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을 잡으면, 몸도 잡힌다 발레는 인생 (6)

브런치 시즌2 by SJ 59번째 - 그랑 플리에(grand plié)

by Sujiney

“사랑이란 게, 지겨울 때가 있지”

라고 가수 이문세는 노래했지만

“사는 게, 지겨울 때가 많지”

라고 나는 생각한다.


매일 한다고 좋아지는 일은 거의 없고

매일 하지 않으면 나빠지는 일뿐이다.

좋아지는 건 더디고 어려운데

나빠지는 건 빠르고도 쉽다.

열심히 뭔가를 하긴 하는데, 그걸 안 하면 나빠지니 어쩔 수 없이 하는 게 나이가 들어갈수록 많아진다, 일도, 생활도.

나름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상사와는 계속 엇박자, 먼지는 청소를 해도 해도 쌓인다. 인사고과는 언제나 기대에 어긋나고. 실망하는 것도 이젠 지겹다.

사는 게 진절머리 나도록 귀찮을 때가 있는 게

나만은 아닐 터.


발레는 다르다.

쉽단 얘기가 아니다 사실, 매일 한다고 해서 좋아지는 게 아니고 매일 하지 않으면 나빠지는 일의 최고봉을 꼽으라면 발레가 아닐까.

하루를 쉬면 내가 알고 이틀을 쉬면 선생님이 알고 사흘을 쉬면 관객이 안다는 말은 몸으로 무언가를 표현해내고 기록을 경신하는 예체능 중에서도 발레에서 특히나 맞는 말. 발레는 참, 잔인하고 혹독한 예술이다.


또 등장하는 이 사진. 쉬워지지는 않는다. 더 잘하게 될 뿐. 머리론 아는데 몸은ㅠㅠ [Google image]


그럼에도 나는 발레를 하면서 실망을 할 일이 없다.

아니, 실망을 할 자격이 없다는 말이 맞겠다.

실망이 있다는 건 기대를 했기 때문이니까.

이 정도 했으면 됐겠지, 나 좀 잘하지 않았나, 등등의 기대와 예상을 했기 때문이니까.

아직 못하는 나는, 실망을 할 겨를이 없다.


이렇게 다짐하듯 쓰는 이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제,

실망을 할 뻔해서다.




발레 시즌2를 시작한 지 약 100일. 그전까지 10년이란 세월을 강산이 바뀌도록 춤이 아닌 운동으로 발레를 했다. 그 학원과의 연을 끊으면서 나는 사실상의 발린이(발레+어린이)가 됐다. 그간 들였던 시간 돈 에너지 등등을 생각하면 어이가 없는 노릇이지만, 그랑플리에라는 기본 동작조차 시즌2를 시작한 지난가을에 처음 해봤다.

그랑 grand=큰, 플리에 plie=굽히는 이라는 뜻. 무릎을 굽혀 거의 바닥에 닿을 정도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동작이다.


그랑플리에의 정석. 어깨는 내리고 코어를 잡고 엉덩이도 잡고 올라가고 내려갈 때 흔들리지 말며 바닥을 밀어내는 힘을 기를 지어다. [www.bunboutique.com]


그 전의 학원에선 “그랑 플리에를 하면 성인 취미발레인들은 무릎이 나가고 몸이 뒤틀린다”는 게 격언이었기 때문. 다른 학원에서 발레를 먼저 배웠던 이들이 무심코 그랑 플리에를 하면 바로 불호령이 떨어졌었다. 그랑 플리에=악마 라는 생각이 내 뇌에 자리를 잡았던 까닭.


뒤늦게 발린이가 되면서 나름 세운 룰이 있으니, 주7일, 1일 적어도 1회 발레다. 10년 동안 한 번도 안 했던 그랑 플리에를 이젠 매일 한다. 할 때마다 좌절.

내 지금 맘이 딱, 아래 영상 속 아기 고양이 같다.



