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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jiney Feb 11. 2024

바닥을 쳐야 날아오른다, 발레와 뉴욕타임스

Sujiney의 '발레로운 매거진' 4화  

지난주, 뉴욕에 사는 지인이 보낸 메일. "수진, 갑자기 뉴욕타임스(NYT) 에디터가 무언가에 열정을 갖고 그 일을 꾸준히 하면서 자기애를 갖게 된 사람들의 스토리를 보내라고 하네. 세계 각국에서 모아보라는데, 네 생각이 났어. 너 발레 오래 배웠지? 그 이야기를 OO자로 써서 보내줄 수 있을까? 미안한데... 24시간 안으론 보내줘야 해."

촉이 온다. 이런 건 묻고 따지지 말고 해야 한다. 바로 답장. "할게. 서울시간 오후 1시까지 보낼 테니, 받으면 피드백 줘."

꼰대 기질이 다분한 터라, 업무 시간엔 업무만 한다는 주의. 아무래도 나는 밥벌이에 있어선 멀티태스킹을 못하는 것 같다. 밥벌이 시간에 다른 일을 하는 건, 제아무리 사랑하는 글쓰기라고 해도, 어렵다. 그래서 점심시간을 이용해 썼다. 보내자마자 회신이 왔다. "완전 좋은 걸? 게재 일자 정해지면 연락할게."  


영화 '라이즈' 공식 스틸컷. 언젠가 나도, 꼭. 저작권 해당 영화사


쓴 글의 요지는 이러했다. 인생의 바닥을 쳤을 때, 발레를 제대로 시작하면서 약속을 했다. 1일 1발레를 하자고. 그렇게 1년 정도 지났을 때, 발레는 알려줬다. 바닥을 쓰는 법, 바닥을 딛고 일어서는 법, 바닥을 딛고 날아가는 법을.

사실, 이 브런치스토리에 다른 계기로 비슷한 에세이를 쓴 적도 있긴 하지만. NYT가 원하는 건 포커스가 확실했다. '자기애(self love)'에 어떻게 도움이 되었는가.


여기서 잠깐. NYT가 콕 집어 발레를 언급했다는 게, 흥미롭지 않은가.      




유니버설발레단 창단 40주년 축하를 위한 글, 발레로운 매거진 2회에도 썼지만, NYT 등 미국 일부 엘리트 매체들은 발레에 관한 관심이 지대하다.


뉴욕시티발레단(NYCB) 창단 75주년 역시 대대적인 기획 기사 시리즈를 실었다. 창단 때부터 조지 발란신에게 지도를 받은 노년의 발레리나를 3인 선정해 인터뷰했고, NYCB가 단원 월급을 주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어려웠던 시절도 다뤘다. 이 시리즈를 지휘한 것으로 추정되는 Gia Kourlas라는 인물은 가히 발레 전문기자라 할만하다. 나는 한국의 Gia Kourlas가 되고 싶지만, 이곳의 매체 환경 상, 무리. 그걸 바꿔보려고 발버둥 쳐보기도 했지만, 포기했다.

힘내길, 모든 무용수분들. 영화 '라이즈' 공식 포스터. 저작권 해당 영화사


일부 고마운 발레 애호가 독자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한국 언론의 수준이 그 정도 아니냐고. 미안하지만, 틀린 말씀이다. 요즘이 어떤 시대인가. 기사도 데이터가 지배한다. 내가 기사를 쓰면, 그 기사를 몇 명이 어디까지 읽었고, 그다음에 어느 기사로 이동했는지가 차가운 숫자로 나온다. 발레 관련 기사의 성적은... 말로 굳이 하지 않겠다. 마음이 너무 아프므로.


현 한국의 언론 환경은 왜곡돼 있다. 기사를 읽는 데 그 구독료는 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많이 읽히는 기사를 쓸 수밖에 없다. 나도 월급은 받아야 하므로. 방법은, 발레 기사를 그래도 가끔 온갖 힘을 다해 쓸 때마다, 많이들 읽어주시는 것인데... 잘 되길. 잘 될 거다. 잘 되어야만 하므로.  

