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조아 조성은 선생님의 쿨하디 쿨한 이 말씀에 나는 무너지고 말았다. 웃겨서. 바를 부여잡고 웃다가 왠지 모르게 슬퍼졌지만. 대체 내 밸런스는 발레에서도 인생에서도 요원하기만 한 신기루인 것인가.
발레는 균형, 즉 밸런스의 예술이다. 돌고 뛰기 위해서 기본 탑재돼야 하는 건 몸의 밸런스. 내 170cm 몸뚱이와 지구 표면이 맞닿은 발바닥 면적의 최대 길이는 약 15cm. 그렇게 밸런스를 잡고 서서 중심을 잡고 돌고 뛰어야 한다.
그나마 바(barre)가 있는 바워크는 잡을 거라도 있지. 센터워크는 오롯이 나만의 밸런스로 버틴다. 약 100분간 몸뿐 아니라 맘의 코어 역시 풀가동해야 하는 게, 그래서 어렵지만 의미 가득한 시간이 발레 클래스다.
밸런스를 위해서 중요한 건? 우린 이미 답을 안다.
코어, 코어 & 코어.
코어 근육이 없는데 잡히는 밸런스는 운이다. 발레 선생님들은 서울에서도, 러시아에서도, 싱가포르에서도 입을 모아 말씀하신다. "발레는 운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Ballet is never luck!"
"밸런스 기우제 지내지 마세요."
발레 자세의 기본. 이 모든 것의 기본이 코어이거늘. 본진 발레조아에서 찍은 사진. by Sujiney
코어 단련의 중요성. 척주(脊柱)기립근(起立筋, '세움근'이라고 한다고 네이버가 가르쳐줬다)과 광배근(넓은등근)과 장요근(고관절 굽힘근), etc. 발레 광복 후엔 거의 매일 듣는 용어들이다. 선생님들은 마르고 닳도록 설명하신다.
있는 듯 없는 듯 살아가던 나의 광배근과 기립근, 장요근에겐 청천벽력과 같았을 거다. 평온한 나날을 보내다 갑자기 근육을 쓰겠다고 아등바등거리니 적잖이 당황했을 것. 타고난 몸치인 데다, 뻣뻣함을 삶의 디폴트로 여기던 나였으니 말해 뭐 해.
그래서 혼자 코어근육을 단련해 보겠다고 아침마다 루틴을 짰다. 파리 출장을 가서도 호텔방에서 매일 레그 레이즈 운동부터 양다리를 교차시키는 앙트르샤 운동 등등. 그래서, 코어의 달인이 됐냐고? 인생이 그리 쉬운가.
처음엔 아팠다. 처음엔 허리, 다음엔 목이. 다음엔 승모근만 백두산이 됐다. 모든 일엔 이유가 있다. Everything happens for a reason. 내 코어운동 방법이 잘못됐던 것. 선생님들께 다시 여쭤보고, 제대로 시작한 뒤, 조금이나마 복근이 잡혀가고 있다. 프로미나드(promenade, 선채로 다리를 들어 한 바퀴 도는 것)를 할 때도 광배근을 조금씩 느낀다. 갈길은 아직 멀고도 멀었지만.
김기민 무용수와 열연 중인 테레쉬키나 무용수의 저 아름다운 등근육이여. 김기민 팬 인스타, kimkimin_fans 캡쳐
코어 단련은 프로 무용수들 역시 빼먹지 않는다. 사랑하는 여름선생님과 연주선생님도, 발레조아 김현우 원장님도, 클래스 때마다 같이 코어 단련 운동을 하셨고, 하시며, 하실 것이다. 여름선생님의 코어 훈련 클래스는 명불허전이었더랬지.
러시아를 대표하는 한국인 발레리노, 김기민 마린스키 수석무용수를 지난해 8월 인터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침마다 코어 루틴을 짜서 매일 새벽마다 해요. 올해 서른인데, 마흔을 전성기로 만들고 싶거든요. 공짜는 없어요. 매일 운동을 거르지 않아요. 전날 아무리 힘들었어도, 아무리 늦게 잤어도, 다음날 새벽 정해진 시간에 일어납니다."
