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문화재단 춤in 개제된 글입니다]
원문 http://choomin.sfac.or.kr/zoom/zoom_view.asp?zom_idx=576&div=01&type=IN
임수진_무용 칼럼니스트, 댄스앤미디어연구소 이사
“대부분의 무용영화는 무대를 위해 디자인된 것을 기록한 것이며 또한 무대 앞쪽의 관객의 시야에 맞춰졌다. 이 영화에서 나는 무용수를 한계가 없는 영상적인 공간에 자리매김하였다. 무용수는 카메라와 함께 움직임 자체를 위한 공동의 책임이 있다. 다르게 말해, 이것은 영화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무용이다.”
- 마야 데런(Maya Deren) <카메라를 위한 안무 연구(A Study in Choreography for Camera)>(1945) 소개글1)
1945년 발표된 마야 데런의 <카메라를 위한 안무 연구>는 춤을 무대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일종의 실험이었다. 최초의 댄스필름이라 여겨지는 이 작품에서 춤을 추는 무용수와 그를 담는 카메라는 함께 숲, 집, 갤러리 등으로 시공간을 이동하며 다양한 이미지들을 연출한다. 이전까지의 댄스필름은 무대 공연을 단순히 기록한 영화이거나, 혹은 그것을 촬영 감독의 임의대로 편집하고 변질시킨 것이었다. 그러나 데런의 접근 이후 댄스필름은 무용과 카메라가 하나의 예술작업을 창조하는 데 협력하는 새로운 예술 ‘코레오시네마(Choreocinema)’2)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예고 없이 우리의 일상을 덮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이하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그동안 공연장을 주 무대로 활동해오던 무용가들도 무용을 영상화하는 작업에 조금씩 관심을 내보이고 있다. 관객 없이 개최한 공연을 스트리밍하기 위해 카메라로 촬영한 영상, 연습실을 떠난 무용수들이 사적 공간에서 몸을 풀거나 춤을 추는 모습을 촬영해 SNS에 게시한 짧은 길이의 영상, 공연 실황을 기록하기 위해 촬영한 영상 등이 눈에 띈다. 공연장을 떠난 무용가들에게 영상 미디어는 무용을 선보이는 매개이자 새로운 표현의 방법으로 떠오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작업을 모두 댄스 필름이라 할 수 있을까? <카메라를 위한 안무 연구> 이후 70여 년이 흐른 오늘날, 예술 현장에서 댄스 필름은 무엇을 의미할까?
스토리텔링과 창의적 표현의 안무,
그리고 혁신적인 미디어 아티스트의 영화적 작품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댄스필름 플랫폼인 ‘댄스 온 카메라(Dance on Camera)’는 페스티벌이 소개하는 댄스필름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뉴욕댄스필름협회가 1971년 처음 개최한 후 1996년부터 필름 앳 링컨센터와 공동개최하는 이 페스티벌은 오늘날 댄스 필름을 대표하는 플랫폼이라 할 수 있으며, 상대적으로 댄스 필름의 역사가 긴 유럽과 미국의 작품들이 주로 상영된다.
‘댄스 온 카메라’ 홈페이지 https://www.danceoncamerafestival.org/
댄스 필름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이해를 위해 ‘댄스 온 카메라’를 비롯해 주요 댄스 필름 플랫폼에서 선보이는 영화들을 형식에 따라 분류해 살펴보자. 먼저 우리가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고 꽤 여러 작품을 접해봤던 다큐멘터리 형식이 있다. 올해로 48주년을 맞이한 ‘댄스 온 카메라’의 개막 영화인 <마기 마랭: 타임 투 액트(Maguy Marin: Time To Act)>( 2019)> 역시 프랑스 안무가 마기 마랭의 예술관을 담아낸 다큐멘터리이다. 극적인 요소를 배제하며 실제 상황을 사실 그대로 찍는 이 장르는 대부분 거장 안무가의 예술관을 비롯해 그들의 일상까지 가깝게 들여다보며 관객들에게 예술적 자극과 깨달음, 공감 등을 이끌어내는 동시에 거장의 예술관을 기록하고 기억하기 위해 제작된다. 대중적으로도 큰 인기를 얻었던 영화 <피나(Pina)>(2011)와 <댄서(Dancer)>(2016), <미스터 가가(Mr. GAGA)>(2015) 등이 이에 해당된다.
