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多情)도 병이라지만, 열심도 병일 수 있다. 고려시대 문인 이조년(1269~1343)은 "배꽃에 달이 밝게 비치고 은하수가 흐르는 깊은 밤에 (중략) 정이 넘치는 것도 병인 듯하여 잠 못 들어하노라"라고 봄을 읊었다. 21세기하고도 23년의 가을, 서울의 한 발레학원에서 나는 생각한다. 뜨거운 마음이 넘치는 것, 즉 열심(熱心)도 병인 듯하여 내 어깨는 이리도 뻣뻣하구나.
열심히 해보니 알겠다. 열심히만 한다고 잘할 수 없는 게 발레다. 그간 난 열심히 하는 걸 잘하는 게 아니었을까. 열심인 자신의 모습에 취해서 나침반을 깜빡한 건 아닐까.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인 것을. 방향을 잃은 열심이 때론 독이 되는 이유다. 물론 열심히 하다 보면 작지만 확실한 성장을 이룬다. 지난해 촬영했던 연습 영상 속 나의 발랑세 왈츠 스텝과 오늘의 같은 동작은 확실히 나아져 있다. 그러나 과연 그리 되기에 1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을까. 성장의 속도는 더 빨라질 수 있다.
잘하지 못하는 상태에선 열심히 하는 것에서 보람을 찾게 된다. 곧 열심히 하는 것 자체에 열심인 상태에 만족하는 타협점을 찾게 된다. 열심의 밀도를 꾹꾹 눌러 쌓아 가며, 그 과정을 견디면 언젠가는 자연스레 발레다운 발레를 하게 되리라고, 믿게 된다. 이 막연한 믿음은 위험하다. 시간이 지나도 믿음은 이뤄지지 않는데, 그러면 배신감과 분노, 포기로 이어질 수 있으므로. 이른바 '발태기(발레 권태기)'의 늪에 빠지는 셈. 믿음을 배신한 건 방향을 잃은 나의 열심일 뿐, 발레의 죄가 아니거늘.
발레 공연 보러가던 길 마주친 안내판. 발레 여정에선 마주치지 맙시다. By Sujiney
물론, 열심히 하지 않으면 잘할 수 없다. 발레는 인간이 인간만의 힘으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예술이다. 중력을 거슬러 날고 돌고 뛰는 게 쉬울 턱이 없지. 그런데 잘하려는 마음이 앞서고, 무턱대고 열심히만 해선 외려 몸이 굳는다. 불필요한 힘이 들어가서다. 어깨에 힘을 빼야 잘 돌아가는 건 인생뿐 아니라 발레도 마찬가지.
용기 내어 듣기 시작한 중급반의 발레선배님들을 보며 확실히 깨달았다. 잘하는 분들에겐 강-약-중간-약의 악센트와, 강함과 부드러움의 조화가 있다. 힘을 줘야 할 때는 확실히 힘을 발산하고, 힘을 빼야 하는 곳에선 세상 부드럽다. 무엇보다, 불필요하게 끙끙대고 낑낑대지 않는다. 최선을 다하는데도 쉽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열심히 하면서도 잘하는 것의 정석은 이런 거구나, 싶다. 내가 해온 열심의 방향을 재조정할 필요성을 깨달았다. 감사하고 행복하다.
고마운 친구들. 내일도 잘 부탁해. By Sujiney
돌이켜보면, 선생님들은 계속해서 내게 같은 메시지를 다른 방식으로 주고 계셨다. 밸런스를 잡느라 어깨로 낑낑대던 내게 최시몬 선생님은 "어깨가 없다고 생각하세요"라고, 발레조아 김현우 원장님은 "어깨에 힘이 너무 들어가 있어, 편하게 그냥 즐겨, 너무 열심히 잘하겠다고 생각하지 말고"라고 해주셨다. 발레조아 조성은 선생님도 "어느 정도 시간이 됐는데도 나아지지 않는다면 방향이 잘못된 것"이라는 명언을 해주셨고, 정훈일 선생님도 "예쁘게 춰야 할 땐 세게 추고, 세게 춰야 할 땐 예쁘게 추면 안 돼요"라고 재미있게 풀어서 설명해 주셨다.
알고 보니, 보인다. 연습 영상을 복습해 보니 한껏 올라가 있는 나의 상부승모근.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다. AI에게 '낑낑대는 취미 발레인' 이미지를 찾아보라고 하면 나의 사진을 보여주지 않을까.
부끄럽지만, 어깨에 이렇게 힘이 들어간 것도 몰랐다. 힘을 많이 뺐다고 생각했다. 인생의 우선순위를 조정하고, 매일의 발레 레슨을 빠지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체득하겠지라고 넘겨짚었다. 이제 깨닫는다. 열심의 총량을 늘린다는 것만으로 잘하게 되지는 않는다는 것. 양보다 질. 레슨을 몇 번 듣는지도 중요하지만, 레슨에서의 부족한 포인트를 잘 생각하고, 선생님의 강조점을 맘에 되새기고 몸에 새기는 게 중요하다.
발레 학원 근처 맛집. 맞슙니다. By Sujiney
올해 여행사 광고에서 나온 말, "사랑하는 만큼 사랑받고 싶어, 여행에게"를 보면서 이렇게 생각했더랬다. 사랑하는 만큼 사랑받고 싶어, 발레에게. 이젠 알겠다. 내가 해온 열심은, 발레가 바라는 열심이 아니었음을. 최시몬 선생님은 최근 "발레라는 게 쓸데없이 정교한 면이 있다"고도하셨는데, 이 말인즉슨 정교한 절차를 잘 습득해서 그대로 하면 더블턴, 트리플턴도 가능하다는 얘기다. 발레의 정교함을 무시하고 열심으로 덮으려만 한다면 싱글턴도 운에 맡길 수밖에. 조성은 선생님이 안타깝게 말씀하시는 "로또 턴" "로또 밸런스"에 일희일비하게 되는 것.
그럼에도 내일부터 당장 어깨에 바로 힘을 빼지는 못할 것 같다. 발레 선배님들처럼 부드러운 폴드브라와 짱짱한 점프를 바로 내일부터 할 수는 없는 노릇. 발레 선배님들도 나름의 과정을 다 거치고 여러 번의 자성과 궤도 수정을 거치지 않았을까. 원래 몸치에다 방향치이기까지 한 내가 여기까지 왔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생각하기로 한다. 계속 열심히는 하되, 이젠 현명하게 열심히 해보기로 맘을 먹는다. 용을 쓰지 말고, 몸을 쓰는 게 열쇠. 발레도 인생도, 너무 잘하려고 하다 보면 무리하고, 무리하면 못하게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