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서퍼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KAVIA Jul 24. 2023

피크에서 시간이 멈췄다

Peak


 오늘도 뜨거운 태양이 떠올랐다. 이른 아침, 들뜬 마음으로 보드를 챙겨 집을 나섰다. 요즘 들어 한층 더 북적이는 바다다. 그러다 보니, 파도 하나를 잡기 위해 더욱 큰 소리를 질러야 하고 보이지 않는 치열한 눈치 싸움을 펼쳐야 한다. 때로는 바다 한가운데서 서로의 목(멱살을 잡아야 하겠지만 물 위에서는 옷을 거의 안 입기에 잡을 곳이 없음)을 잡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한다. 방법은 있다. 한적한 서핑 포인트를 찾는 것이다.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한 바다를 버리고 조금이라도 혼자서, 행복하게 타 보겠다는 이기적인 마음가짐으로 오토바이를 몰고 한 시간을 넘게 내 달렸다. 시끄러운 오토바이 소리도, 교통체증도 이어폰 하나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늘은 멋진 보텀턴(Bottom Turn)에 도전하겠어, 파도를 기다리며 콧노래도 부르고 파도와 하나가 되겠어.”


 머릿속은 이미 한참동안 서핑 중이다. 이미지 트레이닝은 언제나 완벽하다. 항상 완벽해서 탈이다. 서핑 포인트에 도착해 혹시라도 잊어버릴까 봐 까만 사인펜을 꺼내 오늘의 목표들을 손등 위에 적어 내려갔다. 그리고 드디어 마주하게 된 시크릿 포인트.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평상시 10여 명 정도의 서퍼들이 전부였던 나만의 비밀 포인트가 얼핏 보아도 100여 명이 넘는 서퍼들로 가득하다. “What the Hell?, 이게 무슨 황당 시추레이션?”


“아무래도 오전 서핑은 그냥 포기해야 할 것 같아.” 이곳을 자주 찾는 단골 서퍼가 말을 건넸다.
“나 오늘 보텀턴 연습하려고 했어.” 얼굴은 바다에 고정된 상태에서 입만 살짝 열어 대답을 했다.
“난 탑턴(Top Turn)!”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작은 플라스틱 테이블 의자에 앉았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점심을 먹으면서 기다려보기로 했다. 이름은 모르지만, 바다에서 몇 번 본 적이 있기에 그냥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서핑을 하면서 파도를 기다리는 시간은 너무 좋은데, 서핑이 끝나는 걸 기다리는 시간은 영 재미가 없었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네 마리…”


 까마득히 보이는 서퍼들의 머릿수를 세며 울분을 토하고 있을 무렵, 탑턴을 연습하겠다던 녀석이 자신만이 알고 있는 곳이 있다며 은근슬쩍 꼬시기 시작했다. 언제 나올지 모르는 애들을 기다리느니 차라리 어디라도 가서 파도를 타고 싶은 마음에 먹고 있던 *피상 고렝(pisang goreng)을 바다 멀리 던져 버리고 망설임 없이 보드를 챙겨 바이크에 올랐다.


 바다는 이미 황금물결로 변해있었다. 1시가 조금 넘은 시각, 바다는 눈이 부실만큼 반짝였다. 넘실거리는 파도가 수차례 해안가 모래사장을 넘나들더니 잠시 후, 작은 로컬 보트 한 대가 해변 가까이로 다가왔다. 빨리 넘어오라는 손짓, 영문을 몰라 두리번거리던 나에게 “빨리 가자!”는 한 마디를 던지고 순식간에 자신의 보드를 작은 파도 너머로 던지고 쏜살같이 몸을 내던졌다. 


 패들링으로 배가 있는 곳까지 약 2분, 난생처음 배를 타고 떠나는 서핑을 하게 된 것이다. 이미지트레이닝은 커녕 쉼 호흡 한 번 제대로 못하고 보드를 던졌다. 손 만 뻗으면 닿을 것 같은 배까지 다가가기가 어찌나 어려운지, 다가갈 만하면 파도가 내처, 원래 있던 장소로 돌려놓았다. 잠시 잠잠해진 틈을 타, 미친 듯이 패들링을 했다. 남모를 나만의 도전과는 상관없이 보트는 엔진 시동을 켜고 출발 채비를 하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배에 올라탔다. 뱃머리를 돌리기가 무섭게 굉음을 내며 바다로 항해를 시작했다. 10여 분 남짓 되었을까? 배가 시동을 끄고 바다 한가운데 섰다. 배를 중심으로 우현으로 거센 파도가 치고 있었다. 배가 서 있는 곳은 다행히 *안전지대(Safety Zone)이다. 능숙하게 보드는 바다에 던져주는 로컬 뱃사람들, 함께 배를 타고 온 녀석은 멋진 다이빙을 선보이며 바다로 입수, 던져준 서핑 보드를 향해 엄청난 속도로 헤엄쳐 갔다.