저 높은 곳의 목표물에 멋지게 점프를 하고 싶은 맘은 굴뚝같은데 실제 점프력은 그 20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는 몸. 그나마 저 아기 고양이는 성장을 하면 자연스레 나아진다는 희망이라도 있지. 내 몸은 이제 퇴화와 노화의 고속도로를 정주행 중.


가장 큰 좌절을 안기는 건 사실 그랑주떼도 아쌍블레와 같은 테크닉이 아니다. 그건 지금의 내겐 무리인 게 당연하니까. 그런데 그랑플리에는 다르다. 아무리 기초반이라도 그랑플리에를 하지 않는 발레 수업은 없다. 나는 매일매일을 중력에 지나치게 충실한 내 무릎과 안쪽 허벅지를 인지하면서 낑낑댄다. 결국 둘 중 하나다. 균형을 잃고 쓰러지거나, 균형을 잃을까 봐 무릎을 4분의 3 정도만 엉거주춤 구부리고 올라오는 편법을 쓰거나. 본진 학원인 발레조아의 김현우 원장님은 “손 짚는 거, 무릎 꿇는 거 꿈도 꾸지 마~”라고 절규하시지만, 선생님 제 몸이 제 맘 같지가 않네요 흑흑.


왼쪽이 일반 (혹은 드미) 플리에, 오른쪽이 그랑 플리에. [Fisiodancemid Facebook]


본진처럼 좋아하지만 아직 실력이 못돼 주말반만 다니고 있는 호아나 선생님의 작품반. 어제 2시간 수업을 들은 뒤 내 멘탈은 완전히 나가 있었다. 조지 발란신이 안무한 차이코프스키 파드되(Pas de Deux, 2인무)의 여성 솔로를 배우는 중인데, 몸을 푸는 바워크(barre work)에서부터 멘탈이 가출했다. 그랑플리에를 무릎과 허벅지, 코어 힘으로 올라오는 게 아니라 팔에 힘을 써서 바를 부여잡고 올라왔을 때부터 비극은 시작.


발란신의 작품 특성상 (사실 뭐, 모든 발레 작품이 다 그렇긴 하다) 엄청 쉬워 보이는 데 극심하게 어려운 동작이 계속됐다. 빠른 템포로 왼발 오른발 오른발->오른발 왼발 왼발->왼발 오른발 오른발->왼발 오른발 왼발로 파세 업을 하는 동작이다. 뭐가 어렵냐 싶지만, 나는 계속 두 번째 세트에서 왼쪽을 해야 할 때 오른쪽을 들었다(고백하자면 지금 위의 순서를 쓰면서도 처음엔 틀리게 적었다ㅠㅠ).


문제는 그러면서 계속 발이 꼬이고, 다리가 꼬이고 몸이 꼬였다는 것. 내 맘 속은 곧 이런 생각들로 가득 찼다. 아냐 이건 내 다리가 아닐 거야, 내 발이 왜 이러지 내가 이렇게까지 못하다니 아무리 그래도 이럴 수는 없는 거잖아.


결국 나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말았다.

중간에 멈춰버린 것.


그때 선생님의 외마디.

“마음을 잡아야 돼요, 마음을!”


네? 선생님, 지금 안 되는 게 제 몸인데요, 맘이 아닌...데요?


너무 계속해서 틀리니 나중엔 솔직히 울고도 싶었다. 어려워 보이는 것도 아닌데, 이것도 해내지 못하다니 나의 지난 10년이 너무 억울하고 야속했다. 나름 한다고 열심히 했는데 왜 나는 그 틀에만 갇혀서 그게 전부인 줄 알고 우물 안 개구리를 자처했는지. 그러면서도 열심히 꾸준히 하는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기기까지 했으니. 우물 밖 사정은 알지도 못한 채. 부끄럽다.


결국 너무 틀리자 선생님께서 음악을 끄고 들려주신 말.

“순서는 틀릴 수 있어요. 그런데 그렇다고 몸의 움직임을 멈추면 절대 안 돼요. 맘을 잡아요. 실수를 해도 마음을 다잡고 재빨리 넘기고 다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다 망치게 되잖아요. 재빨리 마음을 다잡고 실수를 극복해서 다음 동작으로 몸을 움직여 나가야죠.”


