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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카 Sukha Aug 10. 2020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당연해


4개월 만에 장거리 연애 중인 남자 친구를 만나러 호주에 갔다. 난 오랜만에 간 호주에서 브런치를 꼭 먹고 싶었다. 호주가 브런치 유행을 선도한다니 힙스터들이 갈만한 멋진 카페도 가고 싶었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슬슬 산책 나와 앉아있는 촌스러운 스낵바에 가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럼 전통적인 곳에 가자는 남자 친구를 따라온 스낵바는 귀퉁이가 뜯긴 낡은 의자와 오늘 자 신문이 종류별로 꽂혀있는 곳이었다. 소시지와 베이컨, 스크램블 에그가 들어간 빅 브랙퍼스트와 우유가 반만 들어간 라테 한 잔을 시키고 앉아 있는데 주위가 산만했다. 살펴보니 가게 크기에 비해 직원이 많은 것이 새로 온 직원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정신없어 보이는 그들을 구경하다 심심해져서 오랜만에 핸드폰을 들었다. 한국에서 문자 메시지가 와있었다.


왠지 모르게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그 일인가?’ 3년 전 나는 믿고 있던 사람에게 크게 배신당했고 아직도 그 일에 얽매여있었다. 한국에서 나는 그 일에 관한 소식을 늘 기다렸지만 호주에서는 좋은 소식이건 나쁜 소식이건 그 일에 마음을 쓰고 싶지 않았다. 오랜만에 보는 남자 친구와의 소중한 시간에 파문이 이는 게 싫었다. 심호흡을 하고 문자 메시지 수신하기를 눌렀다. 왜 안 좋은 예감은 틀리지 않을까. 메시지는 그 일에 관한 것이었다. 약간의 진전이 있다는 내용이었지만 나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그 문자가 비록 지금의 나는 뜨거운 여름 하늘 아래 있지만 곧 칼바람이 살을 애리는 한국의 겨울에 돌아가야 한다는 걸 일깨워주는 경고처럼 보였다.  


굳어진 표정에 남자 친구는 무슨 일 있냐며 다정하게 물어왔다. 사정을 전부 알고 있는 그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위로받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머리는 벌어진 일들을 파악하기에 바빴고 마음은 당혹스러움, 두려움, 아주 약간의 기쁨, 무서움 등 여러 감정들이 겹쳐 혼란했다. 그래서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괜찮겠지, 그라면 이해해주겠지’라고 생각한 채로 나는 그 일에 관련된 사람에게 연락했다. 한참을 진행 상황에 대해 묻다가 받은 "다 때려치우고 도망가고 싶다."는 그 사람의 말이 너무 내 마음 같아 나는 순간 픽 하고 웃어버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조금 진정이 된 나는 아직도 음식이 나오지 않았단 걸 깨닫고 그에게 말했다.


“아직도 음식이 안 나왔네. 얘기라도 해볼까?”

“응.”


날이 선 짧은 대답에 아차 싶었다. 남자 친구는 계속 내 대답을 기다렸던 것이다. "일 때문에 연락이 왔었어. 그래서 표정이 안 좋았던 거야." 재빨리 설명해줬지만 그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표정이 왜 그래?”

“친구들이랑은 웃으면서 카톡 하면서 나한테는 말 못 해?”


남자 친구는 계속해서 화를 냈다. 아, 아까 웃은 걸 오해했구나. 하긴, 그 일에 대해 묻기 위해 연락하는 것도 몰랐으니까. 상황을 더 설명하자 남자 친구는 알겠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화난 기색이었다. 계속해서 그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노력하다 어느 순간 그의 행동이 '너는 그 일 때문에 화났는지 몰라도, 나는 너 때문에 화났어.'라는 말처럼 느껴졌다. 몇 년 동안 밤마다 울다 지쳐 잠들던 나를 누구보다 잘 알면서 그 일에 관련됐다고 말한 후에도 어떻게 계속 화낼 수 있지? 아무리 짜증나더라도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알면 적어도 지금은 화내지 않으면 안 되나? 생각이 폭주한 채 나는 화를 냈고 그와 나는 식당에서 소리를 지르며 싸우기 시작했다. 화가 나자 모든 것이 다 견딜 수 없어졌다. '왜 아직도 음식이 안 나오는 거야!'


“주문 들어간 것 맞나요?”


화난 목소리로 묻자 새로 온 직원인 듯한 남자가 놀라며 어서 확인하겠다고 했다.


