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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윤 Dec 18. 2018

1. 21세기 돈키호테

정합성 - (1)

 모두가 알지만 누구도 끝까지 읽지 않은 책을 고전이라고 한다는데, 글에서 거론될 고전인 <돈키호테> 또한 그 명성에 걸맞은 냉대를 누리는 중이다. 당당한 모두의 일원이자 누군가에 속하지 않는 교양인으로서 나 또한 그 냉대에 일조하는 중이라, 누군가 <돈키호테>에 대해 묻는다면, ‘기사도 문학에 심취해 실성한 노인이, 풍차를 괴물로 착각하여 달려드는 책’ 이상을 말하지 못할 준비가 된 상태였다.


 이런 이유로, <돈키호테>와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곳이 누구를 위해 준비되었는지에 대해 설명한” <신곡>. 더 나아가 “악마와의 내기 속에서 인간 안의 가장 고귀한 것에 대해서 역설한” <파우스트>까지 읽고 나름의 의견을 정립하여 모두가 아는 것 이상을 쏟아내던 그녀는 내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모두가 그 제목을 알겠지만, 고전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겨본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녀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난 자리는 장학회에서 마련한 작가와의 소규모 만남이었다. 회원의 소개로 초대된 그녀는, 작가라면 응당 그래야 한다는 듯이, 독특한 첫인상을 말 그대로, ‘내뿜고’ 있었다. 상대방의 정면을 곧바로 향하는 듯하면서도 살짝 위를 바라보는 흐린 시선. 그 끝이 어디를 향하는 지 설명하기 위해 굳이 즐겨갔던 여행지로 그리스를 꼽을 필요는 없었다. 짙은 갈색으로 탄 얼굴 위로 새겨진 주름들이 지중해의 햇살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렬한 인상도, 급히 뛰어오느라 몰아쉬던 숨보다 더 가쁘게 말을 쏟아내는 모습에 빠르게 묻혀버렸다. 라디오 피디로 나름의 경력을 쌓았다던 그녀는, 살면서 본 사람들 중 화면 속 인터넷 강사의 2배속 강의 이외엔 가장 빠르면서도 또박또박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떠올려보면 상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할 말만 하는 것까지 강의와 비슷해서 혹 대본을 준비한 건 아니었나하는 궁금증을 자아냈다.


 대화는 속도에 어울리는 자유분방함도 갖추고 있어서, 여러 소재를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진행됐고, 시작은 읽어오기로 했던 작가의 저서였다. 2017년 발행된 신간만 6만권에 육박한다는 것이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한 책이라, 내용이나 감상은 떠오르지 않고, 저자가 가진 자부심에 놀랐던 기억만 남았다. 이야깃거리를 준비해온 유일한 소재가 재빨리 마무리된걸 보면,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느낌을 받지 않았나 싶다.


 독특한 첫인상 외엔 특별할 게 없던 모임에 생기를 넣어준 소재는 여행이었다. 작가에게 지중해는 선선한 온도의 바람과 드문드문 보이는 구름 옆으로 내리는 맑은 햇살로 남았는데, 가 본적 없는 내가 떠올리는 이미지와 너무 흡사해서 익숙함을 넘어선 식상함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흥미로운 점은 오히려, 그렇게 좋아하던 지중해에 더는 가지 않는 이유였다.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느끼고 난 후, 비행기를 탈 때 제공되는 일회용품 때문에 비행기를 타지 않기로 한 결심까진 평범한 수준으로 의아했다. 그녀의 특별함은 그 말과 동시에 심심한 손을 달래듯 일회용 냅킨을 조각조각 찢는데 있었다. 정면 살짝 위 허공으로 향하는 시선과 환경을 생각한 결심에 대해 말하며 짓는 뿌듯한 표정, 말끔히 조각난 휴지의 조합은 삼류 공포영화의 목이 돌아간 채 웃고 있는 인형처럼 기괴했다.    


 혼자 보고 넘기기엔 아까운 광경이기도 하거니와 그에 대해서도 나름의 의견을 정립하여 놓고 특유의 청산유수를 보여줄 지도 모른다는 약간의 기대도 생긴 마당에, 마침 대화의 분위기도 새로운 이야기를 꺼내기 알맞게 지루해진 것 같아, 질문했다. 조각난 휴지를 환기하는 정도의 물음에, 몇 번의 앓는 소리와 난처한 웃음, 잠시간의 정적으로 대신한 답변은 기대에 부응하진 못했지만, 재미난 연상을 가능케 했다.


 그녀는, 이를테면, 21세기 돈키호테였다. 환경문제에 심취한 나머지, 비행기 속 일회용품을 괴물로 착각하여 홀린 눈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그녀가 풍차에 부딪혀 꼴사납게 땅바닥을 나뒹구는 일은 없었는데, 기꺼이 찢어온 휴지조각들이 모순된 행동들 사이에 끼어 들어가 나름의 완충작용을 한 듯싶어 다행스러웠다. 너무 뻔히 보이는 모순은 세르반테스가 기사도 문학을 풍자키 위해 내세운 우스꽝스러운 노인처럼, 뭔가를 조롱하기 위한 나름의 장치가 아닐까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의견을 기반으로 한 삶을 실천하려는 교양인에겐 그 대가로 꽤 번거로운 작업이 필요하다. 단어들의 범위를 명확히 규정하고 생활 속 행동이나 생각들이 의견에 비추어 어긋나는지 그때그때 확인하는 작업이다. “사육과 도살 과정에서 고통을 주기 때문에 육식은 나쁘고 그에 반대한다”라는 의견을 기반으로 한 삶에는 고통의 기준, 예외를 두는 경우와 그 이유 등에 대해 생각하며 의견을 다듬고 일상 속의 육식과 관련된 선택마다 의견에 부합하는지 따지는 자기검열의 과정이 필수적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을 때, 의견은 규칙적인 생활양식으로써 삶 속에 녹아들기 보단, 일부 행동에만 제한된 순간의 변덕으로 전락한다. 물론, 제한된 변덕이 도덕적으로 나쁘다는 주장은 아니다. 오히려 순간적인 선호에 솔직한 삶을 긍정한다. 문제는 자의식과 행동 사이의 괴리에 있다. 그날그날의 입맛에 따라 행동하면서 스스로 방향을 잡은 원칙을 따르는 체 하는 모습은 추하다.


 이런 자세는, 우스운 꼴로 아름다운 돈키호테와도 사뭇 다르다. 모두가 아는 풍차를 거인으로 착각한 일화 외에도, 그는 바보 같은 착각에 빠지기 일쑤다. 창녀를 공주로 생각하며 사랑하고, 돼지가죽자루를 공주의 원수로 알고 혈투를 벌이기도 한다. 일견 우습지만, 일관된 행동들에 자연스레 묻어나는 진정성이, 생각과 감정에 솔직하며 숭상하는 기사도를 따르는 모습들이, 실성한 노인을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로 만들고, 역사에 길이 남기며, 아름다운 삶의 한 지향점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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