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올해는 한국 발레 역사에 기념비적인 해다. 유니버설발레단(UBC)이 창단 40주년을 맞이해서다. UBC의 올해 라인업 행간에서 '작심'이라는 단어가 읽히는 이유다. 공자님은 마흔 살에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게 되는 일이 없어졌다"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40세를 불혹(不惑)이라고 부른다고. 개인적으론 동의하기 어렵지만, 여하튼, UBC의 40주년은 불혹처럼 단단하다.
올해 UBC 라인업을 정리하면 이렇다. 2월 16~18일 '코리아 이모션 情'을 필두로, 3월엔 비(非)서울 지역에서 '백조의 호수', 5월 10~12일 '로미오와 줄리엣'(케네스 맥밀란 경 안무 버전), 5월 31일~6월 1일엔 UBC의 순수 창작 작품인 '더 발레리나', 7~8월엔 '잠자는 숲 속의 미녀' 비(非) 서울 지역 순회공연, 9월 27~29일엔 '라 바야데르', 11~12월 중순엔 '호두까기 인형' 비(非) 서울 지역 순회공연, 12월 19~30일엔 '호두까기 인형'이 이어진다.
저작권 및 출처 유니버설발레단 인스타그램
케네스 맥밀란(1929~1992) 경의 '로미오와 줄리엣'과, 클래식 발레 중에서도 대작으로 꼽히는 '라 바야데르'를 개인적으론 오매불망 기다리는 중. '로미오와 줄리엣'은 맥밀란 경 재단에서 퀄리티 컨트롤을 위해 캐스팅부터 까다롭게 관여한다고 한다. 맥밀란 경 재단에서 파견한 레페티퇴르(repetiteur, 공식 인정받은 안무 지도자)의 내한 리허설 등 과정도 까다롭다는 소식통의 전언. 쉽지 않은 만큼, 공연의 수준은 높다. 관객으로서는 축복인 셈.
케네스 맥밀란 경 재단 홈페이지.
UBC는 1984년 5월 12일 창단됐다. 국민 세금 지원을 받지 않는 순수 민간 발레단인 UBC가 한국 발레의 양대 산맥이 된 것은 괄목할만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UBC 전&현 무용수 선생님들 - 김현우 발레조아 원장님, 호아나발레 박현경 선생님, 이가영 선생님, 정훈일 선생님 - 께 배우고 있는 터라 UBC의 경사가 남일 같지 않다,라고 쓰면 오버일까. 무대에서 보던 분들이 클래스에서 보여주시는 시범을 보고 있노라면 황홀할 정도. 그래서일까, 선생님들이 내주시는 순서를 자꾸 틀리는 불상사가 발생하기도. 훈일쌤, 다음 주엔 덜 틀릴게요. 차마 안 틀리겠다고는 말 못 하겠다는.
언감생심이었으나, 용기를 쥐어짜 지난해 말부터 수강 중인 이가영 선생님의 작품반은 맞춤형 꿀팁까지 쏟아져서 황송할 정도. 수년 전, UBC의 '돈키호테' 무대에서 가영 선생님의 연속 이탈리안 훼떼를 보고 놀라서 입을 못 다물었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너, 몇 년 후에 저 무용수분께 꿀팁 세례를 받게 될 거야. 전생에 무슨 좋은 일을 했나 보다,라고. 이현준 UBC 수석무용수의 발레조아 특강도 잊을 수 없지. 섬세하면서도 파워와 연기력을 두루 갖춘 이현준 수석무용수의 티칭 스타일은 그의 춤과 똑 닮아 있었다. 아, 또 듣고 싶다.
지난해 '호두까기 인형' 무대의 이현준 수석무용수와 손유희 수석무용수. 실제 부부다. 다음달 '코리아 이모션'은 손 무용수님 은퇴ㅠ 사진 출처 및 저작권 유니버설발레단 인스타그램.
본론으로 돌아가서, UBC의 40주년과 함께 떠오르는 것. 뉴욕시티발레단(NYCB)의 75주년이다. 1948년 10월 11일 창단 공연을 무대에 올린 NYCB는 미국 발레의 역사 그 자체다. 그 역사의 뿌리는 조지 발란신(George Balanchine, 1904~1983).
