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우스 슈밥, 『제4차 산업혁명(2016)』
2016년 저서이기 때문에 제4차 산업혁명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의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다보스포럼에서 제4차 산업혁명의 개념이 등장한 이래로 인공지능을 비롯한 기술이 이전과는 달라졌음은 물론이거니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코로나 19의 등장으로 미래를 내다보는 데에 주안점을 두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판단이다.
다른 논의보다 '인간은 무엇인가?' 이 본질적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야 할 시기가 정말로 도래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인간이 아닌 존재, 심지어는 생명이 아닌 '것'과의 밀착된 관계가 형성되면서 우리는 인간 본질을 들여다볼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인간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인간 존재의 지향점과 목표는 무엇인가? 생명은 생명이 아닌 것과 어떠한 차별점을 갖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그 누구도 할 수 없겠지만, 이에 대한 전 세계적인 담론이 형성되지 않고는 향후 100년간 혼란과 불평등에 의한 거대한 불합리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진화와 달리 혁명은 자연이 저절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인간의 힘과는 무관한 자연의 변화가 매 순간 일어나고 있으나 그것은 수십억 년에 걸쳐 일어나기 때문에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익히 말하는 혁명revolution은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더욱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자초'한 일이라는 말이다.
생산자들은 때때로 무책임하다. 우선 만들어낸다. 물론 악의에 의한 기술 개발은 거의 없다. 하지만 그 기술로 인해 일어날 변화에 대해서는 묵비권을 행사한다. 어쩌면 모든 인간은 숨 쉬는 모든 순간에 폐기할 수 없는 배설물을 남기고 무책임하게 떠나가는지도 모른다.
저자는 미래 사회에 도래할 다수의 문제점을 기술하고 있다. 그중 많은 문제가 실제로 발현되고 있다. 인간은 왜 이런 단점들을 감수하고서라도 기술 개발의 흐름을 거부하지 않는가? 인간은 왜 기술에서 비롯된 문제를 또 다른 기술로 해결하려고 하는가? 문제가 되는 기술을 없애거나 답보(통상적으로 쓰이는 부정적 의미를 제외하고 단순히 제자리걸음이라는 뜻으로 사용하였다)하면 되지 않는가? 왜 변화하려 하는가? 이전과 똑같은 상황이 지속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의 천성일까? 혹은 이 모든 전개가 어떠한 변화에도 적응할 수 있는, 혹은 적응할 필요가 없는 1%의 자본가들의 농간에서 비롯된 것인가? 저서 곳곳에서 드러나는 '미국 중심주의'의 흔적과 시혜적인 언어들이 나를 이런 사고로 이끌었다.
세계는 응집되고 연결되면서도 파편화한다. 개인은 수많은 그룹에 속하면서도 속하지 않는 존재가 되고 있다. 벌어지는 대부분의 일에 대한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지고 있으며 국가의 영향력도 이전과는 다른 크기를 갖는다. 따라서 우리는 코로나 19로 인해 주춤했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를 근시일 내에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투자 지침서가 될 수도, 누군가에게는 기술 전망 서적이 될 수도 있지만, 내게는 결국 인간에 대한 거대한 질문이었다. 흥미로웠지만 내면에서 피어오르는 찜찜함을 감출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