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드리아해를 품은 보석, 크로아티아
그날 아침, 아련하게 들려오는 아잔 소리에 눈을 떴다. 비가 내린 뒤 쌀쌀해진 이스탄불의 날씨 때문인지, 아니면 오랜 여행의 지침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침부터 머리가 띵하게 울리고 목이 아파 왔다. 아무래도 감기가 걸린 모양이다. 어제와는 달리 콧물을 훌쩍거리는 빈도도 높아져만 가고 여행이 길어지면서 몸도 마음도 조금씩 지쳐만 가는 것 같다. 하는 수 없이 감기약이라도 사기 위해 술탄 아흐멧 주변의 약국에 들렀으나 기분만 상한 채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많이 아프면 의사를 찾아가라고 말하거나, 이상한 약품을 한 움큼 내주며 비싼 가격을 부르는 식이다. 이럴 땐 한국에서 가져온 테라플루가 딱인데, 동이 난지 이미 오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많이 사 왔을 것을…
About Croatia by SUKAVIA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사는 법.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호텔 건너편 허름한 구멍가게에 들러 나의 증상을 설명하니, 상점 주인은 타이롤핫이라고 이름 붙은 테라플루와 비슷한 발포 감기약을 내어준다. ‘타이롤핫(TYLOLHOT)’이라 불리는 이 녀석은 의사의 처방전 없이도 구입이 가능해 병원이나 약국을 경계하는 나 같은 외국인 여행자에겐 사막 위 오아시스 같은 존재가 되어 준다. 진통, 해열제의 일종인 파라세타몰과 콧물 흘림을 멈추도록 도와주는 항히스타민이 주성분이니, 이 정도 감기쯤이야 금방 떨어져 나갈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제 차이(Chai)가 지겨워졌나 보군.” 매일 아침, 커피와 차이를 대령해 주던 호텔 직원이 차이 대신 타이롤핫을 마시는 나를 보고 한 마디 던진다. 아침 식사를 파라세타몰과 항히스타민이 섞인 타이롤핫 감기약으로 대신하고 나니, 무거웠던 머리와 콧물, 목의 따가움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불필요한 짐을 분산시키기로 하고 몇 개는 호텔에 맡긴 채, 트렁크와 배낭 하나, 노트북, 카메라 정도만 챙겨 서둘러 로비로 나왔다. 여권과 항공권, 신용카드와 현금 등은 꺼내기 쉽게 가방 앞에 넣었다. 지난밤, 호텔 근처 뒷골목에 위치한 여행사에 들러 저렴한 가격에 공항까지 갈 수 있는 미니밴도 예약해 두었다. 무거운 트렁크와 배낭을 멘 채 이른 아침부터 붐비는 이스탄불의 트램과 지하철을 탈 자신도 없을뿐더러 술탄 아흐멧의 가파른 언덕도, 유난히도 불규칙한 보도블록의 덜컹거림도 더 이상 느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텔을 출발한 미니밴은 벌써 한 시간째 술탄 아흐멧 근처를 맴돌며 호텔들을 들락거린다. 놀랄 일도 아니다. 그리 크지도 않은 미니밴에 채울 수 있는 여행자는 죄다 채우고 있다. 콩나물시루처럼 시끌벅적해진 미니밴, 기분이 좋아진 기사 아저씨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헛웃음만 나온다. 아마도 내가 묶고 있던 호텔이 픽업 여정의 첫 시작이었나 보다. 덕분에 가장 좋은 자리를 선점할 수 있었고 그 때문에 한 시간째 술탄 아흐멧 주변을 돌고 있지만 기분은 이상하리만큼 통쾌하고 좋았다. 크고 작은 트렁크와 배낭들이 차량 안으로 하나둘 쌓이고 문조차 닫기 힘들어졌을 무렵, 그제야 미니밴은 푸른빛의 술탄 아흐멧을 벗어나기 시작한다. 차 창문을 열어 매캐한 바깥공기를 깊이 들이마신다. 운전하는 내내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추느라 작은 레버를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는 운전기사와 흘러나오는 터키 음악에 심취해 목청을 높여 노래를 거드는 보조 기사. 둘은 여행자들의 기분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완벽한 콤비로 이해할 수 없는 대화를 이어나갔다. 참다못해 가방 속 이어폰을 꺼내 귀를 틀어막아 보지만 아쉽게도 큰 효과가 없다.
