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시즌2 by SJ 62번째: 턴
우당탕~ 소리도 요란하게 넘어지고 말았다.
피루엣, 즉 턴을 돌다가 축 다리가 무너지면서 몸은 뒤로 넘어가고 돌던 다리는 꼬인 것.
한마디로 그냥, 대참사.
본진 학원이었다면 그나마 덜 쪽팔렸을 텐데. 큰맘 먹고 원정 간 학원이어서 더더욱 슬펐다는 이야기. 티칭 좋기로 유명하신 선생님 수업이었던 터라 “잘해 보이고 말겠어”라는 마음이 지나쳤다. 뭐든 과유불급. 힘을 빼야 할 곳에 빼고 줘야 할 곳에 줘도 모자란 판에 그 정반대로 했으니. 유구무언.
웃긴 거. 그래도 생존본능은 있어서 덜 아프게 (=더 못난 폼으로) 넘어졌다. 동시에 빛의 속도로 머리를 스치는 생각. 아파 죽겠지만 아픈 척하면 안 돼! 뒤에서 어쩔 줄 몰라하시는 다른 회원들의 웅성거림을 들으며, 난생처음 이렇게 생각.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다행이야.
빛보다 빠른 속도로 내게 달려오신 원장님께선 멘털은 부서졌지만 (부모님 DNA 덕) 튼튼한 두 다리는 정상임을 확인해주시고 이렇게 위로해주심.
“열심히 돌려고 그랬던 거고, 다치지 않았으니까 다행입니다.”
너무 아프고 너무 쪽팔린데, 이상도 하지.
후련했다.
왜지?
오는 길에 깨달았다.
이때까지 나는 제대로 넘어져본 적이 없었던 거다. 이날 나는 처음으로 제대로 넘어지고, 다시 일어난 거다.
그랑 플리에도, 파도부레도 하지 않았던 예전 학원에선 넘어질 일이 없었다. 항상 하던 동작만 했으니. 물론, 그게 쉬웠다는 건 네버 에버 아님. 그것도 힘들었다.
But 뭔가 개운하지 않았다. 이게 전부가 아닐 텐데. 이전 학원에서도 창작 작품을 1년에 한 번씩 작품비를 내고 콩쿠르에 수차례 출전했다. 작품의 필수 구성 요소가 턴이니, 돌긴 돌았다. 문제는 내가 무슨 턴인지를 몰고 일단 돌기만 했다는 거. 셰네를 셰네인 줄 모르고, 스트뉴를 스트뉴인 줄 모르고 돌았다. 그 학원을 나온 뒤에야 스트뉴-셰네-피루엣-앙투르낭-훼떼 등등의 턴 용어를 제대로 알았으니 말해 뭐해.
복기를 해보면 당시 나는 어깨와 팔의 바깥 근육을 사용해 힘으로 돌고 있었다. 그러면서 승모근은 내려가고 팔뚝 살은 빠지길 바랬던 나. 반성합니다.
각설하고.
그러다 보니 이전 학원에선 열에 아홉은 제대로 돌지 못했다. 나머지 한 번은 돌기는 도는데 어깨 힘으로 돌다 보니 돌덩이처럼 딱딱. 턴을 도는 데 성공했다기보다 어쩌다 돌았던 요행에 가까웠다.
여전히 돌아보려다 돌아버리는 날이 많지만, 돌지도 못했던 날보다 즐겁다.
넘어져봐야 다시 일어날 수 있다. 후련한 건 이 때문이었다.
개선의 첫걸음은 자각과 인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련은 해도 쪽팔림은 남는다.
또 다른 내 마음의 본진, 호아나 선생님께 “엉엉 선생님 저 OO에서 턴 돌다 넘어졌어요”라고 칭얼댔더니 세상 쿨하고 멋지신 우리 선생님 왈.
“잘했어요! 이제 99번만 더 넘어지면 되겠네요!”
오 마이 갓. 역시 발레 무용수분들의 멘털이란, 철갑을 두른 듯 남산 위의 저 소나무처럼 멋지다.
스스로를 위로하고자 하는 못난 말 하나. 나만 넘어지는 건 아니닷!
본진 학원 발레조아의 김현우 원장님의 기초반. 발레 바를 난생처음 잡아보는 친구들도 많은데, 이분들 중에서도 턴을 돌다 넘어지시는 분들이 가물에 콩 나듯 있다.
이분들의 공통점.
오늘은 잘 안 되지만
언젠가는 되리란 믿음으로
지금 이 순간 열심히 돈다는 것.
넘어지면 어떻게 해, 창피하고 아플 텐데, 라는 생각이 앞서면 넘어질 힘도 내지 못한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것, 창피함을 이겨내는 것 이것도 소중한 재능이 아닐까 깨닫는 요즘. 난 이분들이 제일 부럽다. 나도 모르게 내 몸에 스며든 안 좋은 습관을 빼내는 것, 즉 unlearn 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되니까.
나도 백지이고 싶다.
하지만 어쩌겠나. 현실을 담담히 인정하되 내일에 대한 희망으로 오늘 열과 성을 다해 집중하는 것. 그럼 나의 내일은 나아져 있을 거다. 올해 창단 60주년인 국립발레단의 강수진 단장도 책에 이렇게 썼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이 있기에 즐겁다고. 나는 아직 즐거울 수준이 못되지만 그래도 신기하고, 신이 난다.
쉽진 않다. 솔직히 지루할 때도 많다 하지만 호아나 선생님의 또 다른 명언. “지루한 순간이 쌓이고 쌓여서 조금씩 하지만 확실히 나아지는 것, 그게 발레”인 거다. “빨리, 쉽게 되면 재미없잖아요? 어려우니까 성취감과 무대의 희열이 있는 거예요.”
믿슙니다 선생님.
호아나 선생님의 발레 다이어리를 매일 쓰면서 깨달은 것.
그래도 조금씩, 아주 조금씩이지만, 확실히, 나아지고 있다.
바로 지난주 김현우 원장님께서 “오, 이젠 스팟도 되는데? 시간이 축적이 되면서 나아지고 있어요. 굿!”이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기뻐서 눈물이 났다. 바로 다음날 클래스에선 다시 지적받았지만ㅠ 발레는 쉽지 않아서 매력적.
하나 더. 레임덕 턴!
처음엔 완전 어버버 하다가 조금씩 흉내는 낼 수 있게 됐다. 호아나 선생님께 올해 1월 배운 차이코프스키 파드되 여성 솔로의 마지막 턴 부분. 피케 턴을 돌고 데가제를 한 뒤 파세를 하며 턴을 도는 동작.
공짜로 되는 건 없다. 매일 지하철 플랫폼 또는 버스 정류장에서 영상을 보고 다리를 움직이며 이미지 트레이닝. 신촌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한쪽 학다리로 축을 세우고 있는 희한한 인간을 마주하신 적이 있다면, 그게 나였다. 못 볼 모습을 보여드려 죄송할 따름.
이런 연습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내 다리가 레임덕 턴을 한 번은 하고 있었다.
발렐루야!
김현우 원장님께서 주신 1일 10회 그랑 플리에 미션과, 호아나 쌤의 를르베 1층 2층 트레이닝을 매일 루틴으로 한 지 오늘로 열흘째. 오늘의 시간이 쌓여 내일은 나아지기를.
그리고 생각한다. 훼떼 16바퀴, 언젠간 돌고 말 거야!
요렇게.
환갑 전엔 되겠지? 버스 정류장 연습, to be continued.
By S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