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세상만사 중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냈다는 것만으로도 기뻐 마땅하다. 하지만, 타고난 천재가 아닌 이상 좋아하는 것을 잘하려면 시간과 돈, 체력 등의 재화는 필수. 잘한다는 것은 곧 그 일로 돈을 벌고 명예를 얻으며 때론 권력까지 손에 넣는다는 것이니. 좋아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것이 위험하다는 말도 있지 않나. 소설가 김훈도 적었듯 모든 밥벌이는 결국, 지겨움이다.
이렇게나 거창하게 서두를 시작했지만, 하고픈 말은 그저 신세 한탄. 발레를 좋아하는데도 잘하지는 못하는 현실에 대한 푸념이다.
머릿속으론 분명 사뿐사뿐 파드부레 스텝을 밟았건만 거울에 비치는 건 엉거주춤 쿵쾅쿵쾅. 오늘만큼은 중력을 거슬러 점프를 뛰겠다고 다짐했건만, 맘과 달리 몸은 중력에 충실하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겐 믿음이 있다.
언제 될지는 모르지만 언젠가는 될 거다.
힘들어하는 힘도 아껴,지금 이 시간 롸잇나우 연습에 충실하자.
이 근거 없는 믿음의 기원을 생각해봤더니, 열 살 무렵 추운 겨울 내 방 이불속이 떠올랐다. 당시 나는 지금 발레에 빠져있는 것처럼 영어에 푹 빠져 있었다. 엄마가 틀어놓은 주한미군방송, 일명 AFKN (옛날 사람 인증ㅋ)에서 나오는 영어라는 말이 그냥 너무, 예뻤다. 엄마가 좋았던 나로선 엄마가 좋아하는 건 다 따라 하고 싶었던 것도 있겠다. 여기까지 적고 보니 엄마의 영어교육 빅 픽쳐 아니었나, 라는 생각도 들지만, 어쨌든.
책도 영어로 어찌어찌 썼다. 지인들에게 보냈던 북 파티 초대장. By SJ
옛날 사람이라면 다 아는 성문 영어 시리즈도 각별.
엄마 손 잡고 간 교보문고에서 사 오던 날. 문법은 둘째치고 발음부터 막혔던 기억이 생생하다.
좋아하는 걸 잘하는 건 쉽지 않다는 것을 나는 열 살의 그날 밤 체득했다. 테이프로 들을 때는 마냥 예쁘고 나도 바로 저렇게 발음이 예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내가 직접 소리를 내보니 이건 영, 아니올시다 였던 것.
특히 발음이 어려웠던 단어가, student 였다.
요즘 아이들이라면 뱃속에서부터 다 알고 나올 그 단어. VOCA 2만2000에서 다루지도 않는 기초 오브 더 기초.
발레로 따지면 플리에도 아니고 아마 1번 포지션 정도 아닐까 싶은.
그런데 어린 마음에도 딱 봐도 쉬워 보이는 이 단어를
내 마음에 들게 발음하는 게 세상 어려웠다. 한 음절에 음가를 동일하게 넣어 발음하는 모국어, 한국어와 달리 영어는 노래하는 것 같았다. 스-튜-던-트가 아니라, 스튜우더언트, 처럼 리듬을 타야 했다.
못하는 와중에도 재미있었다.
계속 중얼거렸다. 최적의 연습 장소는 바로,
이불속.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리 내 단어를 발음해보면 공명 효과 때문에 더 잘 들렸다. 어느 순간, 내 발음이 내 마음에도 들기 시작했다. 더 신이 났다. 좋아하는 것을 잘한다는 것은 어린 나이에도 희열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게 해 줬다.
원어민 선생님을 처음 만난 건 외국어 고등학교(순전히 외국어 교육이 제일 중요한 곳인 줄 오해하고 들어갔다ㅋ).
선생님께서 “미국 어디에서 영어를 배웠니?”라고 물어보셨을 때, 뛸 듯이 기뻤다. 분명 선생님의 말씀은 하얀 거짓말에 가까웠을 터. 그래도 용기를 북돋워주기 위한 선생님의 친절한 마음이 새삼 감사하다.
