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중견 무용가의 완숙한 무대
글 임수진 사진제공 국립현대무용단
(쿨투라 2022년 1월호)
국립현대무용단의 기획공연 <겨울나그네>(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12월 3일-5일)는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의 가곡 <겨울나그네(Winterreise)>를 무용가 김원, 안영준, 차진엽이 각각 재해석하여 무대화한 공연이다. 뮐러(Wilhelm Müller)의 동명 시에 곡을 붙인 이 가곡은 슈베르트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작곡되었는데, ‘이방인’, ‘낯선’, ‘이별’, ‘절망’, ‘쓸쓸함’ 등의 단어들로 가득 찬 뮐러의 시를 24곡의 피아노 연주와 노래로 풀어냄으로써 삶과 음악에 대한 그의 탁월한 성찰과 독창성, 천재적 창조성을 다시 한번 증명한 곡으로 알려진다. 이번 공연은 문종인의 피아노 연주와 베이스 한혜열의 노래가 공연의 시작과 끝, 그리고 각 작품들 사이에 등장하며 세 개의 작품 <걷는 사람>, <불편한 마중>, <수평의 균형>을 옴니버스로 연결한다.
텅 빈 무대 위 하얀 플로어가 쓸쓸한 겨울 길을 형상화하고, 무대 뒤로 뻗어 난 무용수들의 등퇴장 길에 비추는 노을색을 닮은 주황 조명이 공연을 함축한다. 오랜 시간 한결같은 춤의 길을 걸어온 세 중견 무용가, 슈베르트의 연가곡, 라이브로 연주되는 피아노와 아코디언은 아름다운 시공간을 만들어내며 함께 그것을 점유하고 있는 관객들에게 삶에 대한, 걷고 있는 길에 대한 질문을 건넨다. 공연은 성악과 피아노 연주의 제1곡 〈밤 인사〉로 시작한다.
제4곡 〈동결〉과 제20곡 〈이정표〉를 재해석한 김원의 <걷는 사람>은 슈베르트의 곡, 김원의 춤, 그리고 한숙현의 낭독이 만들어낸 서사와 감성이 충만한, 한 편의 영화 같은 무대다. 슈베르트가 뮐러의 시에 곡을 붙였듯, 김원은 작가 한숙현과의 협업을 통해 주제를 천착하고 작품을 발전시킨다. 머리끝부터 손가락, 발가락 끝까지 퍼지는 김원의 섬세한 몸의 선율은 한숙현의 낭독을 만나 더욱 입체적인 에너지를 형성하며 작품의 주제를 향해 나아간다.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김원의 가녀리고 작은 몸은 아코디언 선율을 타고 흐르듯 움직이며 서정적인 이미지를 만든다. 걸음을 시작하는 그녀의 몸과 발걸음은 더없이 가볍다. 하늘로 뻗은 두 팔과 상승하는 상체 움직임은 점차 바닥으로 가라앉기도, 구르기도 하며 그녀의 걸음에 무게를 더한다. 늘어뜨린 머리카락을 질끈 묶고, 길고 긴 여정을 끝없이 나아가는 나그네의 걸음을 보고 있자니 오랜 시간 걸어온 김원의 춤 인생과 삶의 여정이 마치 눈앞에 그려지는 듯 선하다. 때로는 어린아이나 꿈을 꾸는 청년의 걸음을, 때로는 변곡의 시간을 겪고 있는 중년이거나, 삶의 무게를 통달한 노인의 걸음을 걷는 그녀의 움직임은 하얀 플로어 위에 가득 새겨지며 김원이라는 나그네의 내면을 형상화한다.
이 한 편의 모노드라마는 쓸쓸하고 적막한 겨울에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어 주듯 충만한 감성을 관객에게 전달하며 무용가 김원의 저력을 발휘한다. 안무와 춤추기. 같은 카테고리인 듯 보이지만 실은 전혀 다른 이 두 분야를 아쉬움 없이 완벽히 수행해내는 그녀는 국내 몇 안 되는 손꼽히는 무용가일 테다. 무대 위 홀로 선 완숙한 무용가가 덤덤히 눌러 담은 섬세한 움직임들은 그것을 지켜보는 이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희열을 안긴다.