<마기마랭: 타임 투 액트(Maguy Marin: Time To Act)>(2019) 트레일러 보기
<미스터 가가(Mr. GAGA)>(2015) 트레일러 보기
또한 영상을 매개로 신체를 시공간의 제약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했던 마야 데런처럼, 영상 미디어 기술을 앞세운 실험적인 댄스필름들이 있다. 스크린댄스(screendance)라 불리기도 하는 이러한 필름들은 주로 안무적, 영화적 실험을 기반으로 하는 비교적 짧은 영상이다. 오늘날 주요 댄스필름 플랫폼에서 가장 많이 상영되는 장르이기도 한 이러한 필름들은 특히 미디어 아티스트들에 의해 흥미롭고 혁신적인 영상 예술로 재탄생하고 있다. 안무가와 연출자의 동등하고 밀접한 협력이 전제되며 ‘카메라를 위한 안무’, 그리고 ‘안무적 연출’ 의 조화를 통한 에너지로 만들어지는 필름들이다.
한편 극적 전개가 중심이 되는 극영화도 있다. 스테파니에 디 쥬스토(Stephanie DI GIUSTO) 감독의 <더 댄서(The Dancer)>(2016)는 무용가 로이 풀러(Loie Fuller)의 예술 활동과 일상을 다룬 극영화로, 배우들의 연기에 의해 이루어졌다. 일정한 줄거리가 전개되는 장르인 만큼 이야기와 무용의 연결지점, 그리고 촬영과 편집, 영상미 등 모든 영화적 요소들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장르이다. 다큐멘터리나 스크린댄스보다 감독의 역할과 개입이 훨씬 더 큰 장르이기도 하다.
오늘날 댄스필름의 경향을 이해하기 위해 편의상 크게 세 가지 장르로 분류해 봤으나, 이 외에도 춤과 카메라의 협업으로 이루어진 다양한 스타일의 작업 역시 모두 댄스필름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미디어 기술의 혁신적인 발전은 영상 예술의 한계를 넘어 독특한 방식으로 상상력을 실현하고 있다. 무엇보다 무용과 카메라의 공동작업에 있어 안무가가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영상 속의 무용은 ‘공연예술’이 아닌 ‘영상예술’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공연예술인 무용을 선보이는 전통적인 방식이 극장에 모여 같은 시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무용수와 관객을 전제한다면, 댄스필름은 무용수의 몸이 영상 미디어를 매개로 다른 시공간의 관객을 만나는 것이다.
따라서 댄스 필름을 위한 안무는 무대 공연을 위한 안무와는 전혀 다른 출발점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눈앞의 살아있는 몸이 아닌, 카메라 렌즈에 담겨 스크린 위에 펼쳐지는 가상의 이미지들을 바라보고 있을 관객들을 위해 제작되는 영상 콘텐츠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댄스필름의 폭넓은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무대 공연을 위해 만들어진 작품을 카메라로 촬영해 기록한 영상, 혹은 이 영상을 감독의 임의대로 편집한 필름 등을 댄스필름이라 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국내 댄스필름들
댄스필름 플랫폼들이 생겨나며 본격적으로 이 장르의 탐구가 시작되기 전,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댄스 필름은 상업 영화로 제작된 극영화들이다. 변영주 감독의 <발레 교습소>(2004)를 비롯해 박영훈 감독의 <댄서의 순정>(2005), 그리고 강형철 감독의 <스윙키즈>(2018) 등 장편 영화 감독들이 춤을 소재로 한 극영화들이 다수 제작되어 왔다. 그리고 3~4년 전부터 서울문화재단 서울무용센터에서 개최하는 댄스필름 프로젝트인 TAKE#1을 비롯해 2017년 처음으로 개막한 서울무용영화제와 천안춤영화제 등 댄스필름 전문 플랫폼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며 국내에서도 더욱 다양한 종류의 댄스필름이 제작되고 있다.
지금까지의 경향을 살펴보면 미국과 유럽의 댄스필름이 주로 몸의 움직임과 시각적 효과에 집중하고 있는 것과 달리 우리나라 필름들은 대부분 이야기와 감정의 표현에 주목하는 경우가 많다. 서울무용영화제가 지난 3년간 선보인 국내 공모작들을 살펴보면, 사랑, 청춘, 꿈, 일, 삶, 가족 등 일상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서정적인 극영화들이 많이 눈에 띈다. 특히 독립영화처럼 철학적인 접근을 토대로 한 작품들이 많으며, 다수의 영화에서 영화적 기법과 완성도 보다는 하나의 드라마 안에서 이야기와 춤을 연결하는 지점에 대한 고민이 드러나는 편이다. 이는 아직 국내 댄스필름은 영화를 위한 안무뿐만 아니라 연출 또한 무용가가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으로 보인다.
