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몰랐던 '나'

은퇴후 글쓰기

by 별빛수

현장에서 수십 년을 보내며, 나는 늘 ‘앞으로’만 바라보며 달려왔다. 다음 학기를 준비하고, 새로운 연수를 받고,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아이들을 돌보며 늘 ‘지금’보다는 ‘다음’을 향해 움직였다.


교육이라는 세계는 본디 그런 곳이었다. 멈춰 서기보단 계획하고, 기다리기보단 실천하며, 앞을 향해 나아가는 일이 가장 중요한 덕목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나도 익숙해졌다. 숨 돌릴 틈 없이 달리고, 뒤돌아보지 않는 삶이었다.


그런데 은퇴라는 말이 점점 현실감 있게 다가오면서, 나도 모르게 걸음을 늦추는 날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문득 멈춰 서게 되고, 그 자리에 조용히 앉아 지나온 시간을 오래도록 들여다보게 됐다.


그 속엔 그냥 스쳐 지나갈 수 없는 장면들이 여전히 숨 쉬고 있었다. 가슴이 뛰던 날들, 말없이 삼켰던 서운함, 놓쳐버린 기회들, 뜻밖의 따뜻함까지— 그 모든 순간들이 켜켜이 쌓여, 나라는 이름의 나무에 새겨진 나이테였다.


살아온 시간을 돌아본다는 건, 그저 추억에 잠기거나 옛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일이 아니었다. 그때의 나와 다시 마주 앉아, 그 시간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이었다.


처음엔 막막했다. 무엇을, 어디서부터 꺼내야 할지 어색하고 시작점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메모장에 속상한 마음을 거칠게 몇 줄 써봤다. 그 글은, 마치 먼 길을 돌아온 나 자신이 다시 나를 찾아와 조용히 말을 건네는 멀리서 온 벗 같았다.


“수진아, 많이 애썼구나. 그래도 그 긴 시간들을 잘 지나왔어.”


그 짧은 문장은 오래도록 나를 쓰다듬는 따뜻한 손처럼 느껴졌다. 가만히 앉아 글을 바라보던 그 순간, 삶을 글로 정리한다는 건 단순히 과거를 써보는 일이 아니라, 바로 지금의 나를 다정하게 안아주는 작업으로 다가왔다.


조용히 글을 따라가다 보면, 멀리 남겨둔 꿈이 슬며시 고개를 들고, 잊은 줄 알았던 질문들이 다시 말을 걸며, 여전히 가능성으로 열려 있는 내일이 조용히 빛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글을 쓴다는 건, 흩어져 있던 내 삶의 강줄기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엮어내는 일이다. 그 이야기는 단지 지나온 길을 되짚는 데 그치지 않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를 비추어주는 조용한 거울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글을 쓴다. 살아온 나를 다시 껴안고, 지금의 나를 다정하게 바라보며, 아직 만나지 못한 나에게 조용히 손을 흔드는 일을 한다.


처음엔 내 삶을 10년씩 나눠봤다. 20대엔 캠퍼스의 설렘과 첫 교단의 떨림이 있었고, 30대엔 4인 가족이라는 세계가 찾아왔으며, 40대엔 끝이 보이지 않던 내면과의 싸움이 있었고, 50대엔 다시 책상 앞에 앉아 배우는 기쁨을 누렸음을 알게 됐다. 그렇게 하나하나 꺼내어 적어보니, 잊힌 줄 알았던 기억들이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


가장 아팠던 그 시절의 나에게는, 편지를 써보았다. “많이 힘들었지? 그래도 견뎠고, 너는 끝내 살아냈어.” 몇 줄 써 내려가다 보면, 문득 그 시절의 나를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밀려온다.


어느 날엔, 다섯 개의 단어를 하나씩 꺼내 마음의 쟁반에 올려놓았다. ‘가족’, ‘교직’, ‘실패’, ‘감정’, ‘배움’ 등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 말들 앞에 앉아, 마치 오래된 상자 뚜껑을 여는 마음으로 기억의 조각들을 꺼내어 끄적여 보기도 했다.


어떤 기억은 웃음처럼 가벼웠고, 어떤 기억은 오래 접어둔 편지처럼 묵직했다. 단어마다 나의 모습들이 불려 나왔고, 그 안에 잠들어 있던 마음들과 짧지만 조용히 만나는 순간을 누렸다.


글을 쓴다는 건 결국, 내 안에서 흩어져 있던 시간을 하나의 서사로 엮어내는 일이다. 그 조각들을 손끝으로 더듬다 보면, 그동안 못 본 내 얼굴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지나온 나날은 결코 ‘그냥 흘러간 시간’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된다.


조급해하지 않아도 된다. 이야기는 밀어붙인다고 나오지 않는다. 마치 오래된 편지처럼, 적당히 기다릴 줄 아는 견딤에 먼저 열리는 법이다. 천천히, 한 문장씩 써 내려가자. 그리고 그 이야기에 가장 먼저 가슴이 뜨거워질 사람은 지금껏 나를 가장 많이 알았던 것 같으면서도 몰랐던,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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