제17곡 〈마을에서〉로부터 영감을 받은 안영준의 <불편한 마중>은 나그네라는 이방인을 마주한 한 마을 사람들의 심리를 파고든다. 투박한 듯 거칠면서도 부드럽고 섬세한 안영준의춤은 슈베르트의 곡을 만나 이방인, 불안감, 두려움의 감정을 시각화한다. 덫을 연상 시키는 듯한 쇠로 만든 기다란 통이 차가운 이미지를 더한다. 서로가 불안하고 두려운 존재인 둘은 거칠게 대립하는데, 얽히고 설키면서도 서로에게 계속 끌어 당겨지는 움직임들은 둘의 관계에 복잡한 감정과 입체성을 더한다.
대립하는 두 몸은 서로를 이방인이라 여기며 경계하지만, 접촉을 근간으로 한 이 둘의 춤을 보고 있자니 이들에게서 하나의 자아가 보인다. 비슷한 의상과 움직임을 한 둘은 타인과 나의 관계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 특히 그간 무용수 활동보다는 안무에 집중해온 안영준은 이 작품을 통해 무용수로서의 그의 정체성을 다시 한번 각인시킨다. 근육질의 단단한 몸이 구현하는 섬세한 움직임은 그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며 공간을 채운다.
차진엽의 <수평의 균형> 무대 위 두 무용수의 몸의 진동과 음악의 파동, 공중에 매달려 흔들리는 긴 은빛 막대는 마치 수채화같이 공간을 서서히 입체적으로 채우며 주제를 담아낸다. 제10곡 〈휴식〉, 제15곡 <까마귀>, 제24곡 〈거리의 악사〉가 연주되고, 이중 <휴식>은 사운드 디자이너에 의해 변형된다. 원곡의 음정을 왜곡 없이 그대로 유지하며 그 시간만을 길게 늘어뜨리는 타임 스트레치 기법이 사용되었는데 이로부터 무대의 시간적, 공간적 차원이 추상적으로 재배치된다.
차진엽의 움직임은 유려하다. 파도가 바람에 일렁이듯, 모빌이 공기의 흐름을 타고 흔들리듯 균형을 향해 나아가면서도 자신을 둘러싼 것들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몸을 맡긴다. 오랜 시간 무용가의 길을 걸어오며 경험한 수많은 감정들, 여러 문제에 대한 사유들, 그것을 기록한 몸의 기억들을 덤덤히 관망하며 보다 본질적인 무언가를 향해 나아간다. 힘을 뺀 채 음악과 공간, 그리고 내면의 소리에 몸을 맡기니 수십년 간 걸어온 차진엽의 춤의 길에 오히려 빛이 난다. 무용가로서의 그녀의 연륜을 다시금 깨닫게 하는 무대다.
공중에 매달려 흔들리는 긴 은빛 막대의 수평은 끝내 맞춰지지 않는다. 공기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며 새로운 공간을 창조하는 모빌처럼, 무대라는 공간의 공기와 에너지의 흐름에 따라 유려하게 움직이는 이 오브제는 음악과 몸의 진동을 그대로 느끼며 현재를 받아들이는 차진엽의 움직임과 닮아 있다. 쏟아지는 별 밑에서 잠시 움츠리고 몸을 뉘었다 머리를 쓸어 올리며 보이는 그녀의 찰나의 미소가 찬란하다.
오랜 연륜을 근간으로 하는 무용가들의 좋은 공연과 시공간을 함께 점유하는 일은 즐겁고 영광스러운 일이다. 김원과 안영준, 차진엽은 안무와 춤을 동시에 수행해내며 그들의 연륜과 실력을 증명한다. 스스로의 춤을 추는 그들은 더없이 자유롭고 온전하다.
출처 : 쿨투라(http://www.cultura.co.kr) 2022년 1월호에 개제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