“죄송합니다. 주문이 누락됐네요. 주문 취소해 드릴까요?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한참이 지나도 나오지 않는 음식에 내가 화가 났다고 생각한 듯한 직원은 재차 사과했다.


“전 주문 취소해주시고, 이 사람 것만 그대로 주세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소리 지르고 스낵 바를 나왔다. 눈물이 줄줄 흘렀지만 닦을 생각조차 못하고 발 길 닿는 대로 걸었다. 한 시간 정도 헤맸을까. 화난 마음이 점차 사라지고 소리치고 나온 게 미안했다. 사실 내가 화가 났던 건 무섭고 두려운 내 마음을 네가 몰라주는 것 같아서 서운했던 거라고 어떻게 말해야 하지 고민하고 있는데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돌아와. 같이 우리 집에 가자.”


침묵 속에 그의 집으로 돌아왔다. 차에서부터 이미 눈물로 범벅이 되어 얼룩진 내 얼굴을 닦으며 남자 친구가 말했다.

 

“미안해. 네가 날 무시해서 화가 났어. 아무리 그랬도 이런 상황에서 내 감정을 앞세우면 안 됐는데, 미안해.”


“… 나도 소리 지르고 뛰쳐나가서 미안해. 너 기분 나쁠만했어. 사실 아까 머릿속으로는 계속 잘 설명하고 풀어줘야지 생각했는데, 네가 계속 화를 안 푸니까 내가 얼마나 무서운지 힘든지 이해 못하는 것 같아서 너무 화가 나더라고.”


슬쩍 본 그의 얼굴이 누그러져 있었다. 그래서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을 꺼냈다.


“나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거 진짜 싫은데 네가 계속 화를 내니까 ‘넌 당사자가 아니니까, 네 일 아니니까 그렇게 이성적으로 넌 너고 나는 나라고 반응할 수 있구나.’란 마음이 먼저 들더라. 사실은 ‘넌 곱게 커서 이런 힘든 마음 이해 못하는구나’ 그런 생각도... 했어.”


마지막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후회했다. 사랑받고 자란 그의 성격을 누구보다 좋아하면서 넌 아무것도 모른다며 막말이나 하다니. 그의 힘듦이 내 힘듦보다 덜하다고 누구도 말할 수 없는 건데. 왜 이런 못난 마음을 그에게 말해버렸지? 자책하며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데 뜻밖에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그런 거였어? 이해 못하는 거 맞아. 나 그런 마음 이해 못하는 거, 당연해.”


“기분 안 나빠? 나 방금 너 힘든 일 없이 컸다고 아무것도 모른다고 한 건데.”


그는 의외로 미소 짓고 있었다.


“날 잘 모르는 다른 사람이면 화날 수도 있겠지만 너보다 내가 힘든 일 없이 평탄하게 큰 거 너도 나도 알잖아. 네가 맞아. 나 네가 힘들 때 다 이해 못해. 아까도, 상황 알고 난 후에는 진전이 있으니까 네가 기쁠 거라 생각했어. 근데도 나한테만 이야기를 안 하는 것 같으니까 무시당했다고 생각했고. 네가 무서워하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자 그가 내 눈을 또렷이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 나 네 덕분에 많이 배우고 있어. 처음 우리 만나기 시작했을 때보다 지금 널 훨씬 더 많이 이해해.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감정들 배울 수 있게, 계속 가르쳐줘.”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제일 가까이에 있는 내 사람들에게는 이해받고 싶었다. 그래서 늘 말이 구구절절 길어졌다. 이해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면서도 최대한 이해받고 싶어서. 그렇게 지내다 보니 어느새 내 곁에는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들만 남았다. 그것에 감사해야 하는 걸 알면서도, 간혹 긴 설명에도 오롯이 내 마음을 이해받지 못하는 것 같을 때면 한 없이 외로워졌다.


남자 친구도, 그가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면 결국 우리 사이에 한계가 있는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이해받지 못함에 슬펐고 어떻게 그를 이해시킬 수 있을지만을 늘 고민했다. 그런데 나를 쳐다보며 자신감 있게 배우겠다고 말하는 그를 보며 깨달았다. 그가 나를 오롯이 이해 하지 못 하는 것의 당연함을. 우리는 다르게 자랐고 백 마디의 말로도, 이해하고 싶은 마음만으로는 메워지지 않을 시간의 차이가 있다. 그랬기에 늘 바라 왔던 널 다 이해한다는 말보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배우겠다는 그의 솔직한 말이 더 고마웠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해.


그 말에 갈라진 틈을 메우려는 노력이 소중해졌다. 비록 전부 메울 수 없을지라도,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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