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로잔의 계절이다. 로잔 두 글자에 가슴이 두근거린다면 당신은 발레 팬. 매년 2월 초 스위스 로잔에서 개최되는 로잔 콩쿠르, 프리 드 로잔(Prix de Lausanne)은 온 지구 발레 꿈나무들에게 꿈의 무대다. 유수의 발레 콩쿠르 중에서도 로잔이 특별한 이유 중 몇 가지. 참여 가능 연령대가 만 15~18세로 엄격히 제한된다는 점. 한 번의 무대가 아닌, 수일 동안의 클래스와 무대를 통해 성장가능성을 본다는 것도 특징이다. 로잔은 가능성의 잔치인 셈.
올해 로잔 콩쿠르의 파이널리스트들. 출처 및 저작권 Prix de Lausanne
조지 발란신(George Balanchine)의 말처럼, "춤을 추고 싶은 무용수가 아니라, 춤을 추지 않으면 안 되는 무용수"가 되려고 불철주야 노력하는 10대 유망주들이 모이는 무대를 한 번에 볼 수 있다는 건 아름다운 일이다. 그들의 낭창낭창한 몸과 마음을 보고 있자면, 행복하면서도 슬프고 애틋하다. 예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며 행복하고, 나의 굳고 뻣뻣한 움직임을 생각하면 슬프고, 이 어린 무용수들이 거쳐갈 인생의 여러 파고를 생각하면 응원하는 마음에 애틋해진다. 부디, 아무쪼록, 인생이 짓궂은 장난을 쳐도, 심지 굳은 무용수이자 인간으로 계속 춤추며 나아가길.
인생이 얼마나 못될 수 있을지 알게 되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두 손 모아 빈다. Keep calm & dance on.
각설하고. 올해 로잔은 한국인에게 조금 더 특별하다. 1985년 로잔 입상자이기도 한 강수진 국립발레단장이 심사위원으로 초청됐기 때문. 심사위원석의 강 단장은 짙은 색 정장 차림으로 단정한 발레계 대 선배 모습을 시전. 멋졌다.
Prix de Lausanne 실시간 영상 캡쳐. 맨 오른쪽이 강수진 국립발레단장.
소위 '국뽕' 콘텐트를 개인적으론 좋아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잔 콩쿠르에 대해선 어쩔 수 없다. 매년 로잔 콩쿠르에 당도하고, 1차 관문을 통과하는 전 세계 도전장 중, 한국 학생들의 수는 압도적이다. 로잔 콩쿠르 공식 홈페이지에 따르면 올해엔 43개국에서 425명이 지원했고, 그중 본선에 진출한 학생들은 18개국 87명이다. 그중 한국인 숫자는 무려 13명. 일본이 그다음인데, 10명이다. 올해 본선에 진출한 학생의 14.93%, 즉 약 15%가 한국인인 셈.
소속은 전통의 양대산맥 서울예고와 선화예고뿐 아니라, 유스발레컨서바토리, 김포이화발레 및 무소속(인디펜던트)으로 다양했다. 콩쿠르 직전, 서울예고와 선화예고 선생님들께 전화를 드려봤다. "축하드린다"라고 전하자 선생님들은 "감사해요, 아이들이 너무 자랑스럽지만, 끝까지 조심스레 지켜보고 싶습니다, 응원 많이 부탁드려요"라고 이구동성.
그리고 이 글을 쓰는 2월 3일 토요일 오전 직전에 발표가 난 파이널리스트 명단. 남녀 통틀어 모두 20명이 선정됐는데, 이중 한국 학생은 무려 4명. 122번 이원겸 학생(선화예고), 123번 박이은 학생(서울예고), 307번 김지오 학생(서울예고), 318번 강유정 학생(선화예고)이다. 박수.
2024년 로잔 콩쿠르 파이널리스트 명단. Prix de Lausanne 홈페이지
동시에 더 뜨거운 박수를 보내고 싶은 이들은, 파이널리스트로 호명되진 않았지만 열심히 본선에 진출한 어린 무용수들이다. 로잔 주최 측이 매년 생중계 등을 통해 강조하는 바가 있다. "이 본선 무대에 진출했다는 것만으로도 여러분들은 우승한 것과 다름없다." 맞는 말이다.