참고로 이스탄불에서 나의 이어폰은 음악을 듣는 용도보다는 외부로부터의 소음을 막기 위한 도구로 더 많이 사용되었다는 사실. 운전기사의 목청이 커질수록 이어폰 속 노랫소리도 함께 커져갔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이스탄불의 풍경을 감상하며 다소 이른 시간에 터키 아타튀르크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발권을 마치고 라운지에서 잠시 숨을 돌려본다. 이스탄불에서 출발할 비행기는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에 도착할 예정이고, 이후 나는 야간 버스를 타고 스플릿으로 직행할 계획이다.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바클라바(Baklava)를 흡입하며 출발을 기다린다.
실로 오랜만에 프로펠러가 달린 소형 비행기를 타 본다. 늦은 밤 어두운 활주로의 조명은 크로아티아를 상징하는 붉은 체크무늬를 정확히 비추고 있다. 가늘게 내리는 빗방울이 점퍼에 맺힌다. 내리는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비행기에 탑승했다.
예정보다 조금 늦은 저녁 8시 15분, OU351 편 항공기는 100여 명의 승객을 태우고 목적지인 크로아티아 자그레브(Zagreb)로 날아올랐다. 비행기는 연신 굉음을 뿜어내며 하늘을 날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도착을 알리는 기내 방송이 간략하게 들려온다. 감기약과 잠에 취해, 반쯤 나간 정신을 바로잡고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 심사장으로 이동한다. 마지막까지 문을 연 환전소를 찾아 난생처음 보는 크로아티아 화폐 쿠나(Kuna)로 환전을 한다. 밤 10시 20분을 조금 넘긴 시각, 자그레브 역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지형학적으로 알프스 산맥과 판노니안 평원을 끼고 있으며 발칸 반도의 세르비아, 헝가리, 슬로베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곳. 나는 이곳을 '크로아티아'라 부르고,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이곳을 ‘Hrvatska’라 쓰고 ‘흐르바츠카’라 이야기한다.
국토 면적은 56,542km2로 남한 면적의 절반 정도. 인구는 440만 명 남짓. 국토는 작지만 5,835km의 해안선과 1,244여 개의 크고 작은 섬을 거느리고 있어 아드리아 해(Adriatic Sea) 최고의 해양 강국으로도 통한다. '아드리아 해'는 지중해 북부 이탈리아 반도와 발칸 반도(크로아티아, 몬테네그로, 알바니아)를 거치는 총길이 800km의 좁고 긴 해역을 의미한다. 크로아티아와 인접한 해역의 경우, 유난히도 굴곡이 심한 해안 층 때문에 갈에슨잭 섬과 같은 독특한 형태의 섬이 많이 발달했다.
아드리아 해를 따라 늘어진 서남부 해안의 고즈넉한 도시들과 아름다운 자연환경은 전 세계 여행자와 관광객들에게 꼭 한번 가보아야 할 관광명소로 칭송받는다. 사람들은 이곳을 ‘아드리아 해의 진주’라고도 칭하기 시작했다. 이유야 어쨌든 이름깨나 알려진 유럽의 여느 국가와는 달리, 부족한 정보와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발칸 반도의 특성 때문에 모든 것이 낯설다. 그럼에도 크로아티아 여행을 결심한 이유는 낯섦음을 익숙함으로 바꾸고 싶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욕구 때문이었다.
여행을 준비하는 내내 설렘과 분함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머리와 가슴에 요동친다. 한 가지도 녹록한 게 없다. 제대로 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이 없다 보니 대부분의 시간을 해외 여행 정보 사이트에 의존해야만 했다. 웹 서핑을 하며 길을 잃기도 여러 번, 열지 말아야 할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 마냥, ‘꼭 가보아야 하는 곳’, ‘꼭 먹어야 하는 것’, ‘꼭 해야 하는 것’ 들이 하루하루 늘어만 간다. 그 결과 긴 한숨과 짜증 썩인 육두문자가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오길 수차례, 결국 "에라,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될 대로 되라지"라는 마음으로 마무리됐다. 결론에 도달하고 나니, 의외로 술술 풀리기 시작한다. 항공권은 직항이 없는 관계로 터키항공을 타고 경유하는 것으로, 지역은 크게 3곳(자그레브, 스플릿, 두브로브니크). 흐바르 섬은 현지에서 결정하기로 했다. 숙소는 다행히 비수기인 관계로 생각보다 저렴하고 여유가 있어 첫 번째 도착지인 스플릿만 예약을 확정하고 나머지 예약은 현지 상황을 봐가며 결정하기로 했다. 그렇게 시작된 크로아티아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