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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KAVIA Jul 20. 2023

서퍼스 파라다이스, 발리

Surfer’s Paradise Bali


 난생처음 들어보는 언어다. 기장은 다소 어색한 영어 발음으로 덴파사르 국제공항 도착을 알렸다. 인도네시아 발리에 드디어 도착이다. 인도네시아, 세계사 시간에 스쳐 지나가듯이 배운 몇 줄이 내가 아는 전부다. 낯선 향기, 낯선 사람들, 낯선 언어… 그래도 다행인 건 12시간 전에 만난 잭이 옆에 있다는 사실. 발리에 관해 해박한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어 그런지 그에겐 모든 것이 익숙해 보인다. 능숙한 기술로 택시를 잡아타고 공항을 빠져나왔다. 낯선 발리의 풍경이 찻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고 붉게 물든 저녁 하늘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택시는 생각보다 좁은 골목길을 아슬아슬하게 통과하고 있었다.


 차가 지나갈 때마다 오토바이와 사람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벽으로 피해 길을 터주었다. 마치 샌드위치 속 햄이 되어버린 기분이다. 뭐 이런 곳이 다 있나 싶을 정도다. 골목 곳곳에 세워져 있는 서핑 보드들을 보고 있자니, 잘 찾아온 것 같긴 한데 도무지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좁은 골목길에서 가다 서다를 반복하다 어느 숙소 앞 주자창에 도착했다. 


 무거운 보드들이 실린 집채만 한 가방들을 내린 뒤, 믿었던 잭은 아무렇지 않게 악수를 청하며 작별의 인사를 건넸다. 순간 온몸에 힘이 빠져버렸다. 친구라고 생각했고 믿었다. 녀석이 있으니 걱정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청천벽력과 같은 마지막 인사였다. 하늘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결국 혼자가 되었다. 잘 곳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무작정 녀석만 믿고 따라온 결과다.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멍 해졌다. 게다가 배까지 고파왔다. 기내에서 먹은 샌드위치가 전부이니 그럴 만도 하다. 


 다행히 비집고 들어온 골목에는 허름하지만 손님이 꽤 있는 식당들이 보인다. 일단 목이라도 축일 겸 식당으로 들어가 시원한 음료 한 잔을 주문하고 사태를 파악하기로 했다. 식당 메뉴도 낯설어 우선은 익숙한 스파게티를 시켰다. 그리고 정확히 1시간 뒤 주문한 스파게티가 나왔다. 마음 같아선 몇 번이고 취소를 하고 나가고 싶었지만 마땅히 갈 곳도 없고 아는 것도 없는지라 그냥 기다렸다. 내가 꿈꾸던 발리, 내가 그리던 모습과는 분명 달랐다. 


 잠시 후 요란한 오토바이 소리가 식당 앞에서 멈췄다. 2~3명의 서양인들이 식당으로 들어섰다. 잭이었다. 무심하게 떠나버린 줄 알았던 잭이 나타난 것이다. 물론 나를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그 사이 짐을 풀고 오토바이까지 빌려 친구들과 밥을 먹으러 온 것이다. 반가움의 표시로 별이 그려진 현지 맥주를 사람 수대로 주문하고 시원한 맥주를 한 잔씩 들이 겼다. 


 내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잭이 시설은 그리 좋지 않지만 위치도 좋고 가격도 저렴하다며 자기가 묶고 있는 숙소를 추천했다. 안 그래도 막막하던 참에 나타난 잭이 이토록 고마울 수가 없었다. 숙소가 해결되고 나니 맥주 맛은 꿀맛으로 변해 있었다. 불과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순간이지만 좌절했고 나약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웃음을 되찾았다. 하늘은 여전히 파랗고 아름다웠다.


 평범해 보이는 숙소다. 인(Inn)이라 불리는 숙소인데 가격이 무척 저렴했다. 주로 서퍼들과 장기 여행자가 주로 머문다고 한다. 가장 먼저 숙소 앞에 작은 사무실과 주방이 보이고 높게 뻗은 나무들과 꽃 봉오리들이 눈에 들어왔다. 크지 않지만 아담해 보이는 정원도 있다. 


 룸 보이(Room Boy)라 부르는 로컬 남자아이가 정원 끝에 불이 켜진 방을 가리키며 열쇠와 수건을 건네준다. 침대 매트는 이미 수명을 다 한 것 같다. 매트를 살짝 눌러보니 손바닥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다. 다시 돌아오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2개의 침대 사이로 작은 테이블과 스탠드가 있고 옷가지를 넣을 수 있는 큰 옷장, 둥근 안테나가 꽂힌 사각형 TV, 샤워기가 달린 화장실도 있다. 아침은 간단한 토스트와 커피가 제공되며 에어컨과 뜨거운 물은 나오지 않는다. 하룻밤에 30,000루피아(한화 약 3,000원)를 내기로 했다. 나는 하루에 15,000루피아를 잭에게 주기로 했다. 언제까지 함께 할지는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그러기로 했다. 어두운 노란색 전등을 끼고 침대에 누워 돌아가는 팬을 보고 있자니, 만감이 교차했다. 잭은 피곤했는지, 곧바로 곯아떨어졌고 나는 혹시라도 팬이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두 눈을 감았다 떴다는 반복 하며 발리에서의 첫날밤을 보냈다.


 금발의 늘씬한 훈남 서퍼들, 팔도 다리도 참 길다. 서핑 보드를 살포시 옆구리에 끼고 해변을 거니는 저들의 모습처럼 나도 그럴 것이라 상상했다. 그러나 현실은 내가 상상했던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다.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만큼 초라했다. 뜨거운 태양과 마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몸은 검게 그을려 갔고 어느 순간 사람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현지 말을 던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실력은 이제 막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초보자이니 멋진 보드는 언감생심! 내 키보다 한 참은 큰 *롱 보드를 선택해야만 했다. 길이만 길면 괜찮은데 무게까지 상당해 해변으로 나가야 하는 길은 거짓말을 조금 더 보태 고행의 길이다. 


 롱 보드를 고집하는 롱 보더가 아닌 이상 대부분의 서퍼들은 실력이 향상될수록 보드의 길이가 짧아진다. 일명 *숏 보드! 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보드는 9’ 2″ 사이즈의 파이버글라스 소재의 롱 보드, 게다가 보드의 *데크에는 아름답고 화려한 꽃이 그려져 있다. 이쯤 되면 머릿속으로 그렸던 스웩(간지)은 물 건너 간지 오래다. 


 더욱이 혼자서는 도무지 이 긴 보드를 들고 다닐 수가 없다. 해변 모래사장 위를 질질 끌고 다니는 모습이라. 상상만으로도 웃긴데 현실이 되면 정말 웃프다. 내 품에 포근하게 안을 수 있는 숏 보드를 타려면, 과연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일까. 섣불리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싶지도 않다. 혹시라도 포기해 버리는 일이 생길까 봐.



숏 보드 - 길이가 짧은 상급자용 서프보드

롱 보드 - 서핑 입문에 사용되는 길이가 긴 보드

데크 - 서프보드의 윗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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