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워 보이는 것의 어려움 feat. ‘플로라’

브런치 시즌2 66번째 by SJ 발라레 인생(12)

by Sujiney

웃긴 글을 쓰는 게 꿈이거늘 발레 관련 브런치는 매번 진지함 과잉인 것 같아 반성 중. 하지만 어쩌랴. 어느 정도 수준이 되어야 농담도 할 것을.

그래도 그랑주떼는 아주 조금이지만 어제보단 오늘이 나아지는 중. 시간을 차곡차곡 쌓아 나가면 된다.


각설하고. 뜬금없지만 드디어, 봄이다. 비루한 일상의 풍경에 벚꽃과 목련이 끼어들기 시작했다. 내가 자라왔고 살고 있는 한국의 거리를 특정하는 초록색 봉고차 마을버스 4번, e마트 24의 노랑하양핑크의 알록달록 쓰레기 봉투 진열대, 검은색 비니루 봉다리(표준어, 아니지만 이렇게 써야 제맛) 속 깻잎 듬뿍 순대볶음 사이로 꽃이 새치기했다.

그런데.


화사한 벚꽃 망울과, 이미 지기 시작한 백목련이 올해는 왠지 쓸쓸하다. 지난 겨울이 지나치게 길었던 탓일까. 지금 이렇게 봄이 와도 결국 봄날은 가고 겨울잠도 자지 못하는 겨울이 오겠구나 라는 생각.

어쨌거나 저쨌거나. 동네 뒷산 & 단골 카페엔 이런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연희동 뒷동산 & 연남동 테일러커피 By SJ



봄 하면, 꽃.


벚꽃도 예쁘고 진달래도 사랑스럽지만 개인적으론 튤립이다. 엄마 생각이 나서. 초등학교가 국민학교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때, 담임선생님이 환경 미화용(역시 옛날 말ㅋ) 화분을 하나씩 가지고 오라고 했다. 엄마가 골라 준 화분이 튤립이었다. 낭창낭창한 줄기 끝에 여린 핑크색과 당당한 붉은색의 튤립이 어찌나 곱던지. 친구들의 장미나 베고니아도 예뻤지만 나는 왠지, 교실 뒤에 놓인 하나뿐인 튤립이 참 좋았다. 그 꽃을 골라준 엄마는 더 좋았다. 어제도 엄마와 다퉈 놓고 이렇게 낯간지러운 글을 쓰는 나라는 인간. 그래도 엄마, 사랑해요.


또, 각설하고.

튤립이 모티프인 의상인 작품, ‘어웨이크닝 오브 플로라(Awakening of Flora)’를 호아나 선생님께서 3월 작품으로 골라 주셨을 때, 무진장 설렜다.

튤립 때문만은 아니었다. 유명 발레 유튜브인 테르프에 이 작품을 설명해놓은 문구가 마음에 쏙 들었었던 기억도 한몫. 아래 캡처 이미지로 설명 갈음.


이미지는 발레 전문 유튜브 '테르프' 캡처. 항상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


마지막이어야 했을 사랑의 마지막을 본 뒤엔 사랑이 싫어졌다. 좁은 연남동 거리를 걸어갈 때, 커플이 마치 이 길의 주인은 자기들이라는 듯, 나를 밀치고 당당하게 걸어가면, 피식 웃었다. 그래 봤자 오래가야 유통기한 2년이다 얘들아. 그 사이 잘 즐겨 놓으렴.

이젠 다시, 밀치고 싶다. 그럴 땐 함께 걷는 연인이 내 어깨를 좀 더 힘주어 안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물론 여러가지 뒷정리를 먼저 한 뒤의 얘기이지만.

그렇게 실망한 뒤 절망을 해놓고 슬그머니 또 희망을 하다니.

인간은 아니, 나는 얼마나 한심한 존재인지.




튤립을 사랑했던 엄마. 언젠가 방학이었던 내게 이런 말을 무심코 툭 던졌다.

“사랑이란 남루한 거야. 지겨운 거고. 산다는 것처럼. 그래서 꽃이 필요한 거지.”

혼잣말에 가까웠던 엄마의 이 말이, 지금의 내겐 사무친다.


호아나발레 '어웨이크닝 오브 플로라' 마지막날. By SJ

본론인 발레로 돌아가, 지난주 마친 작품, ‘어웨이크닝 오브 플로라(Awakening of Flora)’ 스토리. 말그대로, 플로라(라는 꽃의 신)가 오랜 잠에서 깨어난다는, 그래서 사랑을 만난다는 얘기. 발레의 청소년 올림픽 격인 로잔 콩쿠르(Prix de Lausanne)에서 최근 굉장한 인기를 끌고 있는 작품이다. 올해 파이널리스트인 최연서 학생을 인터뷰 했을 때, 왜 라일락 요정을 골랐냐는 질문에 “다들 ‘플로라’를 하니까 저는 다른 걸 하고 싶었어요”라는 요지의 답을 해줬을 정도.


