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어하는 것도 힘들다” ‘발레는 인생’(5)

브런치 시즌2 by SJ 58번째, ‘Smile’

by Sujiney

“아무렇지 않은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면

그게 얼마나 눈물겨운 노력의 결과였는지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으시죠.”

by 박완서(1931~2011),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중 ‘기나긴 하루’


지난여름까지만 해도, 박완서 선생님의 위의 문구 읽으며 신세 한탄을 하곤 했다.

내가 지금 얼마나 힘든 지 알아? 안 힘든 척하는 게 얼마나 눈물겨운지도 모르면서!라는 마음이었더랬지.

참... 못났던 시절.


세월이 빨리 지나가는 건 다행일 수도 있다. 부끄러운 현재가 잊혀진 과거가 될 수 있으니.


출처: 문학동네 인스타그램


모든 건 역시 마음먹기에 달렸다. 그리고 그 마음을 어떻게 먹는지는 전적으로 나의 자유이자 책임이다. 남 탓을 할 시간에 나를 돌아보면 되는 것을.


힘들어하다 보니 어느 순간 든 생각.


힘들어하는 것도 힘들다.


진정한 ‘발치광이(발레+미치광이)’로 거듭난 지난 늦가을 이후, 위의 문구를 보며 이젠 이렇게 생각한다.


발레야말로 아무렇지 않은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보이도록 하는 예술이다.


토슈즈 위에 자신의 체중을 싣고 32바퀴 훼떼 턴을 돌고 그랑주떼 점프를 연속으로 뛰고 왼다리로 서서 오른 다리를 귀 옆에 붙이는 극한 스트레칭을 하는 와중에 항상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고 때론 미소까지 짓는 것.


증거 1) 스베틀라나 자하로바의 스트레칭.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저 표정까지. 비인간적이다ㅠ

출처: https://www.pinterest.co.kr/pin/447404544217742662/


2) 박세은 파리오페라발레단 에투왈(수석 무용수)의 그랑주떼.

출처: 박세은리나 인스타그램. 높이 좀 보소. 뒤의 무용수 허리 or 어깨 높이까지 뛰다니.


이들이라고 힘들지 않을 턱이 있나.

아무렇지도 않아 보일 수 있게 되기까지 스스로를 조련했을 따름.


박세은 무용수를 지난여름 인터뷰했을 때, 그에게 “그만두고 싶었던 적은 없었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그는 2015년 큰 부상을 당했던 때 이야기를 꺼냈다. 그의 말을 그대로 옮긴다.


“다른 무용수의 발에 맞아서 이마가 6cm 찢어지면서 피가 콸콸 쏟아졌어요. 의사는 땀도 흘리지 말라고 했어요. 암흑의 시기였죠. 하지만 (중략) 마음을 딱 접고 불살랐죠. 이겨내지더라고요.”


기사에 다 쓰진 못했지만 의사는 적어도 3개월은 발레를 쉬어야 한다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세은리나는 2주를 쉬고 다시 토슈즈 끈을 매고 발레 바(barre)를 잡았다. 부상의 트라우마를 안긴 바로 그 작품으로 곧바로 무대에 섰다. 그런 시간을 보냈기에 지난해 아시아인 최초로 파리오페라발레단의 첫 에투왈이 되는 역사를 쓸 수 있었을 터.




발치광이의 연말연시는 기쁘게 바쁘다. 풍성한 연말 공연 관람을 위해 올해도 세종문화회관부터 서강대 메리홀, 예술의전당은 물론 강동아트센터까지 서울을 말 그대로 종횡무진. 연말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물론 ‘호두까기 인형.’ 국립발레단의 유리 그리고로비치(95세 생신 축하드려요!) 안무 버전부터 유니버설발레단의 바실리 바이노넨 안무, 서발레단의 개작 공연까지, 1주일에 호두만 세 번.


By SJ, 국립발레단 60주년 축하합니당
By SJ. 유니버설발레단 버전
서발레단도 응원합니다! By SJ


올해는 유독 직접 볼 수 있는 ‘호두까기 인형’은 모조리 죄다 전부 직관하리라 다짐했던 이유. 주말 작품반에서 ‘설탕 요정의 춤(Sugar Plum Fairy)’을 배웠기 때문이다. 버전이 살짝 달라도 이 작품이 없으면 ‘호두’가 아닐 정도로 핵심인 작품. 발레에 관심이 전무하다고 해도, 차이코프스키가 작곡한 몽환적인 선율은 모를 수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차이코프스키의 이 음악에 맞춰 주인공 클라라 or 마리가 추는 춤은 솜사탕같이 달콤하다. 아래 영상 참조.

https://www.youtube.com/watch?v=0Wz4cG5phfA

볼쇼이 발레단 유튜브 영상 캡처. 작품 중간에 숨이 넘 차는 구간인데 이런 미소라니요. 존경합니다 발레리나님.