일명 ‘토종’이면서 영어를 잘 구사하는 건 쉽지 않았다. 우선 성문 기초영어와 기본영어를 통째로 외웠다. 종합영어는 모든 구문을 일일이 손으로 번역했다. 영어사전은 찾고 싶은 단어가 있으면 바로 한 번에 그 페이지를 펼칠 수 있을 정도로 손에 익었을 정도.
내 보물s. 영한사전은 통탄스럽게도 분실ㅠㅠ By SJ
물론 시간은 공평하다. 영어 공부를 하느라 수학을 못했고, 못하니 더 하기 싫어서 더 못하게 되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나는 과연 부족한 인간인 것. 좋게 표현하자면 하는 것을 더 파고드는 근성이 있고, 사실대로 표현하자면 하고 싶은 것만 파고드는 편협의 노예.
하늘이 보우하사 입시를 잘 마치고 대학교에 영어 전공으로 입학한 뒤, 제일 먼저 학교 영어신문에 들어갔다. 나름 입학시험도 쳤는데, 첫 문제가 신문 제호인 the Granite Tower의 뜻을 쓰는 거였던 게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렇게 만난 우리 신문, 줄여서 GT의 34대 1기 동기 녀석들과는 전생에 남매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아직도 막역.
졸업 후에도 취업난을 뚫고 영어신문에 하늘이 (또) 보우하사 입사했다.
한국어 신문으로 넘어온 것도 영어를 잘하는 기자가 필요했기에 가능했던 우연이자 행운
최근엔 북한을 취재했던 경험을 살려 영어로 책도 냈다.
결국 영어로 나의 인생은 풍요로워지고 깊이를 더할 수 있었다.
영어를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는 분들이 계신다. 답은 간단하다.
잘 말하려면 잘 들어야 하고,
잘 쓰려면 잘 읽어야 한다.
하지만 이게 전부는 아니다. 석 달 안에 영어회화 달인이 되는 방법은 없다. 모든 공부가 그렇듯 지치는 순간이 온다. 그때를 위해 좋아하는 것을 계속 좋아할 수 있는 밑천을 만들어놓는 것도 중요. 지치지 않고 계속하는 것이 중요하다. 공부에서도 지속가능성이 핵심이다.
좋아하는 것을 계속 좋아하는 것도 능력이다.
발레는 그러고 보면 참, 영어와 닮았다.
잘 되지 않아도, 탁월하지 않은 자신을 잘 직시하고 견디며 개선하려는 노력을 꾸준히 우직하게 계속하다 보면 어느 순간 조금씩 나아져 있다.
북 파티 열기 5분 전 @커피초이스 in 광화문. 잊지 못할 장면. By SJ
호아나발레 박현경 선생님께 이번 달 배우는 작품, ‘고집쟁이 딸’ 2막의 리즈 배리에이션. 처음의 파드부레 스텝이 영상으론 쉬워 보였는데 막상 해보니 거울 속 나는 몸 개그 중. 내 맘과는 달리 움직이는 내 발에 헛웃음.
두 번째 시간엔 줴떼, 발을 쭉 뻗으며 점프하는 기본 오브 더 기본 동작이 제대로 안 되어 선생님 고운 목청을 상하게 하는 사태까지. 어느 순간, "아 몰라, 오늘은 그냥 여기까지 할래, 어차피 안 될 거 같아" 싶었다.
그 순간 선생님 말씀, 여전히 뇌리에 생생.
“스스로와 타협을 하면 안 됩니다. 스텝 하나하나 정확하게 짚어야 해요. 스텝을 대충 하면, 작품도 대충 됩니다.”
명언. 영어도 마찬가지.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흔히 밟는 스텝. https://youtu.be/gEFjFVDLt20 캡쳐
본진 발레조아 선생님들도 항상 강조하시는 말씀.
경험을 해보고
계속해보고
또 해보고
즐기며 하면
어느새 성장한다.
단, 발레라는 건 계단 같아서, 정체기가 반드시 온다.
그때 지치지 말고 즐기면서 꾸준히 하면 어느 순간 다음 계단에 올라가 있을 것이다.
할렐루야.
발레라는 언어를 새로이 만나 맞는 첫여름.
2022년 지금, 좋아하는 것을 잘하기 위해 땀을 흘릴 수 있어서 좋다.
마을버스 정류장에서도 지하철 플랫폼에서도 파드부레 스텝을 밟아본다. 이웃 승객이 슬슬 피해도, 어쩔 수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