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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KAVIA Jul 19. 2023

버킷 리스트

Bucket List

 

 꿈과 목표가 늘어만 가던 다이어리 첫 장, 가장 윗줄엔 굵은 펜으로 선명하게 ‘surfing’이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 버킷 리스트가 하나씩 지워져 가는 순간에도 언제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 역시 ‘surfing’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가장 어려운 버킷 리스트 중 가장 하나가 바로 ‘surfing’이었다. 가장 오랫동안 나만의 버킷 리스트에 머물고 있었던 서핑, 결국 지워버릴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고 난 그 기회를 마다하지 않았다. 


 담배 연기가 자욱한 공항 대합실, 삼삼오오 모여 담배 한 모금에 여행의 피로를 잠시 풀고 있었다. 늦은 밤 잠이 오지 않아 꺼낸 빛바랜 잡지 한 권, 뜨거운 태양, 부서지는 파도를 타는 서퍼들의 모습에 꿈틀거리던 본능이 되살아나버린 것이다. 평상 시라면 기분 좋은 상상만으로 잠이 들곤 했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치솟아 오르는 감정이 쉽사리 식지 않았다. 동이 터올 때까지 머릿속으로 최상의 시나리오를 써 내려갔다. 퀸 스트리트 인근에 위치한 여행사 사무실이 문을 연 시간에 맞춰 시내로 나섰다. 사진 속 목적지를 설명하고 비행기 티켓을 구입했다.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막연한 걱정과 설렘이 반복됐다. 이른 아침부터 잡지 속 사진을 찢어 사무실을 찾은 소년의 방문에 현지 *키위(*뉴질랜드 사람을 의미) 직원들도 꽤나 놀란 모양이다. 잉크가 마르기도 전 따끈따끈한 항공권을 한 장 손에 들고 거리로 나섰다. 


 햇살이 따뜻한 5월의 오클랜드는 아름다웠다. 멀끔하게 슈트를 차려입은 남자 직원이 재빨리 뛰어나와 신호등을 건너려는 나를 붙잡았다.


“뽀삐스로 가라고. 무슨 일이 생기면 아유비치인의 마데를 찾고. 그럼, 행운을 빌어, 내 이름은 조쉬아야!”


  알쏭달쏭 암호 같은 이야기들. *뽀삐스(Poppies), 아유비치인, 마데 그리고 내가 가야 하는 곳 발리. 이것이 내가 알고 있는 이번 여행의 모든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지구 반대편, 뉴질랜드에서 출발해 멜버른을 거쳐, 인도네시아 발리로 떠나게 되었다.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호주 멜버른이었다. 발리로 향하는 가루다인도네시아 항공편을 타기 위해 지루한 8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흡연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키위 녀석이 옆자리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아니나 다를까, 뉴질랜드 북섬, 왕가레이에서 살고 있는 이 녀석도 발리가 최종 목적지란다. 가방 하나가 전부인 나와는 달리, 녀석(잭)의 가방은 들기도 어려울 만큼 높고 거대했다. 대화를 이어가면서 점점 두려움과 후회가 밀려들었다. 아직 잘 곳도 정해지지 않은 상황, 길도 모르고 환전도, 아무런 정보도 없는 상황에 잭은 어이없는 웃음과 어디 한번 당해봐라는 말투로 나의 무지함을 꼬집었다. 그것도 잠시, 비행시간이 다가오면서 게이트 주변으로 누가 봐도 불량한 호주 녀석들이 하나둘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누가 들어도 ‘나는 *오지다’라고 말하듯, 강한 호주식 엑센트를 구사하며 시끄럽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점점 강해져 가는 오지들의 텃세에 잭과 나는 생각보다 빠르게 둘도 없는 절친한 친구가 되어가고 있었다. 벤치 끝에는 일본 친구들의 모습도 몇몇 보였다. 까맣게 그을린 피부, 발가락이 훤히 보이는 비치 샌들, 엉덩이까지 내려온 보드 숏을 걸친 젊은 청춘들이 비행기에 올랐다. 갑작스러운 여행, 우연한 잭과의 만남, 그렇게 시작된 서핑 트립은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키위 Kiwi_뉴질랜드 사람을 의미하는 단어

*뽀삐스 Poppies_인도네시아 발리, 꾸따비치 앞 작은 골목

*아유비치인 Ayubeach Inn_뽀삐스 골목 내 작은 로스멘 숙소

*오지 Aussie_호주, 호주사람을 의미하는 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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