나는 강력한 아이컨택으로 보드를 던지지 말라는 표현을 했으나, 본척만척 너무나 가볍게 보드를 내 던졌다. 주인이 던져준 장난감을 향해 질주하는 사냥견처럼 날아간 보드를 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뛰어내렸다. 강한 조류에 이끌려 보드는 잡힐 듯 말 듯, 집채만 한 파도가 넘실거리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어깨가 터져나가도록 두 팔을 저어 필사적으로 보드를 잡았다. 아직 서핑은 시작도 못 했는데 나의 두 어깨는 뻐근함과 함께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버렸다. 갑작스레 피곤함과 두려움이 뒤섞여 몰려왔다.


 이름 모를 녀석은 아무 일 없는 듯, 유유히 파도가 부서지는 구역(Zone)으로 향하고 있었다. 간간이 뒤를 돌아보며 나를 쳐다보긴 했지만 신경 따위는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힘겹게 뒤따라가던 나는 잠시 패들링을 멈췄다. 그동안 내가 봐왔던 파도와는 완전히 다른 크기와 힘이 느껴졌다. 부서진 파도에서는 물보라가 일으킬정도다. 순간 두려움이 엄습했다. 오전 내내 행복했던 나의 표정과 부드러웠던 몸은 너무나 빨리 굳어져만 갔다. 꿈이 아닌 실제 상황이다. 이대로 떠내려갈 수도 있고 론드리에 말릴 수도 있다. 서퍼들로부터 익히 들어왔던 공포의 순간을 내가 경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점점 혼미해져 갔다.


“주변에 서퍼들이 도와주겠지, 사람이 그리 쉽게 죽지는 않을 거야! 에라, 모르겠다. 죽기 아니면 살기지 뭐.”


 패들링을 위해 물 밑으로 깊숙이 팔을 넣어 스트로크를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심호흡을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라인업에 진입했다. 이제 더 이상의 안전지대는 없다.


“정신 바짝 차리자. 이날을 위해 그동안 준비했잖아.”
“휘리릭~”


 어디선가 들려온 휘파람,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니,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킨다. 가리키는 방향으로 다시 고개를 돌려보니 저 멀리 울렁거리는 너울이 눈에 들어왔다. 첫 번째 파도를 알리는 로컬 서퍼의 신호음이었다. 30여 미터 전방의 작은 너울은 잠시 후 작은 굴곡을 형성했다. 20여 미터 전방, 서퍼들은 본격적인 패들링을 시작했다. 작았던 굴곡은 어느새 파도의 형태로 변하고 있었다. 10여 미터 전방, 움츠렸던 파도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서퍼들도 분주해졌다. *정점(Feak)에서 파도를 차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인다. 3미터 전 방, 나는 이미 파도의 힘에 의해 솟아오르고 있었다. 파도가 완전히 섰다. 순식간에 피크에 걸려버린 나는 파도를 넘어가기 위해 두 팔과 두 다리를 미친 듯이 저었다. 1cm 어쩌면 1g의 무게의 변화에 따라 나는 파도를 타야하는 상황이 될수도 있고 다음 파도를 기다릴 수 있는 상황이 된다. 나를 쓰러뜨리려는 파도와 어떻해서든 파도를 벗어나려는 나와의 첫 번째 라운드였다.


 "여기서 포기하면 떨어져 죽을지도 몰라, 젖 먹던 힘을 다해 도망쳐야 한다." 순간, 첫 번째 파도는 나를 지나쳤다. 파도라는 것이 세트로 움직이기 때문에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두 번째 파도가 10여 미터 앞까지 전진해 왔다. 좀 전에 나는 살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파도를 넘었다. 그리고 숨 돌릴 틈도 없이 두 번째 파도를 넘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다. 두 번째 파도를 넘자 세 번째 파도가 어느새 눈앞까지 다가왔다. 두 팔과 두 다리의 힘은 점점 떨어져만 갔다. 이번 파도는 지난 두 번째 파도보다 더 크다. 힘이 떨어진 이유도 있었지만, 눈으로 봐도 엄청난 놈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나도 모르게 소리치고 있었다. 짧은 순간 믿고 있던 신은 없지만 살려달라고 기도했다. 순간 피크(정점)에서 시간이 멈췄다. 나의 서핑 보드가 정점에 정확히 걸린 것이다. 이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근육 세포들의 수축을 막기 위해 억지 미소를 지으며 어금니를 꽉 깨문 채 낙하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피상 고렝(pisang goreng) : 인도네시아 인기 간식. 바나나 튀김

*안전지대(Safety Zone) : 파도의 영향이 별로 없는 지대

*정점(Feak) : 본격적인 라이딩이 시작되는 포인트이자 파도의 가장 높은 부분

매거진의 이전글 서퍼스 파라다이스, 발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