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매자의 <춤의 연대기>
임수진 무용평론가
지난 수 십년간 한국의 현대 무용가들은 움직임의 탐구를 기조로 삼아왔다. 안무를 시작하는 이들에게 고전이 된 “나는 어떻게 움직이는 지가 아닌, 왜 움직이는 지에 관해 관심을 둔다”는 피나 바우쉬의 철학은 여전히 많은 무용가들의 공연 의도에서 꾸준히 발견된다. 개념예술을 표방하는 퍼포먼스부터 전통적 춤을 분해 해체하여 새로운 방식으로의 움직임을 찾아낸 작품까지, ‘움직임’과 ‘몸’은 우리나라 동시대 안무가들에게 가장 매력적인 탐구의 대상이었다. 춤을 추는 자가 자신을 춤추게 하는 동기를 찾아 그것을 작품화 하는 창의적 과정. 그것은 그 자체로서도 흥미롭다.
그러나 몸과 움직임의 탐색이라는 연구과정을 관객과 공유하는 이 동시대적 관습은 아쉽게도 하나의 체계를 이루거나 연구의 결과물로써의 공연, 즉 완성된 작품으로 관객을 만나는 것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질문을 던지고 과정을 공유하는 행위로서의 공연도 여전히 물론 수행적이지만, 움직임을 비언어적 도구로써 예술 세계를 펼치는 그들이 꽤 오랜 시간 연구해온 움직임의 의미와 원리, 가치는 어느 지점에서는 완성된 결과물로써 관객에게 선보일 필요가 있을 테다. 특정한 시공간에 모여 관객 앞에서 작품을 시연하는 무용가로서, 움직임 탐색이라는 기초적 연구에 기반해 창의성과 예술성을 발휘해 완성한 작품을 선보이고 이를 수준 높은 작품으로서 레퍼토리화 한 무용가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런 의미에서 지난 3월 개최된 김매자의 <춤의 연대기>는 원로 무용가로서 김매자가 그동안 탐색해온 움직임에 대한 연구의 결과, 현재 그의 정체성, 그리고 앞으로 남겨질 그의 춤의 유산을 종합적으로 조명한 공연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공연은 “원로예술인의 창작활동 지원을 통한 자긍심 고취와 여러 세대가 함께 즐길 수 있는 문화예술 콘텐츠 개발”을 목적으로 하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원로예술인 공연지원사업의 일환으로 개최된 것으로, 그 기획의도에 뚜렷이 부합하는 이상적인 시간이었다.
공연은 30여년 전 창작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김매자의 춤을 지탱하고 나아가 한국창작춤의 기본이자 근본으로써 연구, 체계화되어 온 <춤본>을 위시한다. 특히 거문고를 통해 한국의 동시대성을 실험하는 박우재 음악감독과의 협연은 김매자 춤의 즉흥성과 맞아 떨어지며 무대에 생기를 더했다. 땅으로부터 시작해 하늘, 그리고 우주로 나아가는 한국춤의 구조적 원리와 미학에 관한 탐구를 토대로 탄생한 <춤본I>, 한국춤에 내재한 내적 충동인 신명에 천착하며 나아가 춤꾼 김매자의 춤의 길을 형상화한 <춤본Ⅱ>를 비롯해 <살풀이>(한영숙제김매자류), <숨>(김매자류 산조), <光, Shining Light> 등 김매자의 대표작이자 창무춤의 뿌리가 되는 작품들이 차례로 공연되었다.
민속춤 <승무>, 궁중무용 <춘앵무>, 작법 중 <나비춤>을 기반으로 하여 한국춤의 구조이자 외적인 틀을 형성한 작업의 결과물로써 1987년 초연된 김매자의 <춤본I>은 초연 이후 지금까지 김매자와 창무회의 대표 레퍼토리이자 방법론으로 연구되고 공연되어 왔다. 이번 무대에서 김매자를 비롯해 최지연, 김지영, 윤수미, 손미정, 김미선 등 창무회의 다섯 명의 중견무용가들은 <춤본I>의 움직임 원리와 에너지를 시각적 이미지로 형상화 한 군무를 구성, 관객들에게 전달함으로써 <춤본I>이 하나의 기본이자 방법론을 넘어 완성된 무대 작품으로써도 그 미적, 그리고 동시대적 가치를 지님을 다시 한번 증명 했다.
불교의식의 제의성, 민속춤의 자유분방함, 무속 춤의 주술성을 기반으로 하여 춤을 추는 자로 하여금 그것들을 탐색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내적 에너지를 마주하고 이를 분출할 수 있도록 하는 <춤본Ⅱ>는 김매자와 다섯 중견무용가들, 그리고 원로 한혜경과 이애현이 함께 했다. ‘춤의 연대기’라는 큰 맥락안에서 공연되어서인지, 특히 이 작품은 자신 만의 내적 충동을 마주하고 그것을 춤으로 풀어내는 진정한 움직임(Authentic Movement)의 경지에 오른, 오랜 시간 춤의 길을 걸어온 춤꾼들의 시간으로 발견되었다. 내가 움직이고, 동시에 움직여지는, 의식적 원천과 무의식적 원천에서 모두 나온다는 진정한 움직임. 외적 세계의 자아를 초월하고 내면 심층의 자기(the Self)를 성취함으로써 진정한 ‘나’로서 존재한다는 융의 분석심리학을 뿌리에 둔 무용가이자 무용치료사 화이트하우스(M. Whitehouse)가 천착했던 이 진정한 움직임이 70년 이상 춤의 길을 걸어온 원로와 그의 중견 제자들에게서 발현되는 감동적인 시간이었다.
그동안 창무회의 공연들을 다수 관람해온 필자는 이번 공연을 통해 오랜 시간 수련을 거쳐오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몸에 체화된 한국춤의 뿌리와 정서, 내면으로부터 발산되는 심층의 에너지 그리고 그것에 동시대성을 부여하는 창작적 영감에 대해 새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외적 세계에서 기능적으로 만들어진 춤이 아닌 내면 심층 무의식으로부터 뻗어 나와 내가 움직이고 동시에 움직여지는, 진정한 움직임의 경지에 이르는 춤에 압도되는 시간이었다. 지난 70여년간 한국춤의 현대적 움직임을 연구해 온 김매자에게 춤이란 내면의 자기를 마주하고 외적 세계를 넘어 진정한 ‘나’를 발견하게 하는 예술적 수단이자 자기 자체일 것이다. “공연 직전 ‘코로나19’ 감염 해제 후 후유증으로 힘들었던 몸이 첫 공연 무대에 오르는 순간 씻은 듯 나아졌다”는 그의 말이 이를 증명해준다. 움직임에 대한 김매자의 지난한 연구와 그 결과로써의 그의 작품들, 그리고 창무회의 춤의 연대기가 앞으로도 오랜 시간 지속되며 동시대 한국의 무용가들에게 큰 영감이자 본보기가 되기를 희망해본다.
본 글은 무용월간지 몸 2022년 5월호에 개제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