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아티아 제2의 도시
크로아티아의 첫 여행지는 1,700년을 이어온 달마티아의 도시이자 로마시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AD 245~313)가 자신의 남은 여생을 보냈던, ‘꽃보다 누나’의 이승기와 여배우들이 선택했던 바로 그곳, 스플릿. 사실, 이곳을 찾을 무렵에는 이곳이 이토록 유명해지리라곤 예상하지 못했지만... '달마티아'란 아드리아 해를 관통하는 지역으로 현재 크로아티아의 자다르, 시베니크크닌, 스플릿, 두브로브니크 등이 해당한다. 과거로마 제국의 속주였으며 달마티안 견종의 기원이 된 지방으로도 유명하다.
스플릿은 자그레브에서 약 400km 떨어진 서남부 해안을 대표하는 지역으로 크로아티아 제2의 도시이다. 아름다운 항을 따라 형성된 구시가지와 노천카페로 유명한 리바 거리,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디오크레티아누스 궁전 등이 자리하고 있다. 구시가지의 상징인 이 궁전은 현존하는 로마 유적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건축물로 그 의미가 특별하고, 지중해의 쪽빛 바다를 품고 있는 궁전의 내부는 중세 분위기를 고스란히 간직한 다채로운 문화유산들이 보존되어 있다. 물론 발음하기조차 힘든 유적들과 쉽지 않은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수학문제를 푸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지만 정답을 맞혀야 하는 시험이 아니니, 다행이다!
중세 로마시대의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는 성벽의 안쪽에는 주피터 궁전, 디오클레티아누스묘의 흔적, 열주 광장 등이 남아있는데 본래의 역할을 다한 건축물들은 소소한 기념품을 판매하는 가게와 숙소, 레스토랑, 부티크숍으로 변신하여 크로아티아 관광산업에 일조하고 있다. 여행자들은 궁전을 비롯한 성곽 내외부의 유적들(대성당, 열주 광장, 고고학 박물관 등)이나 갤러리를 관람하거나 미로 같은 골목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시간을 보낸다. 가끔씩은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하기 위해 골목 곳곳을 미꾸라지처럼 쏘다니기도 한다. 여행 일정이 여유 있기에 서두를 필요는 없지만 반대로 너무 느긋해지는 스플릿의 일상이 조금 걱정된다. 그런들 어떠하리! 잠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마음으로 돌아가, 스플릿을 둘러보기로 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일주일...
궁전의 동문(East Gate)에 위치한 그린마켓(Green Market)이라 불리는 현지 시장을 찾아 현지인들의 소박한 삶을 구경해 보기로 했다. 유럽 치고는 촌스러운 듯 한 색상과 디자인의 의류 및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생필품, 신선한 계절 과일과 육류, 채소류 등 소소하고 평범한 시장 풍경이다. 얼핏 봐도 내게는 맞지 않을 것 같은 옷가지들, 입맛에는 맞지 않을 것 같은 가공 육류들, 눈을 씻고 찾아봐도 내게 필요한 것들은 그리 많지 않다. 뭐라도 사갈 요량에 신선해 보이는 과일 몇 가지와 스플릿을 기념할 수 있는 기념품을 구입했다. 기껏해야 10쿠나를 넘지 않는 기념품들이다. 바가지를 쓰지 않았음에 행복해했고 혹시라도 내가 산 가격보다 싸게 파는 가게를 발견하면 무척이나 화가 났다. 시장 구경을 포함한 위대한 세계문화유산 탐방은 시도 이틀 만에 종료됐다. 이후 대부분의 날은 한적한 노천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사진을 찍고 근처 동네를 어슬렁거리 는 한량이 되어 보낸 시간뿐이다. 스플릿의 항구 주변은 흐바르 섬과 이탈리아로 오가는 페리터미널과 요트, 보트 정박지, 크로아티아 주변 도시를 오가는 기차역, 버스 정류장이 위치해 있어 스플릿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 모든 교통이 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 까닭에 여행자들은 어렵지 않게 주변 지역을 넘나 든다. 자그레브에서 버스를 타고 스플릿에 들어오는 여행자라면, 오바라 크네자 도마고자2 로드(Obala Kneza Domagoja II)라 불리는 거리에서 내리게 되는데 어떤 수단을 이용하든지 간에 몇 분만에 구시가지로 도달할 수 있다. 대부분의 여행자는 리바 거리로 통하는 구시가지 중심으로 스플릿을 여행을 하게 된다.
‘프레포로다(Preporoda)’ 또는 ‘오바라 흐바스토그 나라드노그 프레포로다(Obala Hrvatskog Narodnog Preporoda)’라 불리는 마을의 대표 해안 거리는 ‘리바’라는 이름으로 더욱 유명한데 흡사 카페거리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유럽풍 노천카페들이 가득하다. 500m 남짓한 리바 거리에는 유럽풍 레스토랑과 노천카페를 비롯해 여행자들을 위한 환전소, 여행사, 우체국, ATM 등의 편의시설이 자리하고 있다. 거리를 화사하게 수놓고 있는 리바의 노천카페에는 커피 향을 따라 나온 현지인들과 이국적인 분위기를 경험하기 위한 여행자들로 즐비하다.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커피는 향이 일품이다. 철제 의자와 고급스러운 티크우드의 테이블, 높게 달린 파라솔 사이로 펼쳐진 아드리아 해의 모습은 이곳을 찾은 모든 이들에게 잊지 못할 기억을 선사한다. 물론 성수기였다면,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펼쳐야 하겠지만 다행히 12월이다. 백발의 노신사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 한산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행복하다. 커피 한 잔을 마신들, 책을 한 권 읽고 있든, 몇 시간을 앉아 있든 누구 하나 눈치를 주는 일이 없으니 말이다.
스쳐 지나가는 여행의 기억은 십중팔구 잊혀지겠지만 멈춰있는 여행의 기억은 절대로 잊혀지는 법이 없고 내 마음속 어딘가에 그대로 멈춰 있다. 오래 간직하고 싶다면, 지금 이 순간 잠시 멈춰보는 것은 어떨까. 비수기의 스플릿은 화려하지 않지만 운치 있다. 금요일 밤은 그나마 분주한 편인데 거리의 레스토랑과 술집은 꽤 늦은 시간까지 손님이 오가고, 먹고 마시는 즐거움에 빠져 시간을 보낸다. 드넓은 바다를 바라보며 삼삼오오 벤치에 앉아 맥주를 마시거나 어항 주변에 모여 앉아 맥주를 마시는 풍경은 새로울 것이 없고 이른 아침, 커피를 마셔야 할 시간에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도 쉽게 볼 수 있을 정도다.
스플릿의 하루만큼이나 리바 거리는 길다. 주말이 되면, 리바 거리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휴일을 보내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노천카페에 앉아 모닝커피나 브런치를 즐기는 사람, 항구 주변에 모여 낚시를 하는 사람, 보트를 정비하는 사람, 책을 읽는 사람, 음악을 듣는 사람, 자전거를 타고 노는 아이들, 주인과 산책을 나온 애완견들까지…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그들도 황제가 누렸던 행복은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듯하다. 행여나 축구 경기라도 있는 날에는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함성이 하늘에 울려 퍼진다. 축구 경기를 함께 시청하며 잠시 그들과 함께 한마음이 되어 보는 것도 나에겐 소중한 일상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