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헐적 아침일기 #2 걷는 요즘

by 수카 Sukha

2025년 6월 19일, 오전 8시 48분, 햇빛과 구름, -1도, 어느새 겨울

호주 캔버라 우리 집 책상에서


#0

박스가 잔뜩 쌓인 집에서 눈을 뜨는 것도 어느새 익숙해졌다. 벌써 열흘 전 도착한 파리에서의 짐들은 무려 61박스. 정신없이 짐을 풀고, 다시 정리해서 놓고, 또 다시 짐을 싸고(파리에서 집이 캔버라 집보다 훨씬 컸기 때문에 모든 짐을 풀 수가 없다)의 미친듯한 반복을 지나 살짝 소강상태에 들어선 요새다. 언뜻봐도 열몇박스가 집안에 쌓여있지만, 사실 오늘 아침에는 박스가 있다는 것도 순간 잊어버렸을 정도로 흐린 눈하는 기술이 늘었다. 처음으로 같이 살게 된 '우리' 집이다보니 예쁜 가구들로 채워넣고 열심히 꾸며야지 의욕을 불태웠었지만, 내가 원하는 월넛 컬러의 목재 가구는 다 너무 비싸고, 돈 나갈 구석은 너무나도 많고, 무엇보다 또 몇달 후에 이사를 한다고 생각하니 의욕이 슬금슬금 사라져버려서 지금은 뭐 이대로 되는대로 사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 하고 마음을 놓은 상태다. 한번 욕심을 버리니까 짐정리도 뭐, 될대로 되라지! 박스가 보여도 안보이는 척, 박스에 몸이 걸려도 안 걸린척 그렇게 살고 있다.


#1

요즘 나는 그동안 정신없이 살면서 잃어버린 일상의 루틴을 다시 회복해보려고 노력 중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기상 스트레칭을 (시도)하고, 물 한잔 마시기 전에 꼬박꼬박 양치도 해주고, 커피 대신에 허브차로 아침을 시작하고(거의 바로 커피를 이어서 마시지만;) 산책도 매일 가고 있다. 20대 때는(새삼 '20대때는'이라는 말을 쓰는 내가 너무 어색하다. 이제 명실상부한 30대네) 걷기를 정말 자주 했다. 운 좋게도 옮겨다녔던 자취방들마다 가까운 곳에 하천이 있었고, 좁디 좁은 자취방이 답답해 매일 나가서 한두시간씩 걸어다녔다. 여러가지로 고민이 많았던때라 하염없이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하려고 했던 것도 있다.


제일 많이 걸었던 때는 호주에 살았을 때다. 지금 말고 처음으로 호주에서 살았던 25살. 한국으로 돌아가기전 마지막으로 지냈던 셰어하우스에서의 두세달. 그때를 떠올려보면 그냥 계속계속 걷고 뛰었던 것밖에 기억이 안 날정도로 하루에 세시간정도씩 매일같이 걸었다. 그땐 왜 그렇게까지 열심히 걸었을까. 살았던 방이 싱글침대 하나정도 들어갈 공간 밖에 없었을정도로 작았어서 뛰쳐나갔던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호주의 광활한 평지가 나를 계속해서 걷게 했다. 따뜻한 날씨와 청명한 공기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직선의 풍경은 계속,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싶게 만들었다. 그렇게 모두로부터 멀리 떨어진 호주에서 한없이 걷다보면 묻어놓았던 생각과 감정들이 하나씩 떠오르고는 했다. 10대시절부터 20대 중반까지 그냥 내 인생의 전부였던 복잡하고 험난했던 가정사에서 비롯된 모든 묵은 감정들을 그때 다 들여다 봤던 것 같다. 하루는 엄마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 다음날은 아빠에 대해서 고민해보는 그런 날들이었다. 특별히 해결된 것은 없었지만 하염없이 걸었던 그 몇달이 한없이 바닥으로 들어가게 하는 우울에서 나와, 그 모든 것을 한 걸음 떨어져 보게하는 거리감을 만들어줬던 것만큼은 틀림없다.

그 후로도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걷기는 늘 나를 구해주고 숨통을 틔워줬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걷지 않은지도 한참이었다. 물론 종종 많이 걸어다니긴 했지만 매일같이 루틴으로 걸은 건 벌써 5-6년이 된 듯했다. 그런데 왜일까. 특별히 엄청난 결심을 하지도 않았는데 요즘 다시 열심히 걷고 있다. 최저기온은 영하로 떨어질만큼 추운 겨울인데도 선글라스를 껴야할만큼 강렬한 햇빛 때문인가. 어쩌면 그 햇빛 덕분에 반짝이는 넓은 호수가 가까워서일지도. 25살의 호주와 여전한 모습으로 끝없이 펼쳐진 평지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그냥, 호주가 나를 늘 걷게 만드는 걸까.


#2

25살의 걷던 나는 힘듦을 파고 들었었지만, 요새는 특별히 괴로운 고민이 없기 때문에 지금의 나는 걸으며 생산적인 고민들을 생각한다. 개고 단계에 들어간 책을 어떻게 고쳐야 하는가가 주된 고민이고, 그외 다른 업무나 커리어와 관련된 구체적인 방향이나 실행책을 부가적으로 고민한다. 그런데 25살의 나는 내 안의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어가 나도 몰랐던 내 마음을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집요했는데, 지금의 나는 그렇게까지 집요하지가 못하다. 생산적인 고민들을 파고드는게 아니라, '생각한다'고 쓴 이유다. 사실 좀 더 정확하게 쓰려면 '생각하려고 노력한다'가 될지도. 고민의 종류가 달라서 그런 걸수도 있겠지만, 어떤 힘든 일이 생기면 그 상황과 감정을 파고드는 내가 나자신을 너무 괴롭히는 것 같아, 지난 5년간 힘든 일이 있어도 빠르게 털고 생각을 깊게 안하는 연습을 했더니 그런 것 같다. 그 연습은 정말 효과가 좋았기 때문에 전혀 후회하는 건 아니지만, 생각이 필요한 순간해도 생각을 잘 못하겠는건 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생각을 깊게 안하는 연습을 하던 그 시기에 때마침 릴스니 쇼츠니 숏폼이 유행하면서 스마트폰에 중독된 것도 시너지를 낸 것 같고. 내 글에 대해 받은 피드백이 나또한 공감이 되어서 그걸 파고들어 한단계 발전시키고 싶은데 어째 생각은 계속 우회해버리고 다른곳으로 가버린다. 그걸 다시 붙잡아 겨우겨우 조금 생각해보고, 또 다시 도망간 집중을 붙잡고, 그걸 반복하다가 지쳐서 그냥 포기하고 팟캐스트를 들으며 집에 오는, 그런 요즘이다.


호주하면 생각나는 색이 바랜듯한 나무들. 호주의 나무들은 전부 다 키가 길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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