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 인구는 지난해 기준 약 450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 중 6분의 1이 가량이 발리 북부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북부의 대표 도시로는 싱아라자(Singaraja)와 블레렝(Buleleng)을 들 수 있는데, 종교적으로 역사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이어오고 있다. 하지만 여행지로서의 발리 북부 지역은 대중적이라고 하기보다는 마니아층이 두텁다. 발리의 수도인 덴파사르만 하더라도 그렇다. 발리를 찾는 여행자 중 덴파사르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극히 일부다. 대부분은 발리 중부의 우붓(Ubud)과 남부 지역 일대(꾸따, 스미냑, 짐바란, 울루와뚜, 누사두아)에서 여행을 하곤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발리 여행 정보란 거의가 인기 여행지 위주다. 몇몇 지역은 정보가 넘쳐나는 반면, 북부 지역은 한정된 정보 속에서 추리를 해야 한다. 한정된 정보라는 것조차 쉽게 찾을 수 없지만... 말이다.
과거 발리와 롬복 가이드북을 집필할 때의 일이다. 북부 지역에 관한 정보들을 편집 과정에서 완전히 들어낸 적이 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일반적인 정보를 주기가 힘들었고 현실적으로 북부 지역으로 여행을 할 수 있도록 가이드를 해주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 보였기 때문이다. 취재 당시에도 상당히 애를 먹인 북부 지역이었기에 결국 2p특집 정도로 마무리해 버렸다. 당시만 하더라도, 이동에만 반나절은 소요되고 여행 일정 상 당일투어는 불가능했다. 새벽에 볼 수 있는 돌고래 관찰 투어를 하고 멘장안 섬으로 들어가려면 최소 2~3일의 일정이 필요한데, 오토바이를 탈 수 없는 일반 여행자들의 동선을 고려한다면,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3박 5일, 4박 6일 정도의 허니문 또는 패키지 일정으로는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른 지금도 발리 여행의 패턴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얼마 전 여행 커뮤니티에 발리 북부의 멘장안 섬에 대한 질문이 올라왔다. 까맣게 잊고 있던 그때의 시간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북부 여행의 베이스캠프는 로비나(Lovina)라 불리는 지역이다. 로비나에는 여행자를 위한 대부분의 숙소, 레스토랑, 여행사 등의 편의 시설들이 집중되어 있다. 대게는 로비나에서 휴식을 즐기며 돌고래 관찰 투어에 참여하거나 멘장안 섬으로 이동하여 다이빙이나 스노클링을 즐긴다. 휴양과 다이빙, 돌고래 투어를 마치고 돌아오면 메인 거리를 중심으로 펼쳐진 현지 레스토랑과 바 등에서 식사를 하기도 한다. 조금 더 완벽한 휴양을 목표로 하는 여행자들은 중심가에서 벗어난 외딴 리조트를 선택하기도 한다.
때 묻지 않는 자연으로 둘러싸인 멘장안 섬으로 들어가기 전 로비나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로비나 시내에서 차로 약 15여분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푸리 바구스 로비나 리조트(Puri Bagus Lovina Resort)로 향했다. 리조트는 바다 앞에 자리한 비치프런트 타입으로 발리 전통 건축 양식과 현대적인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다. 발리의 리조트들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아일랜드 리조트의 느낌이 강하고 친절한 직원들의 응대는 기분을 업시킨다. 40개의 객실과 2개의 빌라로 구성된 리조트는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메인 풀장과 자야 스파, 야외 레스토랑 등 휴양을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다.
리조트에서의 하루는 이외로 단순하다. 아침에 일어나 조식을 먹고 풀장에서 물놀이를 즐기다가 점심을 먹고 근교로 투어를 다녀오거나 아니면 스파를 받고, 다시 풀장에서 태닝을 즐기며 음악을 듣는 정도다. 물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외딴 리조트에서만 느낄 수 있는 약간의 고립감과 단절감을 맛보는 재미도 있다. 오전 내내 풀장에서 나오지 않고 물놀이를 즐겼다. 젖은 수영복은 나무 가지 위에 대충 걸쳐놓고 인도네시아식 볶음밥 나시고렝으로 배를 채웠다. 오후 내내 리조트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인근 야외 온천(Air Panas Banjar)으로 나들이를 다녀오기로 했다.
