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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수진 Oct 17. 2019

정치적으로 무용 읽기

북한 집체무용 <아리랑>으로 보는, 몸의 통제와 이데올로기

지난해 9월 평양 정상회담 당시 문재인 대통령 내외가 관람한 ‘빛나는 조국’ 공연은 북한이 정권 수립 7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한 대집단체조로, 2013년 이후 중단된 ‘아리랑 축전’을 대체하는 북한의 새로운 대표 공연이자 관광 상품이다.


정상회담 둘째 날인 9월 19일 개최된 공연은 체제 선전과 반미 구호 등은 최대한 줄이고 문대통령을 환영하는 내용을 비롯해 변화하는 대외관계, 평화와 통일 시대 등의 주제를 추가하여 수정된 버전으로 알려졌는데, 애초에 체제의 정당성과 우월성을 과시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는 이 집단체조를 관람하는 문대통령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최다 인원이 참여하는 공연으로 2007년 기네스북에 오른 바 있는 ‘아리랑 축전’이 그동안 비판을 받아왔던 이유는 대부분 북한 체제의 과거와 현재를 형상화하며 체제 찬양과 선전을 주 목적으로 해왔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새롭게 제작된 ‘빛나는 조국’의 경우, 그 내용이 과거와 많이 달라져 여론은 김정은 위원장 체제의 변화 가능성을 추측하지만, 사실 주목해야하는 점은 ‘아리랑 축전’과는 전혀 달라지지 않은 집체무용의 형식 그 자체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XXl1_lLMQdI

 

수 만 명의 몸들이 움직인다. 작고 마른 아이들이 시종일관 웃으며 아슬아슬한 기교를 부리고 거대한 군무는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다. 완벽하게 훈련되어 엄청난 볼거리를 제공하는 이 몸들은 사람의 것이라기보다는 로봇이나 꼭두각시 인형들의 집합이라 여겨진다.


특히 이 몸들의 뒤 쪽에 자리한 카드섹션에는 만 여 명의 아이들이 공연 내내 손에 쥔 카드를 뒤집으며 북한이 얼마나 위대하고 아름다운 나라인지를 관객들에게 쉴 새 없이 제시한다. 무용수들이 거대하고 아름다운 형상들을 만들어낼 때 마다 박수갈채를 보내는 관객석에는 북한 사람들을 비롯해 평양을 방문한 관광객들이, 그리고 그 중앙에는 최고지도자가 자리하고 있다. 바깥세상에는 수 천 만 명의 관객들이 인터넷이나 TV 등의 매체를 통해 그들을 바라본다.


이 수많은 몸들을 이토록 압도적인 작품의 일부로 만듦으로써, 이 몸들을 제한하고 조종함으로써 지도자는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일까?

아리랑 축전의 어린 아이들


  이 집단 체조에 참여하는 수 만 명의 몸들은 정치적이다. 단지 체제의 문제가 아니라, 안무가와 무용수의 관계로부터 비롯되는 정치적 특성이 이 거대한 집체 무용에 고스란히 반영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무용공연에서 안무가는 무용수에게 자신이 만든 안무를 수행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몸을 통제하는 지배적인 위치에 놓인다. 다시 말해 관객들이 바라보는 무대 위 무용수의 자유로운 몸짓은 안무가가 만들어놓은 틀, 즉 정해진 안무 안에서만 자유로운 것이다.


이와 관련한 무용과 정치 담론을 살펴보면 “안무란 테크닉이나 법칙, 동작의 엮음이 아니라 몸을 통제하고 컨트롤하는 장치”(안드레 레페키)이며, “안무가가가 무용수를 조종할 수 있는 힘, 이 둘의 관계로 인해 무용은 정치적”(윌리엄 포사이드)이다.


이러한 담론을 기반으로 동시대 가장 주목받는 안무가 중 하나로 꼽히는 제롬벨은 <베로니크 두아노>를 통해 안무가와 무용수 사이에 존재하는 정치적 힘을 거부했다. 일반적으로 안무가에 의해 정해진 움직임을 수행하는 무용수라는 관계를 깨고, 그는 무용수에게 직접 본인이 하고 싶은 자신의 이야기와 추고 싶은 춤을 추도록 했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 베로니크라는 무용수는 안무가에 의해 통제되고 컨트롤되는 몸이 아닌,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위하는 자유로운 몸이 되는 것이다.  

제롬벨의 <베로니크 두아노>에서 베로니크 두아노

 이처럼 무용 작품 내에 존재하는 안무가와 무용수와의 정치적 관계는 집체무용에서 더욱 확장되어 이데올로기의 통제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빛나는 조국’은 수 만 명에 달하는 북한 사람들을 거대한 규모의 집체 무용으로 선보임으로써 국가 이데올로기를 반영한다. 연습과정과 실연에서 엄청난 고통과 희생이 수반되는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이들은 극단적인 몸의 통제를 당하며 안무가의 절대적인 힘과 저항 불가능한 무기력한 자신들의 위치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동시에 공연 내내 개개인이 모여 큰 형상을 만들어내는 것을 반복하면서 전체 속에서 비로소 개인의 존재가치를 찾는 전체주의를 재경험한다.


이것이 곧 이 집체무용을 통해 수 만 명의 몸을 통제함으로써 지도자가 얻고자 하는 가치이며 동시에 그것을 당당히 바깥 세상에 공개함으로써 자신이 지배하는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비롯해 지배자로서 자신의 절대적인 힘을 내세우기 위한 수단이라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아리랑 축전’과는 달리 체제 찬양과 반미구호는 줄었고, 남북평화와 통일에 대한 메시지를 담았다는 내용의 변화를 중심으로 김정은 위원장 체제의 변화 가능성이 시사되지만, 그 형식 자체는 고스란히 유지됨에 따라 사실상 ‘아리랑 축전’과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음을 간과할 수 없다.


북한 <아리랑>에 참여한 어린 아이들
북한 아리랑 축전

 더욱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몸의 통제에 기반한 이데올로기의 통제는 우리 남한사회에서도 종종 발견된다는 것인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삼성그룹 신입사원들이 하계수련회에서 선보이곤 했던 매스게임이다. 이건희 삼성전자회장과 이재용 부회장 등의 총수 가족이 참여하는 그룹의 주요 행사 중 하나인 수련회의 하이라이트라는 이 매스게임은 1990년대 초반부터 시작되었다고 알려졌는데, 해가 지날수록 계열사별 경쟁이 치열해지며 점점 웅장해졌다고 한다.


한때 공개된 영상을 살펴보면 수 천 명의 직원들이 카드를 들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각종 이미지와 문자를 형상화하는데, 북한의 집단체조와 전혀 다를 것이 없는 그 모습이 경악스럽다. 집단문화를 기반으로 한 집체성 훈련으로 탄생한 이 광경은 우리나라 최고 기업의 민낯을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담론 형성으로 나아가지는 못했지만, 다행히도 이 ‘전통’은 2016년 여러 이유로 폐지됐다.

https://www.youtube.com/watch?v=_DFtWPn3aBA

삼성그룹의 매스게임 영상

  몸을 통제한다는 것. 북한의 ‘빛나는 조국’은 체제의 특성상 그 정치적 속성이 잘 드러나지만, 이는 독재사회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 곳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삼성그룹의 대표 연례 행사였던 메스게임을 비롯해 각 제도 안에서 강요하는 몸의 자세와 조건, 심지어 복장 규제까지도 그 근저에는 몸과 이데올로기의 통제라는 정치학적 속성이 있음을 인식하며 비판적 성찰을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글은 문화월간지 쿨투라에 기고한 글입니다.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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