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쿡에서 발레를: 첫 해외원정, 80세 발메를 만나다♡

브런치 시즌2 by SJ 68th, 발라레 인생(14)

by Sujiney

“갈까 말까 할 때는 가고 / 먹을까 말까 할 때는 먹지 말고 / 살까 말까 할 때는 사지 말아라.”


팩트체크가 필요하지만 어느 명문대 교수가 남겼다는 인생 명언이다.

But 내 현실은, 먹을까 말까 할 때 매번 먹고 (후회하고) / 살까 말까 할 때는 매번 사고 (또 후회하는) 나약한 인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잘 지키는 건 첫 번째뿐이다.

적어도, 발레에 관해서라면.


내가 2022년 4월 26일 화요일 저녁 7시 30분 미국 워싱턴 DC 위스콘신 애버뉴에 서있었던 까닭이다. 왼손엔 핏자국이 선명한 반창고가 덕지덕지.


서있던 곳은 미국 워싱턴발레단 연습실 앞이었고, 발레단의 정단원이자 전도유망한 댄서인 라파엘 벤자라노 발레리노가 진행하는 성인 취미 발레 클래스 시작이 코앞.

문을 열면서도 망설였다.

들어갈까? 말까?

결국, 들어갔다.

정답이었다.

발레단 연습실로 가는 복도. 마음이 콩콩 뛴다♡ by SJ

사정은 이랬다. 미국 출장이 급하게 정해졌다. 화요일 출발 비행기였는데 확정된 게 이틀 전인 일요일이었으니. 한국의 신임 대통령 취임과, 첫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워싱턴 DC의 분위기를 읽는 게 미션. 출장이 워낙 오랜만이기도 했고, 기내에서도 취재 준비를 하느라 신경이 곤두선 상태였다. 13시간 후 덜레스 국제공항에 착륙했을 때 나는 좀비에 가까웠다. 짐을 풀고 첫 목적지로 향하는데 아뿔싸, 돌부리에 걸려 제대로 넘어졌다.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창피하고 가장 아프게 넘어지는 방법”을 이미지로 만든다면 그 순간의 나일 것. 피가 콸콸. 엄마ㅠㅠ


유유히 반려견 산책을 즐기던 인상 좋은 동네 청년이 헐레벌떡 다가와 이렇게 자문자답.

“Are you okay? Oh no, you are not! 괜찮아? 어머 안 괜찮네!”

그의 안내로 인근 약국에 가는 데 솔직히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응급실 가야 하나. 미국은 병원 너무 비싼데 어쩌지. 조지 클루니 같은 의사 선생님 있으려나. 근데 파상풍 걸려서 왼손을 못 쓰게 되면 어쩌나. 릴케는 파상풍으로 죽었다던데 어쩌지 아직 더블 턴도 못 돌았는데 죽을 순 없어. 손가락은 안 다친 거 같으니 기사 마감은 할 수 있겠다, 다행이다. 근데 발레 바(barre)는 어떻게 잡지 등등.


워싱턴발레단 연습실에서도 예쁜 국립발레단 에코백, 유니버설발레단 굿즈 뱃지, Choi.s 슈즈와 스카프♡ by SJ


어느새 약국에 당도해, 새빨간 피를 보고 새파랗게 질린 알바의 도움으로 알코올을 들이붓고 (꺄아악) 거즈로 닦고 (으아악) 가장 강력하다고 쓰여있는 연고를 바른 뒤 (흐으윽) 반창고를 붙였다. 누가 소리만 들었으면 출산이 임박한 줄 알았을 수도ㅠ 직원분은 “You are strong!”이라고 토닥토닥 위로해줬지만 아프고 쪽팔리고 슬펐다. 그리곤 생각했다. 오늘 저녁 워싱턴발레 성인 취미 발레 클래스는 못 듣겠구나. 이 출장, 갈까 말까 할 때 그냥 가지 말았어야 하나보다.