찾아간 온천은 따뜻한 야외 온천탕과 마사지를 받을 수 있는 스파,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는 레스토랑이 있다. 온천수의 온도는 38도가량으로 뭉친 근육을 풀어주거나 혈액 순환에 좋다. 3개의 온천탕이 있으며 각각의 탕은 크기와 깊이가 조금씩 다르다. 메인 풀이라고 할 수 있는 중앙의 온천탕은 깊이 2미터가량으로 수영을 할 수도 있고 가장 위쪽의 온천 탕은 어린이를 위한 키즈 탕으로 깊이가 그리 깊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반신욕을 즐기는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마지막은 온천 수로 샤워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곳으로 자연스러운 마사지도 가능했다. 온천욕을 체험하고 현지식으로 식사도 하면서 서너 시간 놀다 보니 어느덧 돌아가야 할 시간. 상쾌한 기분으로 다시금 숙소로 돌아왔다.
뱃시간에 맞춰 라부안 라랑(Labuan Lalang) 선착장으로 이동했다. 멘장안 섬(Menjangan)은 발리 바랏(Bali Barat) 국립공원에 속해진 지역으로 작은 섬으로 아름다운 산호초와 다채로운 어종들이 분포되어 있어 다이빙 스폿으로도 유명하다. 다이버들의 경우 인근지역에 숙소를 잡고 투어를 이용해 섬을 구경할 수 있다. 다이빙이나 스노클링이 목적이라면 꾸따나 로비나 내 다이브 업체를 통해 예약 및 투어를 진행할 수 있다. 당일투어 아닌 섬에서 시간을 보내려면 숙소를 예약해야만 한다.
멘장안 섬은 국립공원 내 보호 구역이라서 여행자가 체류할 수 있는 곳도 한정적이다. 선택의 폭의 좁다. 섬 안에서 기본적인 인프라를 갖춘다는 것 자체가 도전에 가깝다. 물론 최근에는 무선 인터넷 서비스도 제공을 한다. 그러나 예전 이곳에 방문했을 때 나는 아주 인간적인 방법(횃불, 종을 울리는 방법)으로 소통을 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선착장까지 마중 나온 직원을 따라 커다란 트렁크를 배에 싣고 멘장안 섬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배 안에는 각종 식자재와 생필품들이 가득 실려있다. 육지와 섬은 그리 멀지 않지만 이동할 수 있는 방법은 배가 유일해 매일매일 순번을 정해 육지와 섬을 오간다고 한다. 현지 직원들은 매일 배를 타고 출퇴근을 한다고 한다. 조금은 불편하기도 할 텐데 그런 기색도 없이, 멀리까지 찾아온 손님을 응대하느라 집중하고 있다. 유유히 물살을 가르는 배 안에서 잠시 여유를 만끽해 본다. 얼마나 달렸을까? 누사베이 멘장안(NusaBay Menjang_구와카쇼레아)의 선착장으로 보이는 데크에 도착했다.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머무는 동안 육지로 나갈 일은 거의 없다. 숙소에 머무는 몇몇 게스트들과 직원들, 자유롭게 활보하는 야생 동물들이 전부다. 해변 앞쪽에는 리조트의 메인 오피스와 레스토랑, 액티비티 라운지가 있고 각각의 룸은 독립적인 행태로 해변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해변 앞에 마련된 선베드에 누워 시간을 보내거나 앞바다로 나가 스노클링, SUP, 카약킹 등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바스락거리는 침대에 누워 좋아하는 노래를 한 곡 틀어놓는다. 시원하게 샤워까지 마치고 나니 비로소 긴장이 풀어진다. 빠르지는 않지만 아슬아슬 연결되는 인터넷을 켜놓고 미니 냉장고 안에 있는 시원한 소프트드링크를 잡아 들고 순식간에 마셔버렸다. 따가우면서도 갈증을 날려주는 청량감이 좋다. 때마침 트렁크를 어깨에 들쳐 매고 방까지 들어온 리조트 직원은 즐거운 놀이들을 소개한다. 뭐라도 빨리 즐겨보라는 권유지만, 그러기에는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쉬지 않고 달려온 여정이 피곤하기도 했지만 이곳에서는 별로 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서두를 필요가 없다. 아마도 몸이 먼저 알아챈 모양이다.
