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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하되 심각하진 말자, 발레도 인생도.

Sujiney의 발레로운 매거진 28회. 에스메랄다 공연 후기

by Sujiney


김기완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의 훌륭함은, 그와 마주 앉았던 인터뷰 시점으로부터 2년이 흐른 지금도 종종, 새삼스럽다. 기사엔 쓰지 않았지만 문득 떠오르곤 하는 그의 말.


"어느 날, 제 영상을 봤는데...(잠시 침묵) 너무 엉망인 거예요. 다시 정신을 차려야겠다, 마음먹었고 더 열심히 연습했어요."


끊임없이 스스로를 점검하고, 그렇게 자기 객관화를 통해 성장을 해나가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 아닐까. 모름지기, 모른다는 걸 알아야 모름에서 벗어날 수 있고, 못한다는 걸 알아야 더 잘할 수 있는 법이니까.


그가 역시 해줬던 말 중 종종 떠오르는 명언.

"'진짜 리허설은 부엌에서 하는 것'이란 말을 좋아해요. 설거지를 하면서도 동작과 표현을 계속 생각해야 한다는 의미죠."


그의 친동생, 마린스키발레단 김기민 수석무용수를 만났을 때도 비슷한 맥락의 말을 했다. 이렇게나 똑 닮은 형제는 "거의 매일 통화를"하고, "서로의 영상을 리뷰" 해준다고. 거장의 재목은 역시 다르구나, 싶다.


탬버린과 튀튀. By Sujiney


위대한 형제들의 이야기 뒤에 갑자기 내 이야기를 해서 머쓱하지만, 지난 12월의 두 발표회를 앞두고, 위의 말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비너스발레학원 1회 공연에서 '에스메랄다' 솔로와 세종발레디플로마 기말 발표회에서 '지젤' 2막 군무 중 투 윌리(Two Wilis) 2인 중 한 명으로 무대를 준비하며 느낀 것.


세상에서 가장 보기 고통스러운 영상은 내가 춤을 추는 영상이구나.


취미발레 동료들이 올리는 영상은 응원을 하면서 보게 되는데, 정작 내 영상은 올리기는커녕, 혼자 보는 것조차 힘들었다.


에스메랄다 조명. By Sujiney


그러면서 또 생각했다.


이런 상황인데, 관객을 초대할 수나 있을까. 그들의 소중한 주말, 추위를 뚫고 먼 길을 찾아와 봐 달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결론은 이랬다.


걱정할 시간에, 연습이나 하자.


부끄럽군. By Sujiney

38도 무더위를 지나 단풍이 드는가 싶더니 폭설. 그 사이 매주 일요일 오전 연습을 했다. 모두가 하는 연습이므로 혼자 솔로 무대를 선 건 3~4회 정도. 하지만, 많이 한다고 많이 느는 것은 아니다. 매 연습에 최선을 다하고, 선생님의 코렉션(correction)을 받아들여 체화하는 것.


시작 무렵 나의 에스메랄다는 잔뜩 화가 나있는데 화를 표현하지도 못하는 동작의 연속이었다. 춤이라고 부를 수도 없음. 제대로 된 방향을 신경 쓸 수도 없었고, 헉헉대면서도 카리스마와 도도함은 장착하겠다고 눈과 어깨에 잔뜩 힘을 줬다. 못 볼 꼴.


연습은 정직하다.


초여름 즈음엔 동선이 조금씩 정리되어 갔고

늦여름 즈음엔 급급했던 동작이 음악을 타기 시작했고

초가을 즈음엔 음악을 끝까지 늘려서 쓸 수 있게 됐다.

늦가을 즈음엔 에카르테를 정확히 표현하려고 노력했고

초겨울 즈음엔 쁠리에를 더 누르되 몸에 힘을 빼고 데가제 턴을 돌아야 한다는 걸 깨달았고

그렇게,

12월 21일, 공연 무대.


잘했냐고 응원하며 물어봐주시는 분들껜 웃으며 답했다.


"넘어지진 않았어요!"

또는

"이제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진심이다.


다시 봐도 떨림. By Sujiney


하지만, 동시에 느낀다. 진지한 건 좋지만 심각해지진 말아야겠다,라고.


중간에 솔직히 몇 번이나 좌절을 했었다. 매일 설거지하면서도, 출근길 횡단보도에서도 동작을 생각했거늘. 이렇게까지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이렇게나 더디게 늘고 때론 심지어 퇴화하다니.


하지만, 기억하자. 발레라는 절대적 아름다움이란, 몸이 굳은 뒤 배우기엔 한계가 철저하다는 것. 성인 취미발레인으로 내가 해야 할 것은, 진지하게 접근하되 너무 무거워지지는 않는 것일 것 같다.


좋아하는 영어 표현. Don't take yourself too seriously.

윤문 하자면, 너무 심각해지지는 말고 즐길 줄도 알아야 해.

지금 나의 슬기로운 발레 생활을 위해 꼭 필요한다 말 아닐까 싶다.


프로들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엄규성 원장님이 공연 후 해주신 말.


"영상 보고 많이 놀랐죠. 프로도 그래요. 발레의 테크닉과 몸을 쓰는 법을 열심히 익히고 깨닫고 나서, 자기 영상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요? 결국 '아 다시 무릎 펴는 것부터 제대로 해야겠다'라고 기초반으로 돌아갑니다."


기초의 소중함을 알고, 진지하게 배우되, 왜 안 되나 심각해지진 말기.

왜 안 되는 가에 침잠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더 잘 될까에 집중하기.

김기완 김기민 무용수들마저 끊임없이 스스로를 리뷰할진대. 과욕은 금물이다.


생애 첫 에스메랄다가 내게 가르쳐준 교훈.

고마워요, 에스메랄다. 또 만나요.


By Suji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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