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철, 『타자의 추방(2017)』
갈등과 고통을 회피하는 세상, 오직 긍정적인 평가와 ‘좋아요’만이 존재하는 나의 세상. 우리는 이러한 유토피아를 꿈꾸면서 지금까지의 역사를 이끌어왔다. 여전히 국가마다 상이하나,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나 유토피아는 결국 없는 세계다. 결핍이 없는 세상. 우리는 왜 행복에 닿지 못하며, 그것을 갈구하며 죽음으로 다가가는가?
타자의 추방
우리는 익숙한 것을 좋아한다. 인간을 포함하여 지구상에 존재하는 동물들은 본질적으로 인지적 구두쇠이기 때문이다. 뇌는 우리 몸이 낼 수 있는 에너지의 20퍼센트 이상을 소모한다. 그래서 새로운 환경을 맞이하면 평소 사용하지 않았던 뇌의 부위가 활성화된다. 소위 말해 ‘신경 쓴’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스트레스 지수가 상승하고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다. 그런데 자연은 생명체의 그런 행위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런 차원에서 본다면 인간은 반(反)자연적인 생명체임에 틀림이 없다. 오직 뇌를 사용하는 ‘공부’라는 행위를 문자가 생겨난 이래, 역사를 통틀어 해왔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생존을 위해 시작한 일이겠으나, 현재는 지적 호기심이라는 이유로 포장되곤 한다. 이 관점으로 보았을 때 지적 호기심은 돌연변이다.
저자의 서술을 바탕으로 생각해 보면, 현대 사회는 원시 사회와 다르지 않다. 자연스러운 행동만으로도 어느 정도 살아남을 수 있다. 오히려 자연스러운 행동을 요구한다. 우리는 인지적 구두쇠에서 벗어나지 않아도 된다. 빅데이터 AI는 내 취향을 수집하여 그에 맞는 광고를 보여주고, 내가 팔로우한 사람들과 비슷한 사용자를 추천하면서 ‘동일자’들이 모이기를 종용한다. 그렇게 되면 내 사고 영역에서 자연스럽게 타자는 추방되고, 누구도 나를 반대하는 이가 없는 편안하고도 익숙한 상황에 머무르게 된다. 저자는 이러한 반대의 전적인 부재는 오히려 자신을 마주하는 상황을 만들고, 자기 침식적 사고를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책의 제목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알(卵)의 패러독스
헤르만 헤세의 저서 『데미안』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우리도 잘 알고 있듯, 자연의 섭리는 새가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이다. 알 껍데기가 깨지고 태어나면 우리는 그나마도 얇은 보호막 하나 없이 세상에 던져진다. 온갖 두려움과 고통을 마주한 새는 서서히 잠식된다. 자연은 알을 깨고 나가는, 변화를 요구한다. 앞서 서술했던 이야기와는 반대된다. 자연은 변화를 요구하지만, 생존에 유리한 방법은 그 자리에 안주(安住)하는 것이다. 알 속의 새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저자는 경험의 본질을 불편함과 고통으로 보고 있다. 경험하지 않으면 세상과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유리된 것이며, 결국 알 속에 머물게 된다는 말이다. 그 알 속 세상의 중심은 나다. 우리는 그 안에서 세상에 대한 사유보다 자기 검열에 집중하게 된다. 저자는 동일한 세상이 아니라 타자의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건강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나쁜가? 이와 같은 극단적 물음은 옳지 않음을 알면서도 본능적으로 들고는 한다. 안전하고자 하는 욕구는 본능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주와 타협은 다르다. 타협은 극복 의지를 내포한다. 상황이 뒷받침되었다면 알을 깨고 나아갈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에 비해 안주는 오직 그 자리에 머무르기를 원한다. 저항하지 않기 때문에 벗어날 수 없다. 모든 건 우리의 선택이다.
자유의 억압
일부 세계 사람들의 머릿속에 관습적, 관념적으로 남아있는 계급을 제외하고는 현대 사회는 법리적으로 평등한 사회다. 모든 인간은 자유를 가질 권리가 있다고 말하며, 각자에게 스스로가 되기를 요구한다. 세계는 우리에게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진정성’을 가진 사람이 되라고 말한다. 저자는 그 진정성에 대해 “오직 자기 자신과만 같을 것, 오로지 자신을 통해서만 자신을 정의할 것, 자기 자신의 저자이자 원작자일 것을 강요한다. 진정성의 명령은 자신에 대한 강제를 만들어낸다.”라고 말한다.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하는 노력은 필연적으로 타자와의 비교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이제 막 대학교에 입학한 신입생들에게서 자주 나타나는 모습이다. 고등학교, 거슬러 올라가면 초등학교까지 우리는 학생 신분으로서 많은 자유를 빼앗긴 채 살아왔다. 공동체 생활을 위해 수많은 교칙을 준수하고, 학교에서 정해준 교복을 입으며, 획일적인 일과를 보낸다. 그런 학생들이 수능을 치르고, 대학에 입학하면 자유의 늪에 던져진다. 시간표부터, 과외활동까지 자유롭게 택해야 한다. 심지어 학과가 아닌 학부로 입학한 학생들은 과를 정하는 것도 본인의 손에 맡겨진다. 그리고 말한다. ‘너답게 살아라.’ 그러나 무엇이 ‘너다운’ 일인지 모르는 학생들에게는 너무 가혹한 요구가 아닌가? 애초에 나답게 살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면 우리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겨우 대답한다. “아무거나.”
