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리지 마요. 바에도, 남자에게도. 발레는 인생(4)

브런치 by SJ 57번째: Barre

by Sujiney

“고마웠어, 잘 있어.”

10년 다닌 발레학원을 그만두겠다고 마음먹은 날, 수업이 끝나고 나는 이렇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인사는 학원의 바(barre)에게 전한 것이기에. 높이 약 1.2m, 스테인리스 스틸 재질의 바.


영화 ‘화양연화’의 양조위도 아니고, 사물에 마음을 전한다는 게 가히 정상은 아니라는 것, 인정. 앙코르와트 사원의 벽에 못다 한 사랑 이야기를 속삭일 수밖에 없을 정도로 아련한 스토리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 바는 내게 ‘화양연화’의 사랑만큼이나 애틋했다. 학원에선 여러 사정으로 조용히 증발하기로 결심했지만 그래도 바엔 마음을 전하고 싶었던 이유. 어느 책 제목처럼, 이별에도 예의는 필요하니까.


영화 '화양연화' 중 한 장면. [영화 공식 스틸컷]


생각해보면 10년간 1주일에 평균 5번 이상을 나를 지탱해줬다. 이 바와 함께 인생 첫 플리에를 했고, 이 바에 의지해 스트레칭을 했으며, 이 바를 잡고 첫 를르베를 했다.


발레 수업, 말 그대로 ‘클래스’라고 부르는 데일리 훈련은 전 세계 불문 비슷한 구성이다. 바(barre)를 잡고 기본 동작을 순서대로 해내는 바 워크로 시작해, 바를 치우고 플로어에서 바 없이 하는 동작, 즉 센터 두 가지. 서울 파리 런던 뉴욕 모스크바 교토 몬테카를로 어디든 이 구성은 같다. 몇 세기 동안 tried and trusted 되어온 패턴.


국립발레단이 올 '월드발레데이'에서 선보인 클래스. 프로들도 매일의 바 워크를 소중히 여긴다. 선생님께서 동작을 주시는 것을 예를 갖추어 지켜보는 장면. [국립발레단 유튜브]


학원을 바꾼 뒤 나를 압도한 깨달음 역시, 이 바와 관련돼있다. 그간 내가 했던 발레 클래스는 철저히 바 위주였으며 센터는 거의 안 한 것과 진배없다는 점. 그리고 내가 10년간 주야장천 했던 바 워크는 정통 바 워크와는 차이가 크다는 것. 무엇보다, 바를 대하는 마음가짐부터.


발레 인생 시즌2의 본진, 발레조아의 김현우 원장님께서 지난 가을 첫 수업에 주셨던 첫 지적.


“OO씨, 바를 움켜잡으면 안 되죠!”


네? 선생님, 제가 설마 바를 움켜잡고 있나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건만 바를 내려다본 순간, 오 마이 갓.


김현우 원장님의 말씀은 항상 옳다. 증거사진 제출ㅠ

발레조아 첫 클래스 영상 중 내 손 캡처. 저러다 바 깨지겠다는ㅠ By SJ


바를 있는 힘껏 쥐고 매달리며 의지하는 모습. 심지어 를르베(업)을 서는 동작에선 바에 내 몸뚱아리를 의탁한다. 바가 없다면? 십중팔구 넘어질 것.


바를 잡는 정석은 이렇다.

일본의 유명 발레 브랜드 차코트(Chacott)의 인스타그램 포스트 중 발레리나 인터뷰 시리즈에서 가져온 사진. 바를 ‘잡는다’기 보단, 바에 손을 살짝 올려놓는 정도다.


Chacott Instagram


지금까지 나는 바에 매달리며 발레를 하고 있었던 셈. 그러니 자연스레 바를 잡은 손과 팔, 어깨에까지 힘이 들어갔던 거였다. 살이 빠지긴 해도 팔뚝 살이 여전했던 까닭, 발레리나 팔처럼 잔근육이 조각된 팔을 가질 수 없었던 이유를 찾았다. 몸은 정직하다. 팔 근육이 바에 의지하느라 단련될 기회가 없었던 거였어.


그럼에도, 10년간 내 몸에 스민 습관은 고치기 힘들었다. 하지만 의식적으로 노력한 결과, 이젠 원장님께 지적을 받지 않는 수준까지는 됐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서 나는 지하철이며 버스의 손잡이도 살짝 잡곤 한다. 차코트의 위의 인스타그램 포스트 인터뷰에 응했던 발레리나는 이렇게 말했다.

위의 사진에 함께 적힌 문구:

“기초 포지션을 몸에 익히기 위해서는, 매일매일의 레슨에서 의식을 계속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인터뷰의 제목을 차코트는 “의식의 스위치를 켜다”라고 붙였다. 적절하다.

그렇게 나도 매일 의식의 스위치를 켠다.


김현우 원장님뿐 아니라, 호아나 선생님도 자주 하시는 말씀.

