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실에서 건진 작은 평

by 별빛수

우리 집 주방 옆, 작고 숨겨진 공간 하나. 그곳은 세탁실이자, 분리배출의 전초기지다. 하지만 늘 정리되지 않은 플라스틱 상자들로 가득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좁은 공간에 비닐과 플라스틱은 튀어나오기 일쑤, 봉투를 묶는 일조차 작은 전쟁처럼 느껴졌다.


결국, 결단을 내렸다. 다섯 개의 상자를 덜어내 조립한 후, 세탁기 맨 위에 가지런히 얹었다. 그 대신 세탁기 옆에는 50리터 비닐봉투를 테이프로 붙여 비닐류 전용으로, 보일러통 앞에는 플라스틱 전용 봉투를 마련했다. 밖으로 배출할 때는 테이프만 떼어내면 되니, 이 얼마나 속 시원한 구조인가!


기존의 통은 고리를 걸어 재활용 봉투를 달 수 있게 해두었다. 손에 들린 플라스틱을 툭, 던지기만 하면 딱 맞게 들어가는 구조. 내가 짠 이 시스템에 나 자신이 감탄했다.

세제통도 정리했다. 두 통으로 나눠져 있던 세탁용 세제를 하나로 합치니 공간도 절약되고 기분까지 개운해졌다. 종이, 병, 캔류는 비닐을 찢지 않게 플라스틱 상자에 따로 담기로 하고, 벽 쪽에 깔끔히 위치시켰다.


이토록 시스템을 바꿨는데—그리고 나 자신에게 칭찬해줘도 될 만큼 잘했는데—아침에 싱크대 앞에 쌓인 설거지를 보는 순간, 어김없이 무력감이 밀려왔다. ‘이건 나중에 하자.’ 그렇게 미뤘고, 다른 일들로 하루가 지나가고, 결국 저녁이 되어서야 주방 정리가 끝났다.


그런 나를 보며 문득 생각했다. 보이는 대로, 닥치는 대로, 모든 집안일을 해치우려다 보면 언젠간 질려버리겠구나. 집안일로 번아웃되기엔, 이건 너무 일상적인 노동 아닌가.


늘 그래왔다.

‘일은 완벽하게 끝내야 한다’는 고정관념.
‘정리는 한 번에, 깔끔하게, 완벽하게 끝내야 한다’는 강박.

하지만 오늘은 그런 나를 가만히 내려놓기로 했다. 설거지를 미뤘다고 세상이 무너지진 않는다. 대신, 바뀐 분리배출 시스템을 바라보며 흐뭇해지는 나 자신에게 미소 한 번 지어주었다.


마음이 힘들 땐, 부정적인 감정 속으로 뛰어들기보다 ‘기분 좋았던 기억 하나’를 불러오는 일이 때론 더 빠르고 정확한 해답이다. 오늘 나는 설거지를 미룬 죄책감 대신, 세탁실을 정리한 개운함을 마음의 앨범에 붙여 넣었다. 그 한 페이지면 충분하다. 지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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