하지만, 역시 가길 잘했다고, 그로부터 닷새가 지나 귀국 비행기에 탑승 중인 지금은 생각한다. 손은 여전히 아프다. 하지만 그래도 다행이다. 오른손이 아니라 왼손이라 덜 불편했고,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었으니 취재도 무사히 마쳤고, 이젠 한 손으로 머리 감는 것도 조금은 적응됐고, 하늘은 파랗고 세상은 아직 망하지 않았다. 감사한 일 아닌가,


물론 진짜 이유 중 하나는 이거. 인생의 첫 경험을 멋지게 해냈다는 것. 취미 발레인으로서의 로망. 해외 발레 클래스 원정이다.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나이에, 처음 해보는 일이 있다는 건 행복이다. 무섭기도 하지만.

서울이건 파리이건 모나코이건 ‘클래스(class)’라고 부르는 발레 수업 루틴은 어딜 가나 같다. 워싱턴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홀 밖 풍경. 저녁반인데 왜 환하냐구요? 사흘 뒤 점심 때 한 번 더 갔거든요, I am a balchigwangiㅋ by SJ


클래스에 조금 일찍 도착해 워밍업으로 몸을 풀어주고 있으면 선생님께서 들어오신다. 처음엔 바(barre)를 잡고 가장 기본인 플리에부터 탄듀 데가제 롱드잠 퐁뒤 프라페 아다지오 그랑바뜨망 등으로 이뤄진 바 워크를 한다. 기본 구조는 같다. 그러나 선생님마다 구성하는 동작 순서와 방향 등 디테일은 다르다.


바 워크를 마친 뒤엔 바를 치우고 센터에서 아다지오부터 일명 왈츠라고 부르는 발랑세를 넣은 턴 동작 및 스몰 점프에서 그랑(혹은 빅) 점프의 패턴이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선생님과 함께 클래스를 들은 메이트들에게 감사인사를 전하는 르베랑스(reverence).


클래스에서 또 중요한 것이 반주음악인데, 라파엘 선생님은 내 서울의 본진, 발레조아 김현우 원장님과 같은 음악을 쓰셔서 세상에나 마상에나 어찌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같은 음악 다른 구성이라는 점도 꽤나 흥미로웠다.


이날 들은 클래스 레벨은 “Beginner II”. 워싱턴발레단의 설명에 따르면 “발레를 과거에 배운 적이 있으나 중단한 이들이 위한 완벽한 클래스”였다. 나를 포함해 10명이 수업을 들었는데, 흥미로웠던 것은 연령대와 성별의 다양성. 머리에 실버 크라운을 쓴, 즉 연세가 있으신 여성분들도 2명이나 있었다. 프로를 지망하는 듯한 아우라의 20대 여성도 인상적이었다. 30~40대의 남성도 꽤나 열심이었다. 딱 보면 프로는 아닌데도, 발레를 운동으로 진지하게 임하는 그들에게 마음속으로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심지어 남자분들은 트리플 턴까지 클린하게 돌더라는! 박수를 치는 클래스 메이트들에게 이 취미리노님은 무대 위 발레리노처럼 인사를 해서 더 큰 박수. 라파엘 선생님도 “I love the drama there!”이라며 웃으며 박수를 쳐주셨다.


클래스 후엔 복기(復記)가 중요하다. 어떤 패턴으로 바워크와 센터를 구성하셨고, 내가 어떤 동작에서 어떤 이슈가 있었는지, 어떤 지적을 선생님께서 해주셨는지를 복습하는 것. 그렇지 않으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모래알처럼, 애써 받은 클래스의 보람이 사라질 수 있어서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그렇기에 발레조아 김현우 발레조아 원장님부터 호아나발레 박현경 선생님, 비너스발레 엄규성 원장님, BB발레 다영쌤 등, 클래스를 들으면 반드시! 발레 다이어리를 쓴다.

기내에서 쓴 호아나발레 다이어리. 빨리 부자되고프다. by SJ


이날 썼던 것 중 라파엘 선생님의 지적 몇 가지.

“여러분 인생 최대 높이의 를르베를 보여주세요(Show me your highest releve ever)!”

“팔꿈치를 신경 쓰세요(Articulate your elbows)!”

“발가락 끝까지 정확하게 쓰세요(Move your toes precisely)!”

“허벅지 안쪽으로 추는 겁니다(Dance with your inner thighs)!”