‘플로라’를 많이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빨강 튤립이 곳곳에 박힌 어여쁜 흰색 의상도 아름답거니와, 모든 동작과 테크닉이 낭창낭창하고 하늘하늘해서 어여쁘다. 추는 사람을 예쁘게 보이게 해주는 춤이랄까. 솔직히, 호아나 선생님께서 참고 영상을 보내주셨을 때는 세상 가볍고 쉽게 추는 무용수의 모습에 “어머 이번달은 쉽겠다”라고 아주 살짝 조금 생각했던 것을 이제사 고백한다.


그것은, 역시나 나의 어마무시한 착각이었음을, 나는 1주차 첫 동작에서 깨닫고 있었다. 가볍고 하늘하늘한 발로네를 하기 위해 코어근육을 얼마나 단단하게 그러면서도 가뿐히 잡고 있어야 했는지. 예쁜 척 하는 파드바스크 동작은 손목이 계속 꺾여서 얼마나 부담스러워 보였는지. 거울 속 내가 보기 싫을 정도였다.

개중에 그나마 나은 캡처 이미지. 보정은 안 했으나 거울에 비친 이미지이기 때문에 날씬해보인다는 슬픈 진실, 인정ㅠ

거울아 거울아 난 언제쯤 제대로 를르베 업을 설 수 있겠니ㅠ By SJ


쉬워 보이던 그 춤이 이렇게나 어렵다니.

역시나 내 맘을 읽으시는 도사님 아니 호아나 선생님.


“쉽게 보이는 게 진짜 어려운 거랍니다.”


라는 another 명언 시전.

쉬워 보이는 게 어렵다는 거,

사실 사랑도, 인생도 그렇지 않나.


어린 시절엔 으레 지금 내 나이면 아들딸 잘 낳고 남편과 알콩달콩 잘 살고 있을 줄 알았다. 사랑은 영원할 줄 알았다. 온갖 TV드라마와 영화 결말도 해피엔딩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젠 알겠다. 현실에 해피엔딩이 없으니 픽션에 해피엔딩이 있다는 것.


영원한 사랑은 현실에 없으니, 영원한 사랑도 있어야 한다는 걸 교육받아야 하는 셈.




‘플로라’를 어찌어찌 무사히 마친 다음. 우연히 한 선물을 만났다.


‘오늘의 개, 새’라는 제목의 그림책.

이불빨래 귀찮아ㅠ By SJ

어른을 위한 그림책이다. 멍멍이와 짹짹이가 만나 서로를 왜 좋아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채 좋아하게 되고 서로를 이해하려 하다 오해만 하지만 결국 뽀뽀한다는 예쁜 내용. 다르면 틀린 거라고 쉽게들 말하는 곳에서 내겐 다른 종(種)의 개와 새가 사랑을 한다는 설정 자체가 너무 예뻤다. 개가 새에게 “너는 나를 너무 쪼아대”라고 불평하자 새가 “부리를 가진 자의 습성이지”라고 태연자약하게 답하는 것도 너무 예쁘다.



그리곤

“나의 개는 어디 있지? 있긴 있을까? 있지 않아도 세상이 무너지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는 나를 발견하고 만다.


난 가끔, 내가 테일러커피의 화분이면 좋겠다. By SJ


튤립은 금방 시든다. 낭창낭창한(이 형용사를 이미 너무 많이 썼다는 것 잘 알고 있고, 글쓰기의 기본은 반복을 하지 않는 것임을 알고 있으나, 애정하는 단어라 이번만 용서를 구한다) 줄기는 금방 휘어지고, 나긋나긋한 꽃잎은 쉬이 벌어진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거였다.

호아나선생님 클래스 ‘플로라’ 마지막 주에 튤립 선물을 하기 위해 동네 꽃집에 들린 내게, 인심좋은 사장님이 들려주신 말.


(aka 무식한 손님)=“튤립 너무 예쁘네요. 근데 아무래도 금방 시들겠죠?”

사장님=“튤립이요? 음, 오래 가지는 않아요. 근데요. 올해 시들었다고 바로 버리지는 마세요.”

나=네? 왜요?

사장님=뿌리를 소중히 거두어서 잘 말려 두면, 그래서 내년 봄에 다시 심으면, 다시 줄기가 나오고 꽃이 맺히거든요.


죽은 줄만 알았던 나의 사랑도

튤립 같기를,

‘플로라’를 배운 2022년 봄에

감히 꿈꾼다.


By SJ


※ 이번 회부터 시리즈 제목을 기존 ‘발레는 인생’에서 ‘발라레 인생’으로 바꿨습니다. 발라레(ballare)는 이탈리아어로 ‘춤추다’라는 뜻이면서, ‘발레(ballet)’의 어원이기도 합니다. 발랄해 인생, 뭐 이런 것도 노리지 않은 것은 아닌 것 같다고, 소심하게 덧붙여 놓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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