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도 욕망한다

외국어 공부를 가장한 넷플릭스 리슈 46번째 by SJ !

by Sujiney

지난해 이맘때쯤, 엄마께 넷플릭스 멤버십을 따로 마련해드렸다. 그전까진 하나의 계정을 공유했지만, 효녀 심청 코스프레를 하며 새 계정으로 독립시켜드린 것. “결제는 제가 할 테니 원하실 때 원하시는 거 맘껏 보세요”라면서. 고백하건대, 지극한 효심의 발로가 네버 에버 아니었다.


실은

내가 원할 때 내가 원하는 걸 맘껏 보기 위함이었다.


보다 정확히 말해, 오리지널 시리즈 ‘아웃랜더’를 보기 위해서.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남자를 보려고. ['아웃랜더' 스틸]


그리고 지난해 봄을 지나 여름엔 이미 미국과 유럽에서 핫하기 그지 없었던 19금도 아니고 29금 드라마 ‘365일’이 한국 넷플릭스에도 풀렸다. 나는 외쳤다. 할렐루야!

두 작품의 공통점.
1) 야하다.
2) 여자 주인공이 객체가 아닌 주체다.
3) 여성 작가의 작품이 원작이다.

소위 ‘야동’ 또는 ‘AV’로 불리는 세계엔 그다지 조예가 깊지 않다. 그래도 가끔 IPTV 플랫폼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제목들은 대다수의 여성 시청자들에겐 매력적이지 않다. 여성을 남성에 의해 정복당하는 소극적 객체로 그리는 내용이 주류이기 때문.


위의 두 작품은 다르다. 특히, 미국에서 선풍적 팬덤을 형성한 ‘아웃랜더(Outlander)’는 시즌 6까지 이어지면서 2014년부터 현재까지 두터운 팬 층을 확보했다. 코로나19로 인해 제작이 늦춰졌지만 시즌 7도 제작이 확정됐다고 주연배우들이 트위터 등을 통해 지난 3월14일 밝혔다. 한국 넷플릭스엔 현재 시즌 5까지 업로드 돼있다.

‘365일’은 사실 어쩌다 보니 히트를 한 케이스. 폴란드의 30대 여성 작가인 블란카 리핀츠카가 “누구나 섹스에 대해서 자유롭게 얘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면서 낸 3부작 소설이 원작. 넷플릭스에 업로드 되자마자 전 세계적 열풍이 불었고, 주연인 이탈리아 배우 미켈레 모로네는 ‘듣보잡’에서 월드스타로 등극. 인스타그램 파로워 수가 서울특별시민보다 더 많은 1200만명이다. 이 영화와 원작이 오스카상 작품상이나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가능성은 사실 0%다. 스토리의 유일한 개연성이 남주 미켈레의 섹시한 외모라는 설이 유력. 그럼에도 여성이 보여지는 객체가 아니라 바라보는 주체로 등장하고, 베드신 역시 남녀 쌍방의 적극성이 담보된다는 점에서 기존의 소위 야동과는 결이 180도 다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인 ‘아웃랜더’는 이보다 더 진일보한 콘텐츠다. 우선, 단순히 야한 드라마가 아니다. 잉글랜드로부터 독립을 꿈꿨다가 좌절한 스코틀랜드의 한이 서린 역사부터, 신대륙 미국의 개척사까지 아우른다. 이걸 보면서 스코틀랜드의 컬로든 전투와 보니 프린스와 같은 역사적 실존 사건 및 인물에 대해서도 공부를 하게 됐으니.

우선, 줄거리.


18세기 스코틀랜드로 타임슬립한 2차대전 군 간호사와 스코틀랜드 청년의 로맨스, 라고 넷플릭스 플랫폼에 소개돼 있다. 시즌 1은 이렇게 시작했고, 현재 한국 넷플릭스에 공개된 시즌5는 이들 커플이 미국 신대륙으로 건너가 벌어지는 일을 다룬다. 각 시즌이 10개는 족히 넘는 에피소드로 구성된 대작이다. 원작인 다이애너 개벌든의 동명 소설 역시 대작이다.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있고, 이 시리즈 팬들의 책장엔 당근 꽂혀있다.

영국군 간호사였던 여주의 이름은 클레어, 스코틀랜드 청년의 이름은 (엄청 길다) 제임스 알렉산더 말콤 맥켄지 프레이저, 걍 줄여서 제이미.

한때 저 고양이가 되고팠더랬지. 부끄럽다ㅠ [샘 휴언 트위터]


한창 ‘아웃랜더’에 푹 빠져있을 때, 영국인 (남자 사람) 친구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거 그냥 girl porn 아냐?”
즉 여자들이 보는 포르노 아니냐는 얘기.

맞고도 틀린 얘기다. 꽤나 야한 장면이 상당히 많이 등장하니까 일종의 여자를 위한 포르노그라피라는 평가를 피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그냥 그 순간의 말초적 쾌락이 목적이 아니라, 여자의 욕망을 직시하고, 탐구하는 방식으로 야하다.

대표적인 게 시즌1의 결혼식 에피소드. 자세한 내용은 스포일러가 될 터이니 참겠다 (원하는 만큼 쓰자면 100쪽 이상도 쓸 수 있지만 독자를 지루하게 만드는 건 죄악이므로 패스), 중요한 건 이거. 여자가 첫날밤을 리드한다는 것, 그리고 여자와 남자가 서로를 건강한 방식으로 기쁘게 해주기 위해 노력하고, 그 과정에서 기쁨과 만족을 공유한다는 것.