이밖에도 어깨를 내린다고 갈비뼈를 내미지 말 것, 계속 미소를 지을 것, 턴을 돌 때 무서워하지 말고 바로 돌 것, 내가 두려워하는 건 남에게도 다 보인다는 것 등등이 있었다.

서울의 소중한 선생님들께서 해주시는 말씀들과 표현 방법만 좀 달랐을 뿐, 같은 내용이었다.


이게 발레의 아름다움 중 하나다.

세계 어디를 가나 보편적이라는 것.

아름다움은 결국 인류 공통의 언어라는 것.

그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선, 매일 매 순간 묵묵히 열심히 수련을 쌓아나가는 수밖에 없다는 것.


내후년이면 100주년이라는 워너극장의 샹들리에. 이은원 발레리나의 이름이 짜자잔! by SJ


라파엘 선생님을 또 뵐 수 있었던 건 이틀 뒤, 워싱턴발레단의 ‘지젤’ 공연에서였다. 하늘이 보우하사 출장 기간에 ‘지젤’ 공연이, 그것도 존애하는 한국인 발레리나 이은원 워싱턴발레단 수석무용수가 ‘지젤’ 데뷔를 하는 무대가 있었다. 그 무대에 라파엘 선생님은 코르 드 발레(corps de ballet), 즉 군무로 출연하셨다. 발레단의 수준은 군무를 보면 알 수 있다. 라파엘 선생님의 군무는 완벽했다.


은원리나님 brava! By SJ


라파엘 선생님 클래스를 복기하며 가장 마음에 남는 인물은 그러나 죄송하지만, 선생님이 아니다. 발레메이트, 즉 취미발레인들이 줄여서 ‘발메’라고 부르는 분이다. 이름은 크리스티나. 내게 직접 밝힌 그분의 연세는 80세였다. 클래스가 끝나고 짐을 챙기면서, 용기를 내서 크리스티나에게 말을 붙여보았다. “멋지세요”라는 내게 크리스티나는 이렇게 얘기했다.


“내 나이가 80이에요. 무릎 수술도 했고. 그런데도 발레를 할 수 있다는 것, 이렇게 여러분들과 클래스를 들을 수 있다는 거가 어찌나 감사한지 몰라. 나는 여러분들처럼 턴을 돌거나 화려한 동작은 이제 무리예요. 하지만 발레 클래스를 하지 않으면 나는 아마 지금 휠체어를 타고 있을 걸? 조금이라도 내가 할 수 있는 동작을 열심히 하면서, 무엇보다 즐겁게 하는 거죠. 이 나이에도 발레를 할 수 있다니 진짜 좋아요. 수진도 100세까지 계속하세요.”


내 발메, 여든살 크리스티나♡.by SJ
기내식 너무 먹었다ㅠ 레이스 탑과 조거팬츠 모두 호아나발레, 레오 레브당스. 미국 발메들이 "나도 사고파"라고 호응이 대단했당, 뿌듯^-^ by SJ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 달콤한 거짓말인 줄 알면서 때론 값싼 위로를 위해 쓰여지는 말. 크리스티나를 보며 나는 느꼈다. 나이는 숫자 그 이상이다. 나이를 이기려고 하지 않고, 나이를 인정하며 그 대신 굴복하지는 않는 것. 나의 나이를 인정하고, 그 대신 몸과 마음을 돌보는 것. 나와 크리스티나의 경우엔 발레가 그 소중한 수단이라는 것. 나이와 싸우지 않고 나이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크리스티나에게 배웠다.


김현우 발레조아 원장님도 언젠가 우리 기초반 친구들에게 “여러분들이 꾸준히 계속 시간을 쌓아나가면, 몇십 년 후엔 시니어 발레리나가 되는 것”이라고 격려해주신 적이 있었다.

그 롤모델을 나는 워싱턴DC에서 만났다. 왼손은 아직 욱신거리지만, 가기를 정말로 잘했다. 갈까 말까 했을 때 갈 용기를 낸 자신도 조금은 칭찬해주고 싶다.


크리스티나는 오늘도 은빛 머리를 단정히 망으로 묶고 발레 바에 서 있겠지. 크리스티나의 “인생 최대 높이의 를르베”를 열렬히 응원한다.


By S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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