이런 자유는 오히려 강박과 억압으로 작용하게 된다. 우리는 그 속에서 자기 파괴적인 사고를 멈추지 못한다. 저자는 “오직 자신하고만 같고자 하는 진정성의 노력은 타인들과의 영구적인 비교를 낳는다”라고 말한다. 남과 다름을 충족하려면 당연히 남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남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끝없는 비교의 반복이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라고 할 수는 없다. 자유를 만끽하며 자신의 진정성만을 돌아보는 사람은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언가를 얻기 위해’ 살아가기보다는 ‘가진 것을 잃지 않기’ 위해 살아가는 경향성이 짙다. 그런 우리에게 진정성의 요구는 또 하나의 압박이 된다.
존재의 역설
저자는 하이데거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죽음은 단지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존재하기의 한 가지 방식,” 즉 자신으로 존재하기의 탁월한 가능성이다.” 존재는 부재로서 증명된다는 철학적 사유다. 한 번에 와닿지는 않았다. 그러나 죽음으로써 존재가 증명됨은 분명해 보인다. 존재하기에 죽음이 존재할 수 있고, 죽음이 없다면 존재의 가치는 현저히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고 나서야 나의 자아로 존재하게 된다는 말일까? 그러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을 논하는 것 자체가 결국 이 모든 것을 강제하는 것 아닐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우리가 가야 하는 길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저자는 해답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지 않다. 다소 현학적으로 보이는 말을 잔뜩 늘어놓고 짧게 마무리 짓는다. 쉽게 적힌 글은 아니다. 아마 쉽게 쓰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읽는 데에 꽤 애를 먹었다.
현대 사회의 다양성 상실. 처음에는 굉장히 역설적으로 보였다. 조그마한 휴대전화 케이스마저 개인 취향에 따라 맞춤 제작이 이루어지는 세상 아닌가? 그런 세상에 동일자가 늘어난다니. 얼굴도, 옷차림도 억압받지 않는 우리는 그야말로 자유의 세상을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천천히 읽어 내려가다 보니 우리는 천편일률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디지털과 인터넷은 세계를 하나로 묶었다(물론 전기와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은 곳도 있지만 논 외로 한다). 즉각적인 소통이 가능하게 되었다. 멀리 있는 사람의 소식을 5초 이내에 받아볼 수 있다. 집 안에 앉아서도 그들이 오늘 뭘 먹었는지, 뭘 입었는지,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있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 했던가. 휴대전화 사진 프레임에서 편집된 그들의 그럴듯한 모습은 나에게 열등감과 질투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화면에 비친 내 모습을 비교한다. 왜 나는 이러고 살지? 자연스럽게 화살을 나에게 돌린다. 남과 자신을 비교하는 삶은 불행하고 우울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런 구조에서 살고 있다. 그렇다고 오직 나만의 개성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가 묻는다면, 저자는 또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게 주어진 자유마저 압박이 된다고 한다.
그대로의 삶
그럼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나는 무위(無爲)이자 무위(無僞)라고 생각한다. 억지스러움과 위조가 없는 삶이다. 그저 본능적으로 살라는 말은 아니다. 지나친 자기 검열과 자기 침식을 그만두고 살아있는 순간을 만끽하며 존재에 대한 사유를 이어가라는 뜻이다. 차츰 나를 갉아먹는 우울보다는 단단하게 내리치는 반대를 받아들인다. 경험에서 오는 고통을 기꺼이 반기고, 그 속에서 그대로의 거울 속에 비친 위조가 아닌 내면에서 비롯되는 나 자신을 그린다. 그렇다면 적어도 죽음을 목전에 둔 순간, 내가 누구였는지,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알 수 있지 않을까.
얇은 책이었지만 많은 내용이 압축되어 있다. 철학처럼 보였으나, 사회의 이야기다. 길을 제시해 주지는 않았으나 방향을 가리켰다. 모든 생각이 그러하듯 정답은 아닐 것이다. 모든 사람이 행복한 삶을 원한다고 하여 그게 정답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그대로의 사실이 존재할 뿐이다. 그 속에서 내가 나름의 결론을 어떻게 내리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선택만이 남겨져 있다.
정해진 길은 없다. 그걸 정한 사람도 없다. 언제든 방향을 튼다고 해도 우리는 결국 끝에 닿을 것이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진정한 내가 되려는 노력도, 동일자가 되려는 노력도 그만두고 선택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