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5월 22일, 오전 9시 32분, 날씨 흐림, 작은 빗방울, 가을
호주 캔버라 우리 집 책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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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에 살기 시작한 후로 매일 아침 7시에 일어나고 있다. 아침 7시라는 말이 어색할 정도로 내게 7시는 늘 새벽이었는데, 이상하게 호주에 오니 눈이 절로 떠진다. 한동안 호주에 가서 산다는 얘기를 했을 때 꽤 여러 사람들로부터 호주 카페 새벽 7시에 열어서 오후 3시에 닫는 거 아니냐면서, 아침형 인간이 아닌 사람들은 힘들 것 같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땐 웃으면서 맞긴한데 늦게 일어나도 된다고, 나도 늦게 일어날 거라고 그랬었는데- 어째 매일같이 일찍 일어나고 있다. 오늘은 심지어 알람도 없이 오전 6시 57분이 눈이 딱. 호주의 기운은 저절로 사람들을 아침형으로 만드나? 예전에는 워홀 할 때는 어땠더라. 잘 기억은 안 나지만, 확실히 오후 5시-6시쯤이면 한밤 같은 호주의 해가 영향이 있는 것 같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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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그래서 아침에 산책을 하려고 노력 중이다. 노력 중이라는 건 오늘이 이틀째라는 뜻이다. 사실 오늘도 막상 일어나서 커피 한 잔을 내리고 아침을 먹고 있자니 은근히 귀찮은 게 그냥 나가지 말까 했었다. 살살 비도 오는 게 추울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엄마한테 전화가 와서- 당장 옷 입고 나가서 걷고 오라구, 나갔다만 오라구. 새로운 나라로의 이주에 지치고 힘들어서 요 며칠 힘든 모습을 보였더니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나가서 조금이라도 걸어야 기분이 나아진다나. 맞는 말인 것 같아서 몸을 일으켜 나갔다. 정말 꼼짝도 하기 싫다가도 막상 나가면 생각보다 몸이 가볍고 기분전환이 돼 한참을 걷고 돌아올 때가 있다. 한편 막상 나갔는데도 생각만큼 몸에 힘이 안 들어가고 지쳐서 금방 돌아오게 되는 날도 있다. 오늘은 후자에 가까웠다. 나간데 의의를 두고 조금, 걷다가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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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그 조금만큼의 기분전환은 됐나 보다. 이렇게 일기를 쓰고 있으니까. 돌아오면서 바쁘다는 이유로 미뤄두었던 나를 위한 활동들-일기쓰기나 스트레칭, 프랑스어 공부 같은-을 조금씩은 해야지 하는 기특한 다짐도 했다. 실행에 옮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피곤한데도 기분전환이 된 건 다 가을 덕분이다. 가을. 가을이 이렇게 아름다웠나? 요즘 제일 많이 하는 생각이다.(피곤하고 지치고 힘들고 외롭다는 청승 떠는 생각 말고...) 봄여름가을겨울 중 어느 계절이 좋냐 하면 고민 없이 여름을 고르는 여름러버로서, 파리에서 호주로 넘어올 때 나는 파리의 아름다운 여름 하늘을 놓치는 게 슬펐지, 가을로 간다는 건 안중에도 없었다. 겨울이 가깝다는 사실에 절망했을 뿐. 그런데 호주의 가을은 생각보다 너무 아름답다. 초록색부터 노란색, 주홍색, 다홍색, 짙은 붉은색까지. 익어가는 사과처럼 다채로운 색깔이 하나의 나무에 다 펼쳐져있다. 떨어진 낙엽들도 다양하다. 낙엽 하면 떠오르는 손바닥 같은 이파리들도 길쭉한 게 한국과는 모양새가 다른 듯하다. 바삭바삭한 낙엽을 밟으며 자연이 주는 기쁨을 깨닫는다. 이 도시에는 친구 한 명 없지만, 아침에 일어났을 때마다 보이는 창문 밖 색색깔 나무들이 어찌나 큰 행복을 주는지. 5분 거리에 넓은 호수가 있어 산책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이 모든 자연이 내 친구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