성화에 못 이겨 결국 수영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리조트 앞 해변으로 내려왔다. 해변에는 호주에서 온 노부부가 있었다. 리조트에 온 지 일주일이 넘었다는 노부부의 일과는 하루 종일 선베드에 누워 책을 읽고 뜨거워진 몸을 식이기 위해 잠깐씩 바다에 몸을 담그는 것이 전부였다. 리조트에 비치된 책들을 다 읽고 떠날 기세로 책을 읽기도 했다. 나도 가끔씩은 책을 읽는다. 대게는 두어 시간을 넘기기 힘들고 끝내 잠시 들어버린다. 그래서일지는 모르겠으나 여행을 떠날 때 책을 많이 가져가지 않는다. 그런데 아주 가끔씩 먼저 다녀간 여행의 선배들이 놓고 간 한글 책을 만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반갑기도 하고 책을 읽어야 할 나름의 이유를 만들어 읽곤 한다. 낯선 여행지에서 만나는 책 한 권, 때로는 사람보다 반갑다. 그러나 고백하자면, 나는 이곳에서 발견한 책을 다 읽지 못했다. 읽다가 잠이 든 이유도 있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책의 내용 때문이었다.
그랬다. 다름 아닌 스쿠버 다이빙을 테마로 한 그랑블루(유채 저_2007년 랜덤하우스)라는 에세이 책이었다. 누가 놓고 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닳고 닳은 책 한 권, 그러고 보니 멘장안 섬과 나름 잘 어울렸다. 당시 서핑에 미쳐있던 나에게 스쿠버 다이빙은 전혀 다른 세상의 이야기였다. 바다 위에서 시간을 보내는 나와 바다 아래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의 놀이라고나 할까? 물론 바다라는 매개체를 통해 희로애락을 느끼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서로가 가진 문화나 라이프는 너무나 다르다. 다음에 기회가 있다면 조금 더 자세히...
파도가 잔잔한 멘장안 섬 일대는 다이버들의 천국이다. 다이빙을 배우려는 초보 다이버들을 비롯해 패들보트를 타고 바다를 누비거나 스노클링 장비를 착용하고 바닷속 세상을 구경하느라 정신을 놓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선베드에 누워 책을 읽다 보니 문득 바닷속 세상이 궁금해졌다. 해변 한편에 마련된 장비들을 대충 챙겨 선착장 끝으로 나갔다. 눈치 빠른 스태프가 식빵 한 덩이를 건네주며 물고기가 잘 보이는 스폿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알려주었다. 수경을 끼고 바라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크게 보였다. 작게만 보이던 물고기가 벌크업이하도 한 건가, 크기도 크기지만 빵맛을 알고 쏜살같이 달려드는 물고기 무리들로부터 위압감마저 느껴졌다. 스노클링 장비가 문제인지 호흡이 문제인지 숨쉬기가 자유롭지 않다. 물속에서 느끼는 갑갑함, 그래서인지 자꾸만 물 위로 올라온다. 물고기를 쫓기도 하고 쫓기기도 하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선착장에서 상당히 멀리까지 흘러왔다. 그러고 보니 물속에는 길이 없다. 바닥을 내려다보며 물고기, 산호초 등을 구경하다 보니 방향 감각조차 떨어진다.
수심에 차이에 따라 물 색도 달리 보이는데 에메랄드빛으로 만 보이던 바닷물이 어느 순간 짙어진다. 이리저리 오가던 물고기들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리조트로의 귀소 본능이 느껴지는 순간, '통, 통, 통' 보트의 엔진 소리와 함께 리조트 스태프가 나타났다. 물 때가 바뀌었으니 돌아가자는 말과 함께 힘찰게 나를 끌어당겼다. 보트를 타고 가는 중간중간 갈 곳을 잃은 어린 스노클러들을 같은 방식으로 낚아챘다. 한 무리의 스노클러들은 태운 보트가 리조트 선착장에 도착했고 간단히 인사과 소개를 하며 헤어졌다. 석양이 지고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리조트에는 사람이 많이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깨닫게 되었다. 로맨틱한 저녁 식사를 하고 와인과 맥주를 마시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다음 날 해변에는 호주 노부부가 선베드에 누워 책을 읽고 있었다. 낮에는 바닷속 구경을 하고 저녁에는 술을 마셨다. 다음 날에도 노부부는 같은 자리 선베드에 누워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나는 바다로 나갔고 일상을 반복됐다. 떠나는 날 아침, 짐을 챙겨 선착장으로 나왔다. 반갑게 작별을 고하는 노부부, 숨을 쉬기 위해 잠시 물 위로 나온 사이, 떠나는 나를 발견하고 보트를 향해 손인사를 해주는 사람들. 라부안 라랑 선착장에 도착하자, 한 무리의 여행자들이 탑승을 준비하고 있었다. '바통이라도 넘겨줘야 하는 것인가?' 멘장안에서의 기억을 뒤로하고 발리 동부로 서둘러 차를 몰았다.
R E M E M B E R I N G
M E N J A N G A 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