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요원제도의 명과 암
무대 위 두 남자가 있다. 트레이닝복 차림의 한 남자는 몇 가지 현대무용 동작들을 반복하며 연습 중이다. 동작이 완벽해질 때까지, 뛰고 구르고 돌고 넘어지는 그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있다. 또 다른 한 남자는 군인이다. 달리기, 포복, 구르기 등 훈련 중이다. 한동안 둘은 각자의 움직임에 몰두한다. 땀으로 흥건해진 두 몸과 움직임은 어쩐지 점점 그 모습이 닮아간다.
안무가 권령은이 2016년 발표한 작품 <글로리(Glory)>는 병역면제를 위해 수번의 무용 콩쿠르에 도전했던 무용수 안남근의 실제 이야기를 중심으로 했다. 20대 초반의 남자 무용수들이 수년간 군면제를 위해 국내외 콩쿠르에 매진하는 실태를 고발하는 이 작품은 특히 그 과정으로 인해 피폐해지는 무용수의 심리적 변화에 집중했다. 초연 전, 안무가는 국내 무용계 문화를 비판하는 작품의 내부 고발적인 성격으로 상당한 부담감을 느꼈다고 밝히기도 했는데, 아마도 콩쿠르와 병역면제에 관한 문제를 비판적 시각으로 담론화 시킨 것은 그녀가 처음이기 때문일 것이다. 작품은 2015-2016 한불 상호교류의 해를 기념해 서울과 파리에서 동시에 진행되었던 ‘2016 댄스 엘라지(DANSE ELARGIE)’의 파리 경연에 참가해 3위 및 관객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고, 지난해 국립현대무용단의 초청으로 대학로에서도 재공연 되는 등 작품성을 인정받았지만 안타깝게도 작품의 메시지가 공론화되거나 사회적 담론을 형성하지는 못했다.
‘수년간 맹목적으로 지속되는 콩쿠르 도전으로 점점 피폐해져가는 청년’의 이야기가 무용계 내부에서도 큰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한 이유는 그것이 병역면제라는 엄청난 특혜를 위한 당연한 희생으로 간주되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1973년부터 시행되어온 예술체육요원 편입제도는 당시 전무했던 우리나라 남자 무용수들의 괄목할만한 성장으로 이끌어냈으며 이는 ‘남성 무용가들의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오늘날 국내 무용계를 형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기별로 뛰어난 몇몇의 무용수들이 콩쿠르 입상 후 군 면제 혜택을 받고, 공백 없는 지속적인 예술 활동을 토대로 현재 국내 무용계의 주요 인물들로 성장한 것이 지난 수십 년간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국가대표 손흥민 선수의 체육요원 편입이 이슈가 되며 동시에 병무청의 예술체육요원 편입제도가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고, 이는 예술요원의 과도한 혜택에 대한 문제로 확대됐다. 지난 10년간 예술분야에서 병역면제 혜택을 받은 수는 280명으로 178명인 체육 분야보다 1.5배가 많은데다 그 기준도 ‘올림픽 3위 이상’과 ‘아시안게임 1위’에 제한되어 있는 체육요원과는 달리 ‘국내외 48개 대회 119개 부문’이라는 비교적 상당히 많은 콩쿠르가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이 중 무용 분야를 살펴보면, 헬싱키 국제발레콩쿠르, 러시아 국제발레콩쿠르&안무콘테스트, 스위스 프리 드 로잔 국제발레콩쿠르 등 해외에서 개최되는 9개의 국제콩쿠르와 서울국제무용콩쿠르(한국발레재단 주최), 코리아국제현대무용콩쿠르(한국무용협회 주최), 서울국제무용콩쿠르(서울국제무용교류회 주최) 등 우리나라에서 개최되는 3개의 국제 콩쿠르에서 2위 이상 입상자, 그리고 국내 콩쿠르인 동아무용콩쿠르(동아일보 주최)와 전국신인무용경연대회(한국무용협회 주최)에서 1위 입상자가 해당된다. 체육요원과 비교해 콩쿠르의 수가 상당히 많을 뿐 아니라. 최근 국제 콩쿠르의 공식 부문에서 2위 이상의 성적을 내지 못한 자가 번외 부문의 수상내역을 허위로 제출해 예술요원으로 편입됨에 따라 그 공정성에 대한 심각한 문제점이 제기되며, 병무청과 국방부, 문화체육관광부 등의 관계부처가 참여하는 합동 태스크포스 출범 계획이 발표되기도 했다.
