 부재로 인한 허전함은 각오했다. 지금 엄습하는 이 허전함은 새로운 종류의 것이었다. 뭘까. 뭐가 없을까. 아. 발메들이 없었다. 거울에 비친 건 나 혼자. 개인레슨도 아닌데 혼자인 나. 낯설었다.
일상의 발레 클래스에선 이렇게까진 못 느꼈다. 외려, 때로 사람이 너무 많거나, 동선 에티켓을 지키지 않는 분들이 종종 있으면 살짝 불편했다. 그런데 혼자 해보니 알겠다. 발메님의 소중함.
보고 싶었다. 파드발츠부터 플릭플락까지, 생전 처음 보는 스텝도 특유의 센스와 유쾌함으로 도전하게 해 준 JM 발메님, 극강의 성실함을 보여주는 SY 발메님, 배울 것 천지인 또다른 SY 발메님, etc.
모든 발메님들은 소중하다. 잘하는 선배 발메님들을 보면, 배움이 된다. 함께 성장하는 발메님들을 보면 의지가 된다. 모든 발메가 곧 스승인 셈이다. "모든 이가 스승이고, 모든 곳이 학교다"라는 말처럼.
이 대목에서, '춤 연구가'라고 본인을 정의하는 정옥희 작가가 쓴 밀도 있는 책,『진화하는 발레 클래스』(플로어웍스)에서 접한 아래 글귀가 떠오른다. 덴마크 발레의 아버지 격인 오귀스트 부르농빌에 대해 "발레 클래스가 하나의 사회이고 무용수들이 동등한 시민으로서 공존한다고 봤"다는 설명. 앞과 옆과 뒤의 동료가 친구이자 라이벌인 전공생들과는 달리, 취미 발레에선 진정으로 모두가 동등하다.
책 읽기 유독 좋은 계절. By Sujiney
발메님들과의 연대감을 느낀다고 말하게 된 건 여러모로 내겐 다정한 구원이다. 꽤 오래, 사람이라는 존재가 싫었기 때문. 인생의 여러 고비들마다 만난 경험에 고슴도치가 되었더랬다. 낑낑대며 공들여 쓴 기사를 읽지도 않고 댓글창을 감정 쓰레기통으로 만들어버리는 이들. 자신의 취향 또는 성향에 맞지 않다고 가족에게까지 메일을 보내던 악플러들. 영원을 맹세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증발해 버린 사람. 발레 흉내를 내던 옛 학원에서 가스라이팅에 왕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이들. 이렇게 남 탓을 늘어놓는 나 역시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혔을 테지. 나를 포함해 사람이라는 존재는 혐오의 영역이었다. 나의 암흑의 시대.
감사한 새 인연으로 읽게 된『멋있으면 다 언니』(이봄)의 다음 구절을 읽고 그때의 내가 생각났다. 가슴이 메어왔다. 황선우 작가가 진행한, 웹소설 '에보니' 필명 '자야' 작가 인터뷰 중.
"저는 그때 현실은 시궁창이고 인간은 쓰레기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녔어요. 당시의 저를 만난다면 제발 그러지 좀 말라고 하고 싶네요.(웃음) 그리고 혹시 예전의 저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 분이 있다면, 이렇게 생각해 보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나는 좋은 사람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 좋은 사람이 될 거라고요. 그러니까 스트레스에 매몰되지 말고, 남을 미워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고요." (343쪽 중 발췌)
그래.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 더 좋은 사람이 되는데 시간과 에너지를 쓰자. 내게는 무엇보다, 누구보다, 발메들이 있잖아.
단, 적정한 거리는 유지할 것. 환기와 채광은 공간에서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사람과 사람 간에도 바람이 통하고 볕이 들 틈은 둬야 한다. 관계에도 곰팡이가 필 수 있으므로.
그런 의미에서도 발레 클래스는 최적의 장소 아닐까. 아름다움이라는 목표를 공유하는 선생님과 발메들과 함께 있되, 서로 간의 거리는 유지한다. 2인무 또는 군무가 아닌 이상, 매일의 클래스는 홀로 또 같이 이뤄진다. 동작을 수행하는 개인이 적정 거리를 유지하며 서로의 공간을 침범하지 않도록 의식하는 게 에티켓이므로. 섬과 섬이 서로의 독립성은 지키되 바다 위에서 서로의 존재를 느끼며 안정감을 느끼는 것과 같다.
새삼, 궁금하다. 발레, 넌 대체 뭐니. 다리를 높게 들고 턴을 더블로 도는 것도 중요하지만, 발레 클래스는 더 나은 사람이 되는 수련과 같은 신기한 존재다. 발레를 만나서, 계속해서 다행이다. 호호백발 되어도 잘할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을 잘 다스려가야지. 자, 이제 발레학원 갈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