수업 말미에 “그랑 플리에도 너무 안 되어서 속상하고 점프를 뛸 때도 저는 나름 힘껏 뛰는 데 몸이 말을 안 들어요”라고 하소연했더니 역시나 호아나 선생님의 멋진 말씀.


“그동안 했던 건 발레가 아니니까요. 코어며 팔, 다리 근육을 제대로 쓰지를 않았어요. 이제 막 쓰기 시작했으니 계속 그냥, 맘을 다잡고 훈련하면 됩니다.”


한마디로,

맘을 잡고 몸을 잡자

는 것.




돌아오는 길에 다시 멘탈을 잡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실망은 이르다. 실망할 자격도 없다. 일단 제대로 꾸준히 하자. 그럼, 실망할 일도 결국 생기지 않을 거야. 계속 마음을 다잡으며 앞으로 나아가자. 그럼 김현우 원장님이 내게 “중력에 너무 충실하면 안 돼”라고 해주시는 감사한 지적도 덜해질 거다.


2019년 유명을 달리한 세계적 발레리나, 알리샤 알론소(Alicia Alonso). 그는 64세의 나이에 지젤 역할을 소화해내며 이 같은 말을 남겼다. 인스타그램의 발레 관련 계정(https://www.instagram.com/reel/CYwQ7pUJUue/?utm_source=ig_web_copy_link)에서 배운 내용.


“결국, 마음과 몸의 싸움이에요. 마음이 이기면 몸도 됩니다.”


출처: al.longe Instagram (https://www.instagram.com/reel/CYwQ7pUJUue/?utm_source=ig_web_copy_link)




몸만 잡으려고 맘을 놓쳤던 나. 이젠 맘을 잡고 몸도 잡기로 다짐했다.


물론 쉽진 않을 거다. 쉬울 턱이 없지. 어제의 좌절과 오늘의 땀이 켜켜이 쌓여 내일의 발레를 만든다.


호아나 선생님이 만드신 발레 다이어리 속지 처음에 이런 말이 적혀 있는 건 다 이유가 있다.

Copyright: 호아나(Hoana) 발레 다이어리. By SJ


김현우 원장님도 자주 말씀하신다. “동작이 안 돼서 스트레스 받지 마. 즐겨. 그 대신 꾸준히 열심히, 하루에 1mm씩 진전이 있으면 돼요. 고통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하지만, 이겨내면 반드시 좋아집니다.”

발레조아의 오윤주 선생님도 말씀하셨다. “(발레에서) 헛된 시간이란 없어요. 예전 학원에서의 시간도, 그만큼 기본을 다졌다는 점에선 의미가 있어요.”


이렇게 좋은 선생님들을 찾아낸 나, 칭찬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지나간 시즌1을 아쉬워하거나 아까워하거나 억울해하지는 말자. 그럴 시간에 다음 동작을 생각하자. 시즌1이라는 시간의 저축으로 어쨌든 지금의 내가 있고 나는 내 나름의 시즌2를 묵묵히 꾸준히 그러나 즐기며 해나가면 된다. 그러면 나도 모르는 사이, 좋아져 있을 거다.


마지막으로, 유니버설 발레단을 다룬 EBS ‘극한직업’ 시리즈의 최애 장면으로 마무리.

EBS '극한직업' 중 발레 무용수 편. 유니버설 발레단에서 촬영했다. 캡처가 맘에 안 들게 되어서 부득이하게 하트를 뿅뿅ㅠ [EBS YouTube]


프로 발레 무용수분들도 이런 말씀을 할진대, 취미발레인 나는 말해 뭐해. 실망하거나 좌절할 시간에 맘을 잡고 몸을 잡자. 이렇게 쓰고 보니 발레는 극한취미인듯.

어쨌거나 저쨌거나

발레는 인생이다. 그래서 힘들지만 그래서 가치 있다. 내일도 그랑 플리에를 할 나를, 응원한다.


By S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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