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삶의 모양

by 틈새의 희망

내가 나고 자란 동네는 부산 반여동이었다. 소위 고바위(은근슬쩍 뿌리내린 일본어로 부산에서는 경사나 비탈길을 의미함) 초량동 달동네에 물난리가 나서 동네 전체가 이주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곳이다.


빨간 벽돌 건물이 언덕을 따라 지어졌고, 작게는 4집 많게는 10집 넘게 다세대 건물에 함께 살았다.

사는 형편은 서로 비슷했다.

내 집이냐 세들어 사느냐 정도만 달랐을 뿐, 크게 구분되지 않았다.

알록달록한 물탱크가 다세대 빌라 옥상 위에 놓여있는 집들이 성냥갑처럼 모여있었다.


ⓒ 블루마린 네이버 블로그 (2023. 4. 12.)


그 동네에서 나고 자란 나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어울리던 친구들과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녔다.

어린 학생들이 너무 많아서, 내가 1학년일 때까지만 해도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누어 등하교를 했다.

한 반에 40명씩 13반 가까이 될 정도였다. 그만큼 동네에는 사람이 많았다.


동네를 벗어나 다른 동네 사람들을 만나게 된 건 고등학교 입학 이후였다.

친구가 "어디 사냐"고 물을 때, 우리 동네 이름을 말하면서 왠지 부끄러움을 느꼈다.

대표적인 못사는 동네라는 이미지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해운대 신시가지에 사는 아이들, 남천동에 사는 아이들 뭐 이런 식으로

어느 동네에 산다는 것이 곧 그 집의 수준을 말하는 시대가 시작됐다.

내심 그 질문이 우리 집의 경제적 수준을 대신 말해주는 듯 했다.


그때부터였다. 그 동네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생긴 것도.

어린 시절, 서로 집의 형편을 알고, 엄마가 일하러 가면 옆집 친구집 가서 노는 것이 당연했고,

서로 반찬을 나눠먹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냥 그 동네에서만 살다보니,

동네를 벗어난 세상을 마주하지 못했던 나는 점점 다른 세상을 상상하게 되었다.


고등학교에 가면서, 셔틀을 타고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아파트에 사는 친구들,

소위 잘사는 동네에 사는 친구들의 옷차림,

그들의 가방브랜드,

신는 신발의 브랜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차이를 느꼈다. 그리고 그때부터 질문을 갖기 시작했다.




왜 우리집 형편이 나아지지 않을까?


분명 우리 엄마아빠는 열심히 살았는데,

왜 우리는 아직도 그 동네에 살고 있을까?

왜 우리 엄마는 늘 쪼들린다는 말을 할까?


엄마 아빠는 한번도 일을 게을리 한 적이 없다.

IMF 이후 아빠의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없던 형편이 더 어려워졌다.

엄마는 집에서 하던 부업을 접고, 재봉 공장에 다니기 시작했다.

아빠는 한 2년 야채장사, 짝퉁 유통 등 여러 일을 거쳤고,

누군가의 소개로 거제도 조선소로 내려갔다. 내가 중학교 3학년때 였다.


호기롭게 시작했던 우리 아빠의 첫 사업이자

마지막 사업은 부산의 지역 산업이었던 신발 공장이었다.

1년 남짓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IMF의 여파로 그대로 무너졌다.

물론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아빠 스스로 시작했던 것은 아니다.

회사에서 만난 아빠 동료가 함께 사업을 해보자는 제안 때문이었다.

신발공장은 IMF직격탄을 맞고 수 많은 신발 공장들과 함께 사라졌다.

그렇게 아빠는 원치 않게 실직자가 되었다.


아빠의 친구는 건설 경기가 어려워지자, 택시 운전을 시작했다.

큰 아빠는 갑자기 잘 나가던 동네 세탁소를 정리했다.

할머니는 폐암 진단 전까지 동네에 폐지를 주우러 다니셨다.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

늘 열심히 살아온 그들의 삶은 왜 변하지 않는 지, 아니 왜 더 나빠지는 걸까.

내가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질문을 갖게 된 것은 그런 여러가지 삶의 모양들 때문이었다.


10년 넘게 시장에서 김을 굽던 아줌마, 매일 같은 자리를 지키던 생선 장수 아줌마,

그 풍경은 내가 동네를 떠나기까지도 그대로였다.

매일 똑같은 곳에서 자판을 깔고 생선 장사를 하던 아줌마의 생선 파는 자판도 그대로였다.

자판에서 가게를 얻어 옮겨가는 모습을 내가 그 동네를 떠나기 까지 확인하지 못했다.


거제도 조선소 하청업체에서 니스칠을 하던 아빠는 거제도 조선소가 어려워지자, 명예 퇴직을 했다.

지금 아빠는 아파트에서 청소 일을 한다.

어느날 술 한잔을 걸치고는 아빠가 말했다.


"사람이 배워야하더라고, 배워야 대단한 사람이 되더라고, 내가 못 배운게 이렇게 한이 될 줄 몰랐지."


엄마는 아빠를 따라 거제도 조선소에서 1년을 일하다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다.

내가 옷 먼지 구덩이에서는 살아도 조선소 일은 도저히 못하겠다는 이유였다.

그런 일을 아빠는 꼬박 15년을 했다.


엄마는 아는 분의 소개로 공항에서 청소 일을 한다.

잘나가는 동네 세탁소 주인이었던 큰아빠는 타이어 공장에 취업했다.

세탁소 기술 외에 가진 것이 없었던 큰아빠가 세탁소를 접고 선택할 수 있는 건

어떤 조건도 붙지 않는 공장이었다.

누구든 조금만 익히면 할 수 있는 일이었기에,

그리고 그 나이에 누구든 일할 수 있는 곳이었기에 타이어 공장을 다녔다.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


나의 가장 가까운 부모님의 삶, 친적들의 삶,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더 열악해지는 노동 조건과 삶의 환경이 변하지 않는 이유를 찾고 싶었다.

어쩌면 비주류로 분류되는 삶의 모양은 내 근처에 녹아들어있었다.

그 삶은 치열했지만,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들어주지 않으면, 어디서도 말하지 않는 사람들.

사실 누구도 귀기울여주지 않는 사람들.

빽도, 힘도, 돈도, 배움도 부족한 사람들.


숨겨진 소외된 목소리를 듣고

한 사람의 삶의 모양을 열심히 드려다보기 시작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나의 어린 시절에 만난 삶의 풍경이 그러했기에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내가 도시라는 공간에서 정책을 연구하게 된 삶의 원천이

곧 나의 가장 가까운 삶의 모양들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