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비영, 『하란사(2021)』
빠른 호흡과 간결한 문체 덕에 단숨에 마지막까지 읽어내었으나 반전이 주는 카타르시스는 없었다. 정말 그는 그렇게 죽은 것이구나, 다른 결말은 없었구나. 이런 이야기를 읽으려고 내가 끝까지 책장을 넘겼나? 단순하게 말하면 으레 소설에게 기대하는 반전이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 얕은 생각이 드러나고야 말았다.
현실의 삶은 때로 한 편의 소설이나 드라마 같기도 하지만, 소위 기승전결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인생은 많지 않다. 수만 명의 사람이 있다면, 수만 개의 플롯이 존재한다. 그리고 특히나 ‘죽음’이란 건 조정이 불가능한 높이에 존재하는 부재다. 그런 의미에서 ‘하란사’의 결말은 실제 인생의 결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소설 주인공으로서가 아니라 이 땅에 태어났던, 심지어는 그 시대를 타고났던 한 인간으로 본다면 이보다 더 파란만장한 생애가 어디 있겠는가.
이제는 ‘신여성’이라는 호칭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시대가 도래하였지만, 이 책의 주인공 하란사는 분명 시대의 신여성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단순히 서양 문물을 앞서 받아들이고 과거의 인습을 타파하는 의식을 겸비한 사람을 신여성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하란사는 어떠한 고통이라도 감내했기에 신여성이라고 부르고 싶다.
전통사회에서 여성이 받을 수 있는 고통은 한정적이었다. 자아실현에의 좌절, 넓은 관계에서의 갈등, 나아가 국가에 대한 염려까지. 이 모든 것은 남성에게만 주어진 고통이었다. 이때까지 여성은 고통에서조차 불평등을 겪어야 했다. 고통의 종류가 줄어들면 좋은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생을 통틀어 고통의 총량은 같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스스로 선택한 고통이 천 배는 감내하기 쉬울 것 아닌가? 하지만 여성은 주도권이 없는 반쪽짜리 인생을 살아야만 했다.
그런데 하란사는 뒤집히는 세상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기꺼이 그 고통과 마주하기를 택했다.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갔고,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으려 노력했으며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만들어갔다. 여자는 큰일을 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국가의 일에 여자가 감히 끼어들’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담이 있는 땅에서, 하란사는 그 모든 시선과 손가락질을 견뎌내고 꿋꿋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해나갔다.
영웅적 면모를 보이는 인물은 아니었다. 모든 상황을 기껍게 받아들이기보다는 상황에 거칠게 불평하면서도 하는 모습이 오히려 인간적이었다. 인간이라면 쾌(快)를 추구하고 고(苦)를 거부하기 마련이다. 하란사는 그런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준 인물이었다. 그래서 더욱 그가 정말 살았었다는 사실이 와닿았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의 인생을 논하는 것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는 공공연하게 손가락질받는 역사적 인물에 대해서도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편이다. 한 사람의 인생은 그 자신이 아니고서는 평가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내리는 평가도 종종 틀리는 법이니 인생은 애초에 평가의 대상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실존 인물을 다룬 소설을 늘 쓰고 싶어 하면서도 결국에는 펜을 놓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하란사는 내게 논하기 조심스러운 소설이었다. 좋다, 나쁘다 등의 단적인 이야기는 아껴둔다. 다만,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지게 만드는 소설이었다는 말을 하고 싶다.