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도리하고싶어요
엄마의 환갑을 앞두고 제대로 된 선물을 살 돈이 없다. 젠장. 나와 달리 성공한 커리어우먼(aka 자영업으로 건물주된 여자)인 엄마는 자신의 환갑을 기념하여 온 가족의 하와이 여행 경비를 쿨하게 자신이 모두 쏘겠다고 한다. 나는 나보다 부자인 엄마가 그러겠다니 굳이 말리지 않는다. 솔직히 '하와이라니..!!' 엄마 마음이 변할까 각서라도 받아둘까 싶다.
근데 속상하다.
시간이 갈수록 창피하고 속이 상한다. 부모들 삶의 낙은 자식자랑이라는데 나는 낙이 될 수 없을 거 같다. 한때는 고액과외없이 명문대에 합격했고, 대한민국 사람들이 다 아는 직장에서 들으면 다 아는 프로그램을 만든다고 자랑도 하셨을게다. 하지만 십년 넘게 직장생활을 한 딸은 한번도 제대로 용돈을 갖다 준 적 없고, 가라는 시집은 안 가고 보수센터 이름 비슷한 듣보잡(엄빠기준) 청소년 센터로 이직을 했다. 나는 비교적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엄마 친구들에겐 전달할 방법이 없을게다. 사춘기 언저리부터 방문을 걸어잠갔던 딸은 자기 인생의 중요한 결정이나 고민을 엄빠와 상의하지 않았다. 그런 딸이 부모는 대견하면서도 불안했겠지만 성격이 지랄맞은 딸년이라 티를 낼 수도 없었을 게다. 나이를 먹을수록 자랑거리는 커녕 남부끄런 존재가 되는 듯한 그 딸은 요즘 어떻게든 효도를 하고싶다는 것도 아마 그들은 알지 못할 것이다.
타고난 효녀는 아니지만 언제부턴가 난 엄마 생각을 하면 마음이 짠하다. 엄마는 지금의 나보다 어린 나이에 연애하던 남자와 애를 가졌다. 낳아준 부모 대신 뱃속의 아이를 선택한 어린 부부는 가족에게 버림받았고 가난했다. 하지만 그 사정을 알리 없는 뱃속의 아이는 남다른 머리크기로 제왕절개를 해야만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어린 아빠는 수술비를 구하기 위해, 부모를 다시 찾았고, 그렇게 나의 탯줄이 끊어진 날, 나의 부모는 그들의 부모와 끊어진 인연을 다시 이었다. 그리고 남다른 머리 사이즈로 세상에 태어난 어린 딸을 먹여살리기 위해 엄마는 역시나 지금의 나보다 어린 나이에 딸을 들쳐업고 밥 장사를 시작했다.
사회생활이란 걸 시작한 뒤로 외롭고 서러운 순간이 많았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가면을 쓴 듯 속내를 알 수 없었고, 그게 어른스러운 거라 했다. 투명한 유리병처럼 살고팠던 나는 그런 어른들의 세계에서 자주 깨지고 터졌는데, 너무 치이고 까여서 아픈 날은, 이 세계에서 사라지고 싶단 충동을 억누르며, 나의 시작점, 엄마품으로 숨었다. 그럼 엄마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따순밥상을 차려 내놓았고, 난 그 밥상을 아기새처럼 받아먹은 뒤, 다시 세상으로 기어나올 수 있었다.
한참 뒤에야 알았다. 엄마의 어린시절엔 나처럼 응석부릴 수 있는 엄마가 없었다는 걸.. 내가 겪은 시련의 몇 곱을 이겨내고도 내 작은 상처에 마음 아파 우는 가엾고 고마운 사람. 그런 엄마의 예순번째 생일이 다가온다. 그럴듯하게, 누구보다 근사하게 축하해주고 싶은데...
뭘하든 싸우겠지.
엄마와 나는 싸울 게 뻔하다. 스무살 무렵부터 자취를 시작하면서 그나마 붙어있는 시간이 줄었기에 망정이지, 엄마와 나는 함께 살았다면, 둘 다 입원했을 거다. 나는 줘터져서, 엄마는 혈압 터져서. 한달에 한두번 만나는 요즘도 재회의 애틋함이 24시간을 채 넘기질 못하는데, 우리가 뭔가를 함께 해보겠다고 붙어지내면, 하아... 아마 나는 토해지듯 엄마집에서 튕겨나오고 싶을 거고, 엄마는 나 모르게 소리죽여 우시겠지. 언제부터 내가 효녀였냐, 살던대로 살자 포기하고 싶을 거다. 하지만 그때마다 생각해야지. 엄마도 나를 키우면서 수백번은 그랬다는 걸. 지우고 싶고 포기하고 싶은 날들의 연속이었겠지만, 그 모든 순간을 버텨낸 엄마, 엄마의 그런 시간이 모여 오늘이 내가 살 수 있음을... 그러니 뭐라도 해보자.
언젠가 엄마와 싸우고 싶어도 싸울 수가 없는 날, 늘 내 편이었던 엄마가 이 세상에 없는, 상상하기도 싫은 어느 날, 마음껏 펼쳐보면서 그리워할 '시간'을, '기억'을 만들어보자. 그래, 내가 돈이 없지, 마음이 없나. 시작하자. 자식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