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30일, 발레 프로필 사진 촬영을 앞두고 용기를 짜내서 꺼낸 말. 내용으로 보자면 위풍도 당당히 말했어야 하지만, 정작 나는 쭈뼛쭈뼛 머뭇머뭇. 발레 프로필계 '마법의 손', 무려 윤식스포토 작가님 앞이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 말에 어폐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뻐 보이고 싶지 않"다는 말이란, 예뻐 보일 능력을 갖추고 있지만 예쁨을 선택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못'하는 게 아니라 '안'하는 것. 그러나 2023년 봄 현재 내 실력으론 예쁨은 선택 아닌 끊임없는 갈구의 대상이다. 발레의 신은 공평하게 잔인하다. 상상 이상의 에너지와 재능, 끈기를 쏟아붓지 않으면 아름다움을 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체념하고 포기하면 퇴화할 뿐.
선생님들이 "되는 만큼만 하지 말고 그 이상을 하세요"(정훈일 선생님) "굳은 의지를 갖고, 스스로와 타협하지 마세요"(최시몬 선생님) "될까 안 될까 고민 말고 일단 힘껏 해보세요"(박정빈 선생님)라고 되풀이해서 말씀하시는 까닭.
예쁠 자신도 없는데 굳이 사진을 찍겠다고 작정한 데는 이유가 나름 있다. 전날인 4월 29일이 본진 발레조아의 21주년 기념 공연이기도 했거니와, 공연 전날인 4월 28일, 인생이 새로운 길모퉁이를 돌았기 때문이다. 끝날 것 같지 않았던 인생의 겨울이 끝나고 바야흐로 맞이한 새 계절.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마음의 정리도, 지켜야 하는 것에 대한 각오도 굳혀야 하는 시점이다. 새로 맞이한 계절을 시작하는 현재를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는 형태로 남기고 싶었다.
작가님 감사합니다♡ By Yoon6Photo 김윤식 작가님
마침 출간된, 손꼽아 기다렸던 권여선 작가의 신간, 『각각의 계절』초판과 함께 온 엽서엔 이런 말. "살면서 보니, 어느 시절을 살아내게 해 준 힘이 다음 시절을 살아낼 힘으로 자연스레 연결되지 않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다음 시절을 나려면 그전에 키웠던 힘을 줄이거나 심지어 없애거나 다른 힘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걸 느꼈습니다. (중략) 독자 여러분도 새로운 계절에 맞는 새로운 힘을 길어내시길 바랍니다."
꾹꾹 눌러 필사해 본다. "새로운 계절에 맞는 새로운 힘을 길어내시길." 길'러'가 아닌, 길'어'낸다는 단어를 택한 것도 사무치게 좋다. 역시, 권여선.
권여선 작가님과 소주 한 잔 하는 게 꿈.
나의 새로운 계절에 맞는 새로운 힘은 어떤 걸까. 틀릴 수도 있겠지만, 조심스레 '중심을 잡고 중심을 옮기는 힘'이 아닐까 생각한다. 최시몬 선생님은 매 시간 강조하신다. "발레는 결국 중심 싸움입니다. 중심을 잡고, 중심을 옮기는 두 가지가 포인트예요." '발레'를 '인생'으로 바꿔도 무방하지 않을까. 인생도 결국 중심을 찾고, 잡고, 지키고, 옮기는 게 중요하다.
발레 바. 교토 미야시타 발레학원에서. By Sujiney
인생의 지난 계절, 나는 중심을 잃으면 큰일 난다고 생각했다. 중심은 잡고 버티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버티는 데는 자신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중심을 지키면 된다고 굳게 믿었다. 그 중심이 틀렸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얄궂게도 발레 클래스 때도 그랬다.
그랑플리에도, 센터워크도 없었던 첫 학원에서 들었던 잘못된 습관 중 하나가 바(barre)에 과도하게 의지하는 거였다. 내 몸으로 축을 세운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바에 의지를 넘어 의존하며 중심을 잡았다. 바와 하나가 되다시피. 그러다 보니 바가 없어지면 큰일 나는 줄 알았다.
최시몬 선생님이 지난 시간, 를르베 파세업 밸런스를 잡게 하시더니 갑자기 바를 치우셨을 때, 깜짝 놀랐다. 바를 잃은 나는 스스로가 당연히 무너질 줄 알았다. 그런데, 더 서있을 수 있었다! 유레카.
능력자 발메님 일명 King님의 최시몬 선생님 굿즈 티셔츠! [출처 및 저작권 인스타그램 @balchigwang2]
최시몬 선생님은 이어 "중심을 바와 다리 두 개로 쓰다 보면 바에 과도하게 의지하게 된다"며 "바에 의지하지 말라"는 복음을 전하심.
정훈일 선생님도 "바랑 연애하지 마세요"라고 항상 말씀하시고, 사랑하는 연주 선생님 여름 선생님도 항상 "바에서 손을 놓는 연습을 하세요"라고 하셨지.
인생의 새 계절. 내겐 이제 바(barre)가 없다. 독야청청. 외롭지만 괴롭진 않다. 이제 나 혼자 중심을 잡고, 인생이라는 클래스에서 센터워크를 할 차례.
믿을 건 내 축다리뿐. 중심을 부여잡고 있는 게 아니라, 중심을 찾고 잡고 옮길 줄도 있는 것. 중심을 옮기려면 중심을 잃기도 해야 한다. 넘어지기도 하겠지. 다시 일어나면 된다. 발레조아 김현우 원장님이 누누이 강조하시듯,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까.
다시 일어날 각오를 다지고, 발레 클래스에서도 인생에서도 중심을 새로이 다진다.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니다. 김윤식 작가님이 실물보다 월등히 훌륭히 촬영해 주신 근육과 뼈로 이루어진 내 몸은 내 맘의 파트너. 바닥을 친구 삼아 바닥을 단단히 딛고 내 몸과 맘을 단련해 나가자. 촌스럽게 과도하게 비장한 톤이 되어버려서 민망하지만, 그래도 하고픈 말은 이거. 당장의 실력은 예쁘지 않지만 그래도 꾸준히, 탁월하지 않은 자신을 견디고, 어제보다 조금 나은 오늘을 즐기고 내일을 기대하자는 거.
그렇게 내 인생의 새 계절을 날 힘을 길어내 본다. 그럼 실력도 예뻐지는 날도 어느새 찾아올 거다.
실력이 예쁜 건 이런 것. 다다다다음 생엔 꼭! 사진 출처 인스타그램 김기민 마린스키 발레단 수석무용수 팬페이지 @kimink8m_fans
작가 공지영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에 영감을 줬다는 불교 경전 숫타니파타(Suttanipata)의 구절로 마무리(자료 출처: 한국현대문학대사전).
"남들이 원치 않는 독립과 자유를 찾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그대가 현명하고 일에 협조하고 예절 바르고 지혜로운 동반자를 얻는다면 어떠한 난관도 극복하리니, 기쁜 마음으로 생각을 가다듬고 그와 함께 가라. 그러나 그런 동반자를 얻지 못했거든, 마치 왕이 정복했던 나라를 버리고 가듯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흙탕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