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의 쌈장, 오늘의 기억

by 별빛수

동네 가까운 곳에서 우렁쌈장을 파는 식당을 우연히 발견했다. 어린이도서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조금만 걸으면 닿는 거리였다. 아무 기대 없이 들렀다가 좋은 집을 만나는 일은, 인생의 작은 기쁨 중 하나다. 그날 나는 그런 기쁨을 누렸다.


한때 무척 좋아하던 ‘무영쌈밥’이라는 식당이 있었다. 깔끔하고 정갈한 맛, 쌈 채소의 신선함, 담백한 쌈장과 곁들이 반찬들까지 하나하나가 기억 속에 아로새겨져 있다. 그 식당은 프랜차이즈로 번지며 인기를 얻었지만,
어느 순간 하나둘씩 사라졌다. 그 자취가 아쉬워 잊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발견한 식당이 그 시절의 아련한 감정을 다시 불러왔다.


그 집 쌈장은 특별했다. 여러 가지 씨앗을 듬뿍 넣어 만든 고소한 쌈장은 짜지도, 싱겁지도 않았다. 한 숟갈 퍼내 쌈에 얹고, 오리고기를 올려 입에 가득 넣는 순간, 그 맛이 전하는 위로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추가 요금을 받지 않는다는 점도 인상 깊었다. 아낌없이 내주는 마음이 음식에도 배어 있었다.


‘맛’이란 신기한 것이다. 그것은 단지 입만의 기억이 아니다. 몸이 기억하고, 마음이 기억한다. 어떤 맛은 사람의 얼굴을 떠오르게 하고, 어떤 맛은 잊고 있던 시절의 나를 불러온다. 기대하는 마음으로 고기를 굽고, 쌈장과 채소를 조심스레 얹어 한 입에 넣으면, 입안에 퍼지는 맛보다도 그 순간에 나를 덮친 감정에 탄복한다.


우렁은 생각보다 크고 탐스러웠지만, 몇 개 보이지 않아 약간 아쉽기도 했다. ‘우렁강된장’이라는 이름으로 추가 주문이 가능했고, 그 가격은 오천 원이었다. 곁들여 나온 반찬들도 정갈하고 깊은 맛이 있었다. 그 집의 식탁에는 한 끼 식사를 넘어서는 정성과 품위가 깃들어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 남편이 익숙한 질문을 던졌다.

“여긴 또 오고 싶어, 안 오고 싶어?”

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당근이지. 또 오고 싶은 집이야.”


그 순간 문득 깨달았다. 무영쌈밥을 즐기던 시절도 벌써 2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을. 그 말인즉,
그만큼의 세월이 나를 지나갔다는 뜻이었다. 세월은 거창하게 흐르지 않는다. 어떤 날은 국 한 그릇, 쌈 하나에 담겨 소리 없이 사라진다.


이서원 교수는 “오십, 나는 재미있게 살기로 했다”라는 책에서 “재미있게 살겠다는 것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나의 답이다”라고 썼다. 그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징소리가 나며 머릿속이 울림을 느꼈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먹고, 마시고, 걷고, 버틴다. 그 모든 행위가 살아 있음의 증거이며, 어떤 날의 식사는 삶의 기쁨이자 태도이기도 하다. 음식은 사람과 같다. 누군가는 쉽게 잊히고, 누군가는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맛있는 음식을 만나는 것은, 내 마음과 몸을 따뜻하게 돌보는 행위이자 스스로에게 주는 작은 선물이다. 쌈 하나에 담긴 정성, 고소한 쌈장 한 숟갈이 전해준 깊은 위로, 그리고 그날의 따뜻한 기억까지 내 마음의 앨범 한 귀퉁이에 소중히 저장되었다.


음식은 나의 벗이고, 삶의 여백에 말을 건네는 친구이다. 그 벗이 있어 나는 오늘도 삶의 맛을 놓치지 않는다.그리고 문득 깨닫는다. 먹는다는 것은 단순한 생존의 행위가 아니라, 이 순간의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일이다.

나는 오늘 무엇을 먹었는가보다 어떤 마음으로 먹었는가가 인생의 맛을 결정한다. 음식은 결국, 삶의 속도와 나의 태도를 비추는 거울이다. 입안에서 천천히 사라지는 그 맛처럼, 삶 또한 씹고 음미한 만큼 남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 쌈장 하나로 마음이 따뜻해진 하루를 기억하며 다시 ‘맛있게’ 살아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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