오른쪽에서 두 번째 인물이 조지 발란신. 무서운 지도자의 포스. 출처 the Nation, 저작권 the George Balanchine Trust
발란신에 대해선 앞서 발레 관련 브런치스토리에 짧지만 수차례 언급하기도 했고, 지난해 본진 21주년 공연 팸플릿에 글을 쓰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에 대해선 쓸 말이 아직 차고 넘친다. 명언 덕후인 나로선 발란신이 더 각별할 수밖에. 온갖 종류의 명언을 제조한 인물 이어서다. 지금 떠오르는 것 중엔 이 정도.
"발레 무용수와 경찰은 온갖 규율과 법을 컨트롤해야 한다는 점에서 닮았지, 하지만 발레 무용수가 더 힘들어. 왜냐고? 경찰은 일을 하면서 동시에 아름답게 보여야 하진 않으니까." "발레리나가 왜 아름답냐고? 정원에 나가서 꽃에게 '너는 왜 아름답니'라고 묻지는 않지 않소?"
명언을 보면 살짝 느껴지겠지만, 그다지 친절하고 착한 사람은 아니라는 얘기도 있다. 사실, 그의 인성에 대해선 여러 논란도 있지만, 불변의 진리는 그의 안무가로서의 재능과 실력을 십분 살려 미국 발레를 그야말로 빚어냈다는 것. 발란신에 대해선 나중에 다시 다룰 예정. 그가 직접 쓴 책 『101 Stories of Great Ballets』의 이야기들도 곁들여서.
그런 발란신의 본명은 게오르게 발란치바즈.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 러시아계 무용수이자 안무가다. 그런 그를 미국으로 이끈 건 사업가이자 발레 애호가인 링컨 커스틴이라는 인물. 미국행을 승낙하면서 발란신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좋소.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어요. 학교부터 만듭시다. 발레단은 그 이후요."
그렇게 발란신이 만든 발레 학교의 이름은 아메리칸 발레 학교. 당시 미국은 발레에 있어선 황무지와 다름없었다.
뉴욕시티발레단(NYCB)의 75주년 자축 내용 중 일부. 출처 및 저작권 NYCB
흥미로웠던 점은 NYCB가 창단 75주년을 축하하는 방식이었다. 요지를 정리하면 이렇다.
1) 창단멤버부터 현역 무용수가 화합하는 장을 만들다 2) 뉴욕 하면 떠오르는 신문, 뉴욕타임스(NYT)에 다양한 꺼리(?)를 제공했다 3) 무용수 월급도 주기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음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4) 발레 저변 확대를 위해, 발레를 잘 모르는 이들도 맘 편히 참여할 수 있는 이벤트 5) 75주년이 꼭 2023년만 이라는 법이 있나? 2024년까지 쭉 75주년 테마로 간다
기사로 발제하지는 못했지만, NYT의 무용 전문기자인 Gia Kourlas가 쓴 NYCB 75주년 기사들을 보면 눈물이 날 정도로 좋다. 창단 멤버였던, 지금은 호호백발 할머니가 된 무용수를 인터뷰한 기사가 특히나 그러했다. 이 무용수는 발란신이 세운 무용 학교에서,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쁠리에와 땅듀(aka 탄듀, 탕듀)부터 시작했던 에피소드 등을 담담하게 들려줬다.
이미 글이 충분히 길어졌으니, 그 이야기는 다음 주 발레로운 매거진에서 전하기로. 사실 이제 발레 클래스에 가야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발레 클래스에 늦는 건 세상에서 제일 싫은 일 탑5 안에 드니까.
가기 전에 한 가지. UBC는 지난해 새로운 후원회원제도를 운영한다고 발표했다. 유랑(U랑)이라는 이름의 이 회원은 월 1만 원/3만 원/5만 원으로, 여러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액수에 비해 여러 특별 안내 및 혜택이 쏠쏠하다. 지난해 말 깜짝 선물로 받은 UBC 달력은 지금도 너무 잘 쓰고 있다는.
이렇게까지 쓰면 너무 홍보 같을지 저어 되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은 하자! 더 자세한 소식은 UBC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www.universalballet.com
UBC의 불혹 축하합니다. 공자님 말씀처럼 세상의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뚜벅뚜벅 발레로운 아름다움을 위해 나아가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