짧은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눈에 띄는 수작들도 꽤 있다. 최근 유튜브로 상영된 국립현대무용단의 <비욘드 블랙>(2020)이 대표적이다. 본래 이 작품은 3월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의 공연을 위한 작업이었는데 코로나19로 인해 한 차례 연기되었고, 이후의 공연도 취소된 후 영상 콘텐츠로 제작된 것이다. 필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신창호 안무가는 “공연을 위해 준비했던 작품을 댄스필름으로 제작하기 위해 안무를 전면 수정해야 했다. 영상을 위한 춤은 공연을 위한 춤과 너무 다르기에 전문가로부터 자문도 얻고 연구도 많이 했다. 무엇보다 댄스필름에서는 시공간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우니, 보다 다양한 실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좋았다.”라고 밝혔다. 필름 속의 무용수들은 인공지능이 만들어 낸 ‘결코 중복되지 않으며 무한 창작 가능한’ 안무를 수행한다. 이때 카메라는 정면 고정된 위치에 머무는 역할이 아니라 춤 안으로 들어와 줌샷(zoom shot), 팔로우샷(follow shot), 조감 및 원거리 촬영 등 다양한 촬영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무용수들을 다각도로 담아낸다. 안무가는 필름 촬영 과정에서 강승표 감독과의 적극적인 협력과 의견 조율의 과정이 필요했음을 밝혔는데, 그 과정이 있었기에 완성도 높은 댄스필름이 제작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예종 영화과 졸업작품으로 발표한 이병윤 감독의 <유월>(2018)역시 주목할 만하다. 서울무용영화제를 비롯해 미쟝센 단편영화제, 부산국제단편영화제 등에서 수상하며 영화적 완성도를 인정받은 이 영화는 ‘춤 바이러스에 감염된 학교 아이들’이라는 흥미로운 주제를 춤과 이야기로 풀어나간다. 대사는 최소화되었으며 자연스럽고 유쾌한 춤이 캐릭터와 감정을 극대화한다. 촬영과 편집, 구성 등 영화적인 완성도도 매우 높은 이 영화는 유튜브에 게시된 이후로 지금까지 300만에 가까운 시청을 기록하며 대중적으로도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이 외에도 시공간을 넘나드는 무용수를 그린 김병준의 <플리커>(2017), 끝없이 펼쳐진 시골길을 춤추며 걷는 무용수와 이를 롱테이크로 촬영 후 뒤에서부터 거꾸로 편집한 최종인의 <ㅎㅎ>(2018) 등 미디어 실험을 기반으로 한 흥미로운 스크린댄스 필름도 다수 찾아볼 수 있다. 5분~15분 길이의 이 짧은 필름들은 몸을 중심으로 시공간에 대한 인식을 전복시키며 촬영 및 편집 기술을 최대한 활용한 실험적인 필름들이다. 그 외에 정년퇴임을 앞둔 안무가 남정호가 10대 학생들과 진행한 워크숍 과정을 통해 삶에 대한 고민을 던지고 교감하는 여정을 그린 <구르는 돌처럼>(2018) 등 의미 있는 다큐멘터리 또한 다수 제작되어 국내 댄스필름의 빠른 성장을 기대하게 한다.
라이브니스(Liveness)와 영상 미디어
공연장에서 눈앞의 살아있는 몸의 꿈틀거림을 지켜보며 함께 호흡하는 것처럼, 관객은 스크린 위 가상의 이미지에 집중하고 빨려 들어갈 수 있을까? 영상 이미지는 신체의 생명력과 움직임의 역동성을 어떻게 재구성하여 관객을 새로운 차원의 시공간으로 이끌고 그들과 소통 할 수 있을까? 댄스 필름 제작에 있어 안무가들이 가장 많이 하는 고민은 아마도 이와 같은 ‘라이브니스(Liveness)’의 문제일 것이다.
