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또 이 도시가 좋아지면 어쩌냐..
기억하자! 함피 직행버스는 세상에 없다
고아에서 출발한 야간버스는 예상보다 너무도 일찍 함피에 도착해버렸다. 사실은 함피가 아닌 호스펫에! 사라진 고대 왕조의 수도인 함피. 지금은 사람이 많이 살지 않기에 여행자는 인근 도시 ‘호스펫’에 내려서 버스나 툭툭을 타고 가야 한다는 설명을... 봤지만... 버스 예약 사이트에는 ‘함피’와 ‘호스펫’이 구분되어 있었으며 본인은 분명 ‘함피’행 버스를 선택했다고! 어젯밤에 버스에 올라탈 때 ‘함피 가죠?’에 그렇다고 돌아온 대답은 무엇이란 말인가!
얄짤없이 버스는 호스펫에 서버렸다.
‘혹시 여기서 1차로 내려주고 함피까지 버스가 들어가는 게 아닐까?’
기대를 품고 자리에서 버티고 있으니 빨리 내리라는 호통이 들린다.
‘그래... 함피행 버스는 없는 거였어...’
심지어 버스 정류장도 아닌 큰길가 어딘가에서 내리라고 성화다. 고아에서 함께 버스에 탄 수많은 여행자들도 역시나 비슷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버스에서 쫓겨나야 했다. 아직 동도 트기 전인 새벽 5시.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수많은 툭툭 기사가 다가온다.
“함피 갈 거지? 내가 태워줄게!”
물론 공짜란 말은 아니다.
“얼마야?”
“600루피!”
뭐라고?
15분 거리에 10,000원 돈을 받는다고? 안타 이 새끼야....
딱 하나 문 연 카페 (인지 밥집인지)가 있길래 거기서 버스가 다니는 시간이 될 때까지 버텨보려 한다. 흥정을 포기하고 걸어가자 역시나 기사가 알아서 값을 깎는다.
“500루피!”
“노우!”
“하우 머치 유 원트?”
“200루피”
“오 노우~ 임파서블~”
너무 후려친 걸까..? 이 새벽에 와서 존-버한 성의를 좀 쳐줄까..?
“300루피 어때?”
“오케이. 고”
처음에 부른 값의 반값에 함피행 툭툭을 타게 되었다. 이미 모든 여행자가 각자의 숙소, 기사를 만나 흩어지고 없었기에 그는 300루피나마 수락할 수밖에 없었나 보다.
함피 숙소는 무조건 함피 바자르 근처로
전날에 부킹닷컴에서 함피 숙소를 아무리 찾아봐도 마땅한 게 없었다. 가격이 마음에 들면 위치가 별로고 위치가 마음에 들면 가격이 미쳐버린 식. 도착해서 걸어 다니며 숙소를 찾을 생각이었는데, 아직도 시간은 5시 30분. 도시는 고요하기만 하다. 툭툭 기사가 예약해둔 숙소가 있냐고 묻는다. 사실 없기는 한데, 이런 제안은 별로인 경우가 많아 고민이 된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따라가 본 기사 주선 홈스테이. 의외로 위치도 함피 바자르 근처로 중심이며 시설도 부킹닷컴에서 본 것 이상으로 괜찮다.?. 가격도 1200루피로 겨울 시즌에는 엄청나게 바가지라는 함피의 평균 숙소 값에 비하면 그럭저럭 괜찮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제안은 지금 (새벽 6시)부터 방을 쓸 수 있다는 점. 더 알아볼 필요가 있을까? 바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함피에는 ‘숙소 예약 사이트’에 나오지 않는 방 1-2개 규모의 홈스테이가 많은데, 그게 의외로 시설과 가격이 괜찮다. 툭툭 값도 깎아주고 방도 소개해 준 기사에게 고마울 정도. (Praveen 페밀리 홈에 묵었다)
짐을 내려놓고 그대로 침대로 다이빙해 잠을 잤다. 누워오는 야간 버스를 탔지만 어제는 자리를 잘못 잡아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맨 앞자리였던 탓에 제대로 잠을 못 잤기에. 눈을 뜨니 4시간이 삭제된 후였다. 이제야 함피를 구경하러 나갈 힘이 났다.