다시 NYT로 돌아가서. NYT에서 자기애를 여러 면으로 들여다보는 시리즈를 만든다는 것, 그중에 발레라는 아이템에 초대되었다는 건 감사한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쓰면 내가 자기애가 대단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반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구는 언젠가 보인다. by Sujiney


나는 자기애가 강한 사람이었다. 과거형을 쓴 이유는,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다. 한때는 자기혐오에 빠졌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 중의 하나를 잘못 내려서, 그 후과로 10년가량을 고생했을 때. 2018년부터 약 3.5년 간의 시간이다.

그렇다고 나 스스로가 안 됐다고, 고생 올림픽이 있다면 금메달 아니냐고 징징대고 싶지는 않다. 자기 연민은 구토가 나올 정도로 싫다.

나이가 들수록,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에 나오는 캐릭터, 나가사와 선배가 했던 말에 공감한다.
"기억해 둬. 자기를 동정하는 건 비겁한 치들이나 하는 거야."
100% 공감.

그만큼 나는 차가운 사람이기도 하다. 인정. 한때는 불같았지만, 그 불길을 꺼야 살아갈 수 있었다. '겨울왕국(Frozen)'의 엘사가 부르는 'Let it Go'를 노래방에서 열창하고 싶군. 뜨거운 게 너무 힘들었기에 차가워져야만 했다,라고 쓴다면 나가사와 선배는 자기 연민이라며, 비겁하다고 화를 낼까.




허수경 시인의 '고마웠다, 그 생애의 어떤 시간'이 떠오른다.

"그때, 나는 묻는다. 왜 너는 나에게 그렇게 차가웠는가. / 그러면 너는 나에게 물을 것이다. 그때, 너는 왜 나에게 그렇게 뜨거웠는가. / 서로 차갑거나 뜨겁거나, 그때 서로 어긋나거나 만나거나 안거나 뒹굴거나 그럴 때, / 서로의 가슴이 이를테면 사슴처럼 저 너른 우주의 밭을 돌아 서로에게로 갈 때, / 차갑거나 뜨겁거나 그럴 때, 미워하거나 사랑하거나 그럴 때, / 나는 내가 태어나서 어떤 시간을 느낄 수 있었던 것만이 고맙다"

나는 아직 인간이 덜 돼서, 고맙다는 말은 할 수가 없다. 생의 그 시간이, 그 사람이, 그때의 내가, 여전히 밉고 싫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레라는 구원이 있었기에 나는 바닥에 눌어붙어 있던 나 자신을 일으켜 세운다.

그리곤 차가움이라는 철갑을 두르고, 발레라는 도구로 스스로를 단련한다. 절대적인 아름다움이 그래도 존재한다는 믿음에 안도하며, 동시에 그 아름다움을 손에 넣을 수 없음을 수용하되 계속 도전하면서.

최근 발레 꿈나무들의 세계적 콩쿠르인 '프리 드 로잔(Prix de Lausanne)'에서 발레 미스트리스(ballet mistress)로 나선 엘리자베스 플라텔 전 파리 오페라 발레 무용수가 한 말이 있다.   
"Use the floor!"  

올해(2024년) 프리 드 로잔(Prix de Lausanne) 백스테이지. 출처 및 저작권 Prix de Lausanne


다음 회에 자세히 쓰려고 준비 중인, 발레 영화 '라이즈(원제: En Corps)'엔 이런 말이 나온다.  

"이런 말 하면 좀 그렇지만... 조금, 괴로워해봐도 좋아. 지금까진 인생이 쉬웠지?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건 쉬운 일이었을 거야. 하지만 바닥을 쳐봤기 때문에 높이 올라갈 수 있는 거야."

우여곡절 이전의 시기, 근거 없는 자기애가 충만했던 시절은 순수의 시대. 지금 나는 순수하지도, 자기애가 충만하지도 않지만, 그래도 바닥을 나름 쳐봤기에, 자기애의 소중함은 아는 것 같다. 플라텔 선생님이 얘기했듯, 바닥을 사용해 날아오를 시간이다. Use the floor!

By Suji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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