영상 미디어가 대중화되고 그 영향력이 일상을 압도함에 따라 무용을 비롯한 전통적 형식의 공연예술은 자신의 영역을 지켜내기 위해 라이브니스 담론을 제시하며 발전시켰다. 같은 시간과 공간을 점유하는 작품과 관객이 함께 경험하는 라이브니스는 무용을 비롯해 몸을 매개로 하는 공연예술의 존재론을 지켜내는 필수 불가결한 요소였다. 페기 펠런(Peggy Phelan)의 논의처럼, 공연예술은 ‘사라짐’의 미학에서 존재론적 가치를 찾을 수 있었다. 복제와 재생산의 영역인 영상 미디어를 공연으로부터 철저히 분리하며 기계복제 시대인 오늘날, 살아있는 몸을 매개로 하는 공연예술의 가치와 정체성을 라이브니스를 통해 재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디지털 기술에 힘입어 모사가 현실을 압도하는 하이퍼리얼리티(Hyperreality) 시대의 도래는 인간의 사유와 존재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대상을 인지하고 교감하는 데 있어 물리적 현존은 더는 필수 요건이 아니며 과거와 미래, 가상과 현실, 허상과 실제의 경계가 허물어짐에 따라 시청각을 비롯한 인간의 감각이 재구성되는 것이다. 그리고디지털 기술은 ‘투명성’을 위시하며 매개의 흔적 또한 지우며 미디어가 대상을 매개하고 있다는 사실마저 인식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더욱 환영으로 빠져들게 한다. 이로써 ‘라이브’에 관한 의미가 빠르게 재구성되고 있다. 필립 아우슬랜더(Philip Auslander)의 논의처럼, 라이브니스는 이제 매개의 문제가 아닌 대상과 수용자 사이의 의사소통의 문제이다. 시간과 공간의 공존을 넘어 정서적, 인지적 측면으로 설명될 수 있으며, 중요한 것은 물리적 공동 현존이 아닌, 라이브(Live)한 느낌 그 자체인 것이다.
비록 관객은 실제의 몸이 아닌 스크린 위 가상의 이미지를 마주하게 되지만 카메라의 개입을 통해 실제만큼, 혹은 실제보다 더 ‘라이브’한 느낌을 연출해낸다. 안무가와 감독, 무용과 카메라의 긴밀한 협력은 더욱 창의적인 에너지를 만들어 내며 새로운 차원의 라이브니스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마무리하며
댄스필름은 무용 공연을 대체하는 장르가 아니라, 무용을 선보이는 또 다른 방식 중 하나이다. 무용과 영상의 오랜 협업이 이루어낸 이 새로운 장르는 영상을 위한 춤을 만드는 안무가와 그것을 하나의 영화로 만드는 감독 간의 긴밀하고 동등한 협업으로 이뤄낼 수 있는 또 다른 예술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에 설 무대를 잃은 무용가들에게 대안으로 떠오를 수는 있지만, 공연을 대체할 위협이 아니라 공연과 별개로 성장해나가는 예술 장르라는 인식이 중요해 보인다. 또한, 댄스필름은 안무가들이 연구하고 실험하며 영상 예술과 긴밀한 협력을 통해 발전시킬만한 매력적인 분야임이 틀림없다. 그렇기에 비대면 시대가 저물고 다시 예전의 일상을 되찾은 후에도 무용은 공연과 영상 미디어 두 분야에서 모두 훌륭한 예술적 콘텐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무용이 카메라와 편집에 매우 깊은 관계를 맺고 있어 다른 곳에서는 공연하기 불가능한, 이 영화에서만 가능함으로써 무용영화의 표본이 되기를 의도한다. 무용가와 영화작가 사이의 협동의 새로운 시대가 열려 그들의 창작적 에너지가 서로를 끌어당기고, 그들의 재능이 새로운 예술 표현이 되기를 희망한다”
- <카메라를 위한 안무 연구>에 관한 마야 데런의 글 (댄스 매거진, 1945)3)
1) 김현옥, 마야 데른의 카메라를 위한 안무에 관한 연구, 대한무용학회 논문집, 2003.
2) 당시 뉴욕타임즈 무용평론가 존 마틴은 데른의 이 작품을 ‘코레오시네마’라고 명칭했다. (김현옥, 2003)
3) 김현옥, 2003, 재인용
-
임수진은 댄스앤미디어연구소에서 퍼포먼스연구 및 문화연구의 방법론을 토대로 무용을 비롯한 다양한 공연예술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 중이다. 무용월간지 몸 편집장, 서울무용영화제 홍보팀장을 역임했으며 전문지에 무용 리뷰 및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한양대에서 무용학사, 뉴욕대(NYU)에서 공연학(performance studies)석사, 성균관대에서 예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