두 대회로 제한된 체육 분야에 비해 지정된 콩쿠르 수가 상당히 많고, 땀범벅이 되어 두 시간 내내 뛰어다니는 선수의 모습을 TV 생중계로 지켜볼 수 있는 반면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일어나는 지 전혀 알 수 없는 콩쿠르 특성상 무용수의 병역 면제 혜택이 더욱 부당하게 느껴질 수 있다. 게다가 국가대표로 태극기를 달고 뛰는 축구 선수에 비해 개인의 콩쿠르 입상과 예술가로의 성장이 ‘국위선양 및 문화창달’에 어떤 기여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도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오늘날 국내 무용계의 지형도를 이루는 데 있어 예술요원 편입제도가 매우 큰 역할을 한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군면제 혜택 후 아시아인 최초로 마린스키발레단에 입단해 현재 수석무용수로 활동 중인 김기민 발레리노나 국립발레단과 파리오페라발레단을 거쳐 현재 우리나라 컨템포러리 발레를 이끄는 김용걸 교수가 국위선양과 문화창달에 기여함은 명백해 보인다. 그렇다면 현재 공론화 되어 폐지까지 고려되고 있는 제도적 변화를 앞두고 무용계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수십 년간 이 제도는 국내 무용계를 성장시켰지만 그러나 동시에 젊은 남성 무용수들로 하여금 수십 번의 콩쿠르에 도전하게 하는 맹목적인 현상을 초래하기도 했다. 권령은이 <글로리>를 통해 꼬집었듯, 기술적 측면을 가장 중요시 하는 콩쿠르의 특성상 짧은 시간 내에 최고의 테크닉을 다량 보여주기 위해 몸을 혹사시키는 훈련(연습보다는 훈련에 가깝다), 해외 각 콩쿠르 출전을 위해 소요되는 수천 만원에 이르는 비용(이를 예방하기 위해 우리나라에서 개최되는 세 개의 국제 콩쿠르가 예술요원 편입이 가능한 콩쿠르로 지정되었지만, 반면 심사의 공정성으로부터는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그리고 수년간 오직 콩쿠르에만 매달림에 따라 초래되는 정신적 신체적 문제 등 부작용 또한 상당하다. 뛰어난 무용수들의 활동 공백을 막고 예술가로서의 성장을 위해 마련된 제도가, 콩쿠르 입상을 위해 수년 간 기술적 훈련에만 매진하며 주객전도 현상을 초래하는 이 아이러니를 국내 무용계는 꽤 오랜 시간 외면해왔다. 뿐만 아니라 병역 면제를 받는 무용수들 중 이 제도를 발판삼아 훌륭한 예술가로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는 경우도 아주 소수에 불과하다.
병역 문제에 매우 예민한 징병제 사회에서 대중적으로 공론화 된 이상, 본 제도에 대한 대대적인 개편은 불가피해 보인다. 이에 국내 무용계는 무조건적인 거부 반응이 아니라, 내부의 문화를 다시 한 번 들여다보고, 보다 근본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변화를 고민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오늘날에 적합한 사회적 합의와 예술적 성취 모두 이끌어낼 수 있는 제도적 변화가 이루어지길 기대해본다.
(이 글은 문화월간지 쿨투라에 기고한 칼럼입니다. 2018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