이 인터뷰 다음날부터 나도 시작해 보았다. 코어 루틴. 나름 매일 거르지 않고 있지만 솔직히 쉽진 않다. 그래도 인터뷰 1주년 되는 올해 여름엔 좀 더 나아져 있을 거란 희망.
재미있는 건 몸의 코어가 잡히니 마음의 코어도 인식하게 됐다는 점. 루틴은 힘이 세다. 아침마다 발레 코어 운동 루틴을 하면 나 자신에게만 온전히 정신을 집중하게 된다. 몸의 장요근과 기립근, 광배근을 깨우면서 마음의 코어 근육도 함께 다지는 기분.
발레의 잔인한 아름다움. 인스타 캡쳐
인생은 수행이다. 인생은 아름다워, 라는 말은 영화 제목일 뿐. 인생이 얼마나 아름답지 않으면 (실제로 그 영화 속 유대인 수용소의 삶은 끔찍했다) 아름답다고 말을 해줘야 알까.
살아가는 건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고, 다치고 낫는 일의 반복이다. 잘은 몰라도 빌 게이츠도, 이재용 회장도 나름의 힘듦이 있을 터다. 좋기만 하고 나쁘기만 한 일이며 사람, 그런 건 없지 않을까. 나부터도 그렇듯이.
그래서 생각한다. 남에게 다치고, 남을 다치게 하고 마는 내 마음의 약함은 결국, 마음의 코어가 약한 결과 아닐까. 마음의 광배근을 키워야겠다. 마음의 기립근을 다지고, 마음의 장요근을 부드럽게 해야겠다.
지난 5년 간 나는 인생 최대의 실패를 겪어왔다. 마지막일 줄 알았던 존재, 그래서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생활이 무너졌다. 발레 광복을 맞기 전엔 주 7일 와인을 마셨고 일을 하며 삶을 버텼다. 그래도, 죽으란 법은 없나 보다. 그 밸런스의 폐허에 발레의 밸런스가 찾아와 줬으니.
다음 달 초, 내 인생 폐허의 잔재를 씻어낼 결정이 나온다. 그 결정을 위한 발걸음을 주저했던 4년 간의 내가 바보 같을 정도로, 일사천리로. 소설가 김금희의 근작 '크리스마스 타일' 중 '데이, 이브닝, 나이트'의 다음 구절이 딱 내 마음. "사람들이 여기 오는 데도 나름의 힘이 필요하다? 용기가 없으면 올 수가 없어. 수치심을 이기고 여기로 오는 거야. 다르게 살고 싶어서."
그 용기를 내는 데는, 마음의 코어가 꽤나 필요했다. 김기민 무용수 덕에 시작한 발레 루틴을 매일 한 지 약 100일째, "이젠 됐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고, 전화기로 도움을 요청했으니.
이 세상 나 혼자 힘든 것처럼 썼지만, 그래도 나는 행복하다. 살아있으니까. 지난해 존경하던 선배가 폐암에 코로나19 합병증으로 돌아가셨다. 워낙 일밖에 모르던 분. 산업부 취재를 맡았던 선배는, 병원 침대에서도 후배들에게 메시지로 기사 방향을 지시했다고 한다. 그 선배가 끔찍이 싫어했던 게 오타. 그런데 그 메시지는 오타투성이었다고 한다. 핸드폰 자판을 누를 힘조차 없었기에.
세상에서 제일 먹기 싫었던 선배의 장례식 육개장. 장례식장은 최신 유행인지 뭔지, 선배가 생전에 남겼다는 여러 사진과 영상을 계속 틀어줬다.
"사는 거, 지겹지? 그래도 사는 게 행복이야, 임마." 선배는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그래서 나는 내일도, 모레도, 100일 후에도 계속 몸과 마음의 코어 근육 단련 루틴을 해나갈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