클레어는 침대에 누워 순종적으로 남자가 자기를 어찌 해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금지된 상대에게 ‘범해지면서’(이 표현은 헌법으로 금지시켰으면 좋겠다) “어머 이러면 안 되는 데”로 시작해 “너무 좋아요”라고 말하거나 행동하지도 않는다. 또는 “두렵지만 당신이 기쁘다면 참고 인내하고 받아 들이겠어요”라는 식의 세상 순종적인 표정도 없다. 아이구 속 시원해.

이런 언니올시다. [STARZ]


대신 클레어는 제이미에게 가르쳐준다. 나는 이렇게 하는 게 좋아. 너의 이런 면이 사랑스러워. 너가 이렇게 해줬으면 좋겠어. 그렇게는 하지 말아줘. 제이미도 클레어도 서로를 열정적으로 사랑한다. 서로를 아끼면서. 싸우기도 하지만 결국 극복하면서. 이 얼마나 당당하고 멋지고 섹시한지.

‘아웃랜더’의 장르는 로맨스 겸 판타지. 타임슬립 때문에 판타지 장르로 분류되긴 했지만 사실 팬들 사이에선 “제이미라는 남주 캐릭터가 너무 완벽해서 판타지”라는 얘기도 나왔다. 영미권의 ‘아웃랜더’ 팬페이지에선 “남자 보는 눈이 너무 높아져서 연애를 못하겠다. 이게 다 제이미 프레이저 탓이야!”라는 메시지가 종종 뜬다.

제이미는 실제로 외모부터 마음까지 훈훈하다.
한 가지 에피소드. 극 중 클레어는 타임슬립 하기 전 이미 기혼이었다. 둘이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해야 할 상황에 놓이게 되자 클레어는 제이미에게 묻는다. “내가 virgin이 아니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리지 않아?” 그러자 제이미의 답. “마음에 걸리지 않아. 근데 내가 그렇다는(virgin이라는) 사실이 너에게 어떨지 모르겠네.”

이렇듯 여성의 처녀성에 집착하지 않고, 한 여자만을 바라보며, 사랑하는 여자의 안위를 위해선 자기의 행복을 포기하는 모습까지 보인다. 그러면서 고집은 세고 외모도 멋진 데다 리더십까지 갖췄으니.

여기에서 떠오르는, 최근 ‘평범한 결혼생활’을 펴낸 친애하고 애정하는 임경선 작가의 책 내용.


“성은 상대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빼앗는’ 것이다. 서로 허락한 상대라면, 그 사람의 몸을 이용해서 내 몸을 기쁘게 해버리고 말겠다, 정도의 이기심과 기세가 넘쳐야 성관계가 자유롭고 즐겁다.”(책 99쪽)


이건 거의 복음이로세.


다시, back to the '아웃랜더.'


배우들 사이의 케미 역시 흥미로운 포인트다. 제이미 역할을 맡은 샘 휴언(Sam Heughan)과 클레어 역할을 맡은 캐트리오나 발프. 둘은 부부 역할을 7년 가까이 연기해오면서 훌륭한 우정의 관계를 보여줬다. 팬들 사이에선 “둘이 제발 사귀어라”는 청원(?)까지도 등장했을 정도. 그러나 캐트리오나 볼프는 원래의 남자친구와 결혼했고, 그 결혼식의 주요 게스트 중 한 명이 샘 휴언이었다. 남편도 대인배일세.


참, 한가지 노파심에 적는다.


만약 아직 성인이 안 됐다면, ‘아웃랜더’와 ‘365일’은 몇 년만 참길. 어차피 시간은 훅 간다. 미성년이라는 시기는 인생에서 덧없을 정도로 짧다. 하지 말아야 할 거를 하며 시간을 축내기엔 너무 짧은 찰나다. 그러나 지금은 차고 넘치는 다른 콘텐츠를 먼저 즐기기를. 이미 죽을 때까지 다 봐도 못 볼거리가 가득한 이 세상이다.

갑툭튀 미켈레 모로네 [인스타그램]


마지막으로, 제이미와 미키(누구긴 누구야 미켈레 모로네)에게 무한한 감사를. 당신들 덕에 지난해를 버텼고 올해도 치러내고 있다.

마지막일 줄 알았던 사랑의 마지막을 본 뒤.

사랑 따위 남루한 감정 소비일 뿐이라고,

남자란 존재는 지긋지긋하다고

성급히 결론 내렸던 내게 이들은 다시금 일깨워줬다.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다고.

아름다운 남자란 흔치는 않지만

반드시 지구 어딘가엔 존재하며,

모든 사랑은 시간과 함께 길들어기지만

모든 사랑이 너덜너덜해지지만은 않는다는 걸.

나도, 너도

그 사랑을 찾고 누릴 자격이 있다는 걸.

사랑밖에 모르진 않지만, 사랑 없이 살 순 없다.

수 년 전 어떤 미국의 광고에서 봤던 이 문구로 끝을 갈음한다.


나는 사랑을 사랑해.
I love love.

P.S. 그간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서 발행한 13편의 글을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2021년엔 더욱 사랑하시길.

By SJ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한 후 느낀 점을 적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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