“바(barre)는 우리에게 뭘까요? 파트너입니다. 소중히 대해줘야 해요. 움켜쥐거나 매달리면 안 됩니다. 아기처럼 살살, 사랑하는 사람처럼 부드럽게 대해 주세요. 나의 밸런스는 나 스스로가 책임져야 하는 겁니다.”


뜨끔했다. 그간 나는 내 밸런스를 바에 의지하고 있었다. 바를 내 파트너로 대하는 게 아니라 나를 응당 감당해야 하는 존재로 여기고 있었다. 내 무게를 다 의지하고 내 응석을 당연히 받아줘야 하는 존재.


내가 틀렸다.

바엔, 매달리는 게 아니다.


파트너가 있다는 걸 당연히 여기고

내 존재를 의탁하면 안 된다. 나는 내 책임이다.




문득 떠오른 기억.


한때 내 반쪽이라 여겼던 남자에게 “오빤 내게 발레 바와 같은 존재야”라고 말한 적이 있다. 고마움을 표현한답시고.

부끄럽다. 그 사람이 있어서 버틸 수 있다는 고맙다는 생각은 이제 와 돌이켜보니, 틀렸다.


그 바가 있기에,

그 사람이 있기에 내가 버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내가 스스로 버틸 수 있어야 한다.

바는, 그 사람은 내가 일방적으로 의지하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의 밸런스를 체크해주는 파트너와 같은 존재여야 한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파리오페라발레단의 학생들이 선보이는 바 워크. 를르베 업을 서는 동작을 하면서도 바는 살짝만 쥘 뿐. [Paris Opera Ballet Instagram]


발레조아 김현우 원장님의 명언 릴레이.


“내가 스스로 밸런스를 잡고 있는지 자주 확인하는 게 좋아요. 동작 중이라고 해도 바에서 살짝 손을 떼 보세요. 그리고 스스로 균형을 잡고 있어야 합니다.”


인생도 마찬가지네요, 선생님.


“바를 소중히 다뤄야 해요. 바에 기대거나, 바 반대쪽으로 갈 때 조금 빨리 가겠다고 밑으로 기어가거나 하는 건 바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바=사랑하는 이, 라고 치환해도 무방하겠다.




발레 클래스는 여러모로 인생을 닮았다.

1) 아무리 해도 쉽게 늘지 않고, 그렇다고 조금 게을리하면 바로 못 하는 게 티가 난다. 묵묵히 계속하다 보면 힘들어 지칠 때쯤 아주 살짝 but 확실한 진전이 이뤄진다. 어제보다는 그래도 오늘이 조금이나마 더 낫다.


2) 때론 타고난 재능이 있는 이들이 있어서, 재능이 없다는 점에 의기소침해질 때도 있다. 하지만 그것 역시 현실. 묵묵히 받아들이고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 그렇다면 나도 모르게 성장해 있다는 것.


3) 좋은 선생님과 좋은 파트너, 좋은 바가 중요하다는 것. 그런 존재는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라 내가 열심히 찾아야 한다는 것. 내가 먼저 좋은 학생과 좋은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는 것.


바 워크는 내게 가르쳐줬다.

관계는 일방이 아니라 쌍방이라는 것.


사랑만 유리 같은가.

모든 관계가 유리 같다.

깨지기 쉬우니 살살, 마음을 다해 예를 갖추어 다뤄야 한다.

다 깨지고 나서야 깨닫다니. 아니, 뭐 그래도 지금이라도 깨달은 게 어디야!라고 위로하자.


발레 클래스 시작 전 나란히 서 있는 바. 오늘도 잘 부탁합니다. @발레조아 학원. By SJ


얄궂다. 인생도, 발레도 시즌2를 시작하는 지금, 내 앞에 놓인 가장 큰 과제가 센터 워크라는 게. 센터는 바 없이 하는 홀로서기다. 의지할 것이라곤 전혀 없다. 내가 내 몸을 거울을 보며 마주해야 한다. 밸런스가 무너져도 잡을 바는 없다.


지금까지 나는 그에게, 바에게 매달리며 살아온 게 아닐까.

이제 나는 매달리지 않기로 한다. 바에도, 남자에게도. 내 밸런스는 나 스스로가 찾기로 한다. 쉽진 않겠지만, 그렇게 하도록 의식의 스위치를 매일 매 순간 켜야겠다.




몇 년 전 한 엘리베이터에서 본 낙서.

‘기대지 마시오. 손대지 마시오’라는 탑승 안전 안내 스티커에 볼펜으로 누군가가 이렇게 써놓았다.

‘(남자에게) 기대지 마시오. (여자에게) 손대지 마시오.’


나는 바에게도,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홀로서기 중이다.


때론 스몰 점프를 뛰다 헛디딜 때도 있고, 턴을 돌다 어지럽기도 하겠고, 그랑 주떼를 뛰다가 철퍼덕거리기도 할 것이다.

그래도 확실한 한 가지.

꾸준히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좋아져 있을 것이다.


정 힘들 땐

내 파트너 바(barre)에 살짝 손을 올리고 이렇게 말해야겠다.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


By S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