처음 호아나 선생님께서 ‘설탕 요정’을 하자고 하셨을 땐 그래서 내심 “너무 쉬워 보이던데”라고 생각했었다. 오산도 그런 오산이 없었다.


쉬워 ‘보이는’ 건 완전 페이크.


동작 하나하나가 너무 어려워서, 선생님이 레벨 다운으로 개작을 했음에도 예정보다 한 달을 더 들인 뒤에야 겨우 살짝 흉내를 낼 정도였다. 영상 속 발레리나는 미소도 짓고 샤랄라하고 달콤한데, 연습실 거울 속의 나는 울기 일보 직전에 끙끙대며 괴로움이 역력한 표정.


구차한 변명 시작.

보통 발레 솔로는 1분 30초 정도가 평균이고, 2분이 넘으면 꽤 긴 작품으로 분류된다. 일부 콩쿠르에선 2분 이하로 출전 시간제한을 두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설탕 요정의 춤’은 무려 3분에 가깝다. 게다가 우리가 배운 버전은 악명 높은 유리 그리고로비치 버전이었다. 선생님께서 국립발레단 솔로이스트이자 지도위원 출신이셔서 국립발레단의 버전을 고른 것도 있지만, “이왕 할 거 찐으로 배워야 한다”는 철학도 한몫.


이 버전의 끝엔 무용수가 무대 전체를 턴을 돌며 크게 한 바퀴 도는 앙 마네쥬(en manége)까지 들어가 있다. 총 2분하고도 47초나 걸리는 이유. 박수까지 합하면 볼쇼이 발레단 영상에선 3분 30초 정도가 된다.

게다가 앞뒤론 남자 주인공과 함께 파드되(pas de deux, 듀엣)를 춘 뒤 각자 솔로를 추고, 다시 함께 파드되를 추는 그랑 파드되(grand pas de deux) 배리에이션 순서다.


‘설탕 요정’은 이름만 달콤할 뿐 발레리나들에겐 씁쓸한 악몽이다.




배우면서, 생각했다.


먼저, 유리 할아버지. 존경스러운 안무가이긴 하지만 발레리나들에겐 너무 못되신 거 아닌가요. 안무하실 때 발레리나 연인과 싸움이라도 하셨던 건가요. 대체 왜 발레리노의 솔로는 1분이 채 안 되는데 발레리나의 솔로만 3분 넘게 앙 마네쥬까지 해야 하는 건가요.

그리고 발레리나 무용수분들. 이렇게 힘든데 어떻게 하나도 힘들어 보이지 않는 거죠. 살짝 흔들리기도 하지만(인간이니까!) 그래도 끝까지 미소 지으며 마무리 인사까지 하는 모습에 박수.


관객일 뿐이었던 나는 알 턱이 없었다. 그랑 파드되이니 당연히 힘들 거라고 짐작만 했을 뿐. 발레리나들은 다들 하나같이 하나도 힘들어 보이지 않았으니까.

역시, 직접 해보지 않고 섣불리 판단을 해선 안 된다.


발레라는 씨줄과 인생살이라는 날줄을 엮는 게 이 시리즈의 목적이긴 하지만, 이번만큼은 발레 용어 아닌 그냥 이 말을 테마로 택한 까닭이다.


Smile.


아무리 힘들어도, 힘들어하는 게 때론 더 힘들다.

아무렇지 않은 사람이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건 대단한 일이다.




‘Smile’은 불후의 명곡이기도 하다.

수많은 버전이 있지만 마이클 잭슨이 어린 시절 부른 버전이 유독 많이 사랑받는 노래. 찰리 채플린의 영화에도 삽입됐던 유구한 역사의 이 노래.


“마음이 아프더라도

미소를 지어, 마음이 깨질 것 같아도

하늘에 구름이 짙게 끼어있다고 해도 계속 살아는 갈 수 있어

두려움과 슬픔을 미소로 헤쳐 나간다면 말이야.

미소를 지어봐, 그럼 어쩌면 내일은

인생은 그래도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낄지도 모를 일이야

그냥 미소를 지어봐

계속 시도를 해봐야 하는 때인 거야

미소를 지어, 울어 봤자 무슨 소용이겠어

인생은 그래도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

미소를 짓는다면 말이야.

Though your heart is aching
Smile even though it's breaking
When there are clouds in the sky you'll get by
If you smile through your fear and sorrow
Smile and maybe tomorrow
You'll find that life is still worthwhile
If you just smile
That's the time you must keep on trying
Smile, what's the use of crying
You'll find that life is still worthwhile
If you just smile.”


https://www.youtube.com/watch?v=kmw1yYRdDOM


비단 발레리나만, 마이클 잭슨만, 찰리 채플린만 그러할까.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얘기 아닐까.


힘들다고 힘들어만 하면 무슨 소용.

사느라고 고생이고

마음이 힘들어도

신세한탄+자신을 동정할 시간에

미소를 지어보자.

그리고 계속 살아나가자.


2022년에도.


By S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