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박 4일간의 부산 일정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다. 짐을 풀자마자 자연스레 몸이 움직였다. 여느 때처럼 가장 먼저 손이 간 곳은 집안 구석구석이었다. 바닥 청소는 로봇청소기에게 맡기고, 나는 냉장고 문을 조용히 열었다. 오랜만에 맞이한 우리 집 냉장고는 여전히 말이 없었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그동안의 역사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먼저 반찬가게에서 사 온 플라스틱 그릇들을 꺼냈다. 먹다 남은 것들이었다. 처음에는 ‘다음에 먹어야지. 왜 버려?’ 하며 버티다가, 며칠이 지나면 ‘진작 정리할걸.’이라는 생각으로 바뀌게 된다. 이 패턴은 해마다, 계절마다 반복된다. 냉장고 속 남은 음식들과의 미안한 작별은 어쩌면 생활의 일부분이 된지 오래다. 그 후엔 늘 죄책감을 씻듯 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헹구고, 분리수거함으로 가져간다.
정리가 끝나면 힘들지만 묘하게도 마음이 개운해진다. 그리고 그제야 냉장고 속이 한눈에 들어온다. 빈 칸을 보며 자연스럽게 채워야겠다는 게 감각적으로 느껴진다. ‘계란 한 판을 사야겠구나.’
살림살이도 인생도 참 닮아 있다. 채우고 비우고, 또 채우고 비우는 사이에 하루도, 한 생도 그렇게 흘러간다. 청소도 했고, 빨래도 했고, 냉장고도 정리했다. 시곗바늘은 어느새 저녁 시간으로 성큼 다가가 있었다.
부산에 다녀오느라 미루었던 건강검진 예약도 잊지 않았다. 딸이 알려준 병원은 집에서 불과 1km 거리였다.
작은 도움도 배려 속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들게 하니,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남편과 함께 내일 아침에 가기로 했다.
오후엔 한동대 학생과 커리어 코칭 통화를 했다. 책을 좋아해서 출판사에 들어가고 싶다는 꿈, 퇴근 후엔 노래를 하고 싶다는 솔직한 바람, 그리고 언젠가는 NGO에서 일하고 싶다는 이상까지 들려주었다. 한 사람의 내면에 이렇게 다양한 욕망과 가능성이 숨어 있다는 사실에 나는 새삼 코칭이라는 일이 사람의 상상을 여는 일이라는 것을 다시 느꼈다.
‘적을 알면 이긴다’는 말이 문득 떠올랐다. 그 말은 상대를 이해해야만 이길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상대가 아니라 무엇을 도울 수 있을지 몰라 막막해하는 나 자신의 마음을 이길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틈틈이 애견 사료도 주문했고, 분리수거도 했다. 하루가 무심히 흘러갔다고 생각했지만, 그 속엔 내가 머문 자국들이 보인다. 치우고, 움직이고, 연결하고, 준비했다.
그러나 문득 마음이 조용히 묻는다. “이 모든 일 가운데, 진짜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책을 읽고 싶었다. 자가 피부관리도 하고 싶었다. 그 무엇도 아닌, 나 자신만을 위한 시간 한 조각이 필요했다.
나는 오늘도 누군가를 위해 하루를 잘 살아냈지만, 그 안에서 나 자신을 조금은 잃고 있었던 것 같다. 나 스스로를 위로하지 못하는 하루는 살맛 잃은 하루다.
그러나 이걸 알아차렸다는 것 자체가 이미 회복을 향한 첫 걸음이다. 사람은 누구나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매일 줄다리기를 한다. 그 균형을 온전히 맞추는 사람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중요한 건 완벽한 하루가 아니라 솔직하게 나를 돌보는 하루라는 걸 오늘 다시 깨닫는다.
삶은 언제나 분주하지만, 그 속에서 나를 위한 조용한 틈을 내어주는 일, 그 일이야말로 하루를 ‘살맛 나게’ 만드는 비밀일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나는 조금 나아간다. 때로는 뒤로 물러서기도 하고, 때로는 그 자리에 가만히 머물기도 하지만, 이토록 평범한 하루 속에서도 여전히 나를 향해 걸었다고 믿어짐이 남아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