함피에는 맛집이 없다
우선 밥을 먹으러 나가야겠다. 구글맵을 켜서 식당을 검색했지만, 엄청난 시골이자 채식 문화 동네인 함피에는 그럴싸한 식당이 없는 것 같아 보인다. 며칠 돌아다녀 본 뒤에는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났다. 한번 들르는 관광객이 주된, 오래전 도시가 멸망해 지금은 장사하는 사람만 가득한, 대부분이 건조한 돌밭인 땅, 채식 문화 도시에서 식문화가 발전하였을 리가. 함피에서는 맛집을 찾지 말자. 주유하는 기분으로 볶음밥을 욱여넣고 나섰다.
함피 관광의 중심 : 비루팍샤 사원
숙소 바로 옆에 비루팍샤 사원이 있어 당연하게도 그곳부터 들렀다. 비루팍샤 사원은 함피에서 가장 오래된 대표적인 건물 중 하나로 고푸람이 56m의 높이로 이 지역 사원 중 제일 크고 웅장하다. 함피는 인도인들도 꼭 한번 와보고 싶어 하는 관광지라, 외국인은 물론 인도인 관광객도 사원 내부에 많았다.
내부는 여전히 사원의 기능을 겸하는 신성한 곳으로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한다. (신성함을 호소하는 만큼 바닥 청소에 열심은 아니다. 돌아오면 발이 새카매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성인 25루피의 입장료를 받았는데 티켓을 주지는 않았다. 후에 만난 한국인 언니들에게 들은 바로는 아무래도 작은 사기였던 것 같다. 사람마다 받는 돈이 다르므로 대체 입장권이 얼마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것이 인도 스타일이려니... 그래도 조금은 관용이 생긴 여행자가 된 것 같다.
비루팍샤 사원, 열심히 사진 찍어도 됩니다
사원에서 코끼리 축복도 받고 원숭이의 습격도 당했다. 들어갈 때 ‘촬영 금지’라고 신신당부를 하기에 카메라를 집어넣었는데, 후에 인도인들이 신나게 찍는 걸 보니 분통이 터진다. 그냥 카메라로 막 찍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갈색 옷을 입은 관리자가 따봉을 날릴 정도. 비루팍샤 사원에 가신다면 그냥 막 찍으시라...
안에서 한국인 언니 두 명을 우연히 만났다. 인도에 90년대에 오고 다시 온다는 진정한 여행 마니아들이었다. 이것도 인연인데 커피를 한 잔 사 주신다 하여 근처 카페에서 이야기를 했다. 나도 그렇게 늙어가고 싶은 롤 모델 같은 언니들이었다.
함피의 석양은 마탕가힐에서
산이 많은 함피에는 여러 선셋 포인트가 있지만, 그중 으뜸은 ‘마타가 힐’이라고 한다. 그 소리를 언니들에게 오늘에야 주워들은 나는 오늘 즉시 마탕가힐에 오르기로 마음먹었다.
비루팍샤 사원에서 마탕가힐 입구까지는 20분 정도 평지를 걸으면 되므로 힘들 것 없었지만, 본격 언덕 산행이 시작되자 이야기가 달라진다.
하누만신 (원숭이신)의 고향이라는 함피에는 어찌나 원숭이도 많던지. 좁은 돌길을 기어오르는 동안 원숭이 새끼가 접근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원숭이라 말하면 작고 귀엽고 행동은 우스울 것 같지만, 산에 사는 녀석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관광객의 가방에서 뭐라도 하나 훔쳐먹어 보겠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녀석들을 셀카봉으로 쫓아가며, 바닥이 거의 다 닳아서 미끄러운 크록스로 부스러지는 흙바닥을 디뎌가며. 기듯이 걸어 정상에 올랐다.
이 여자는 안 좋아하는 도시가 없네?
이렇게 올라서 마주한 석양이라 그런가. 이탈리아 여행자의 말처럼 함피는 정말 ‘세상에 여기밖에 없는 풍경’이 맞았다. 마말라뿌람에서는 하나만으로도 신기해서 관광지가 된 ‘버터볼같은 돌’이 수백수천 개 지천으로 널려있는 풍경.
돌이 모여 산을 이루고 그 틈바구니마다 무너진 유적이 알뜰히 남아있는데, 이건 내 사진/글솜씨가 부족해서 그렇기도 하지만 정말로 묘사가 불가하기도 한 영역이다. 인생에 꼭 한 번은 두 눈으로 직접 볼 가치가 있는 곳. 이 먼 인도까지 날아와서 또 대륙 중원의 함피까지 버스에 실려 들어온 보람이 150% 채워졌다.
원래 유적만 보고 떠나려 했지만, 어쩐지 이 이상한 풍경의 함피가 좋아질 것 같다. (이 여자는 안 좋아하는 도시가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