오늘밤, 2월 3일에서 4일 일요일로 넘어가는 시간, 파이널리스트들은 그간 갈고닦은 솜씨를 무대에서 보여준다. 밤샐 생각에 행복하다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발레 팬들은 다 한마음.
그러면서 꺼내본다. 지난해 로잔 콩쿠르에서 멋진 에스메랄다 무대를 펼치며 5위 입상과 인기상(관객 선정)을 양손에 거머쥔 김시현 학생과의 인터뷰. 생업이 기자라서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많지만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듯), 매년 로잔 관련 인터뷰를 할 수 있는 건 엄청난 행복이자 영광이다.
김시현 학생과의 인터뷰 전문은 일단 여기.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39988
지난해 로잔 콩쿠르에서 막 귀국한 시현 학생을 서울예고로 찾아가 만났다. 에스메랄다의 주요 소품이 탬버린인데, 내 연습용 탬버린에 시현 양의 사인까지 받은 나는 성덕이로세. 감사합니다 시현 양. 이번 글 커버 사진은 시현 양이 착용했던 번호표와, 사용했던 탬버린이다. 아래에도 붙인다.
꿈의 번호표. By Sujiney
지난해 인터뷰에서 시현 양은 솔직 담백하면서도 뜨거운 이야기들을 들려줬다. 기사에 대부분 담긴 했지만, 특히 내 마음속에 깊이 새겨졌던 말 중 하나는 이거였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재원) 2학년 시험에 불합격해서 1년 정도 쉬었어요. (중략) 힘들고 우울하고, '내가 발레를 정말 좋아하는 게 맞나' 고민도 했고요.(중략) 그러다 어느 순간 문득 깨달았어요. 내가 원하는 건 춤을 추는 거라고요. 나는 발레가 아니면 안 된다는 걸 절감했죠. 그 힘든 시기가 저에겐 진정 필요했던 거였습니다."
이건 나의 탬버린. 지난해 로잔 콩쿠르의 수상자분들의 사인을 받은 보물. By Sujiney
이렇게나 어른스러운 유망주라니. 올해 로잔 콩쿠르를 앞두고, 조심스럽게 시현 양에게 다시 연락을 취해봤다. 시현 양은 로잔 이후 세계의 여러 발레단에서 다양한 제의를 받았다. 그런 그가 택한 곳은 미국 샌프란시스코 발레단. 시현 양이 보내 준 이메일 답장은 "안녕하세요, 김시현입니다!"라고 씩씩했다. 일부를 옮긴다.
Sujiney의 발레로운 매거진=로잔 입상 후 1년이네요, 근황 알려주세요. 김시현 양="우선, 작년 Prix de Lausanne에서 수상한 지도 벌써 일 년이 되어가는데요, 아직도 제가 수상을 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요. 저는 샌프란시스코 발레 트레이니 프로그램을 선택하여 잘 적응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새로운 환경에서 적응해 나가며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그때의 순간을 떠올리며 버티곤 해요."
Sujiney의 발레로운 매거진=올해 한국인 참가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려요. 김시현 양="매년 Prix de Lausanne에 한국인들이 많이 참가를 하는데, 이번에도 많은 친구들과 후배들이 참여를 했습니다. 제가 로잔에 있을 때를 생각해 보면, 여러분들의 응원 한 마디, 한 마디가 정말 힘이 되더라고요. 올해에도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Sujiney의 발레로운 매거진=혹시, 취미로 발레를 배우는 저 같은 성인발레인에게 해주시고 싶은 말씀 있을까요? 김시현 양=취미 발레분들께 드리고 싶은 말씀, 물론 있죠. 발레는 몸과 마음이 둘 다 힘들 때가 많아요. 하지만 그만큼 노력하면 성과는 항상 따라옵니다. 여러분들도 포기하지 말고 행복하게 즐기는 마음으로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시현 양의 앞날도, 올해 로잔 콩쿠르의 한국뿐 아니라 모든 참가자들의 앞날도 뜨겁게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